“리현이가 참 부러워요. <섬>을 한다는 거.” 평소 좋아하던 한 배우가 라이브 방송에서 말했다. 배우 김리현은 음악극 <섬>에서 ‘목소리’ 역할을 맡고 있다. 그 말을 듣고 궁금해졌다. <섬>은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무엇이 매력이길래 다들 보고 싶어 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궁금증과 기대를 품고 티켓을 예매했고, 관람할 날만을 기다렸다.
일 년에 한두 번, 특정인이 아닌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을 만난다. 이 작품을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이 연극을 봐야만 한다고 외치고 싶은 작품 말이다. 음악극 <섬: 1933~2019> (이하 <섬>)이 그랬다.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부러워진다는 말이 단번에 이해될 정도로, 필자 역시 이 공연을 만들고 연기할 수 있는 창작진과 배우들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다.
시작 전에 질문을 하나 던져볼까. “편견과 차별로 가득 찬 세상에서 희망과 치유를 꿈꿀 수 있는가?” 공연의 포스터에 적혀있기도 한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떤 답을 내릴지 궁금해진다. 꿈꿀 수 있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꿈꾸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차별을 당하고, 반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하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낯선 사람들’을 수용하는 진정한 사랑과 희망에 대해 <섬>이 노래하고 있다.
Ⅰ. 1966년의 섬
<섬>, 오직 한 글자의 제목이 어쩐지 고독하게 느껴진다. 그전에 뒤에 붙은 숫자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는 연도들이다. 음악극 <섬>은 다른 시대가 연결되어 흐른다. 1930년대, 1960년대, 그리고 2019년, 구체적으론 1966 - 2019 - 1933 순으로 마리안느와 마가렛 - 고지선 - 백수선과 박해봉의 이야기를 담는다. 각 시대는 순서대로 순환하며 '목소리'와 함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연의 주 공간은 ‘소록도’라는 이름의 섬이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고 불린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지금은 관광을 하러 가는 환대의 공간이지만, 과거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하는 차별의 공간이었다. 그 편견과 차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30년대다. 그러나 공연은 1960년대의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카톨릭 재속회원 신분으로 소록도에 입도한다. 마치 선박의 형상을 한 듯한 무대, 목소리들이 등장해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며 자유로이 뛰어논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가방을 들고 서로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한다. 서로를 소개하는, 다정하고 평온한 말투에는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자의 사랑과 겸손이 배어 있다. 두 사람은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소록도에 삶의 희망을 되찾아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공연은 세 가지 시대를 반영하듯 각각 다른 음악과 천을 활용한 연출을 선보인다. 1966년에는 어떻게 소록도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천주교 재단에서 신앙으로 먼 타국 한국까지 온 이들임은 ‘성가’ 느낌이 나는 음악을 부르는 ‘목소리’들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세 시대의 중간에서 희망과 치유를 노래한다. 이 시대 안에서 흰 천을 든 ‘목소리’들은 자유롭게 흐르며 밝고 따뜻한 목소리와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중에는 “따뜻한 우유 한잔!”이라며 마가렛과 마리안느가 사람들에게 매일 우유를 나누어주는 장면이 있다. 천을 우유라고 상정하고 통에 담고, 빈 통을 채워 나누어 준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어떻게 치유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병이 낫도록 약을 주고 치료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유를 나누며 공허한 마음을 달래준 것이리라. “그 한 잔의 사랑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날마다 우유를 따뜻하게 저어 나누어 주는 행위를 지치지 않고 반복하는 것에서 타인을 향한 굳건한 연대가 느껴진다.
물론 1960년대에도 사람들은 편견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 한센병 환자는 맨손으로 치료하려고 하자 왜 장갑을 끼지 않느냐고 낯설어하며 묻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여전히 ‘섬’에 따로 모여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겪어왔을 편견과 차별의 흔적을 발견한다. 목소리 역의 김리현 배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 역시 1966년일 때인데, 이때 ‘어린이’ 역을 맡는다.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 마리안느가 이를 확인하고 다그치자, 그는 약을 먹으면 검게 문드러지고, 그러면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놀림을 당한다며 먹기 싫다고 답한다. 한성격 하는 마리안느가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 혼내주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든든한 마리안느의 보호 덕에 기세등등해진 아이가 귀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아이가 마주했을 편견의 시선이 떠올라 안쓰럽기도 하다.
Ⅱ. 1933년의 섬
김리현 배우의 '목소리'는 1933년대에 이르러 ‘박해봉’이 된다. 그는 이제 아이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순수하고도 당찬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2019년과 1933년은 조금 더 편견과 차별을 직접적으로 마주한다. 각 시대가 다른 목소리와 분위기를 지녔지만, 그중에서도 1930년대는 다소 날카롭고 묵직하다.
해당 시대는 소록도로 향하는 배를 탄 사람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문둥병’이라고 불리며 숨어 살기 급급했던 이들에게 “지상낙원”을 제공한다는 달콤한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이다. 그 “지상낙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실상은 말로는 차마 담지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 공연 역시 대사와 장면을 통해 이를 선정적이지 않되 감정적 자극을 주는 선에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잠시 현대로 오면, 삼봉이란 남성이 홀로 등장해 한 천을 양 끝의 막대에 묶어 펼친다. 그는 관객들에게 1933년의 소록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며 지나온 역사를 설명한다. 천에는 왼쪽에 아이들, 오른쪽에 부모가 멀리 떨어져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있다. 삼봉은 자신 역시 ‘그곳에 있던’ 아이라고 말한다. 가운데 길을 두고 가족이 갈라져 있던 상황이 그려진 천을 걷으면, 1933년대의 장면이 그려진다.
<섬>은 각 시대를 구분하고 돌아가며 보여주기도 하지만, 겹치게 등장시키기도 한다. 삼봉이 설명을 하다가, 천의 장면과 똑같이 사람들이 등장해 소리 없이 대화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초점이 명확히 현대에서 과거 1933년으로 옮겨지는 순간, 아우성은 소리를 얻는다. 전염성이 있다고 여겨져 떨어져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모자지간에 “엄마! 보고 싶어요!”라는 말이 들린다. 그 극적인 전환이 잔잔했던 마음이 요동치게 만든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소록도는,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그 자체가 되었다. 사람들의 격리와 핍박은 현실을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몰라서 3년, 알고서 3년, 썩어서 3년" / "걸려서 한 번, 썩어서 한 번, 태워서 또 한 번 세 번을 죽는다"라는 말이 당시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살아서는 착취당하고, 죽어서는 실험당하며, 끝끝내 한 줌의 재로 태워지는 삶'에선 뿌리 깊은 ‘한’의 정서가 느껴진다. 천으로 묶은 곳은 감염부위를 상징하며, 공연을 보며 그것이 어떻게 억압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어두운 천이 마치 낙인처럼 느껴진다.
한편, 그곳에서도 사랑은 싹텄다. 백수선을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던 박해봉의 진솔한 호감 표시에 절로 웃음이 난다. 결국 이어진 두 사람은 밤마다 만나며 사랑을 나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간이 흐르고 이곳이 ‘지상낙원’이 아님을 알게 되자 해봉은 수선에게 도망가자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긴 배는 도망자를 색출하기 위한 파멸의 길잡이였고, 해봉은 그들에게 잡히면서도 수선을 배에 태워 보낸다. 해봉이 잡히는 모습은 검은 천에 사람들이 그를 묶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검은 천들이 밧줄처럼 그의 몸을 옥죄고 있다. 사랑이 이어지는 것을 옥죄고 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며…”라고 통곡하는 그녀를 보며 관객 역시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Ⅲ. 2019년의 섬
<섬>에서 ‘참담함’을 가장 크게 느낀 장면 중 하나는 앞서 말한 배에서의 이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2019년의 고지선이 아이 지원을 키우며 부딪히는 난관들에 있다. 2019년의 고지선은 출산이 임박한 시점에서도 전화기를 붙들고 업무를 볼 만큼 일에 진심인 사람이다. 노산이라 걱정된다며 수술도 거부할 정도로 아이에게 진심인 엄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굴고 발달이 느린 모습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미루고 미룬 걱정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을 때, 그것을 마침내 인정했을 때, 지선의 세계는 또 다른 소록도, 즉 ‘섬’이 된다.
아이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지선이 홀로 분투하는 느낌은 더 강하게 드러난다. 지선과 그의 남편은 아이의 모자를 손에 들고, 혹은 자신이 쓰고 움직임과 행동을 보여준다. 지선이 치료를 결심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 모자를 쥐고 - 시간에 맞추어 각 분야의 치료를 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아이를 달래고 끌고 다니며 치료를 반복하는 일상을 보낸다. 지선은 이렇게 몇 년을 들이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이 될 것이란 기대를 걸어보고, 막대한 비용에는 돈 쓰기 참 쉽다는 말로 웃어넘겨 보려 한다. 턱끝까지 숨이 찬 것처럼 이미 지친 것이 보인다.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희망에 아득해지기까지 한다.
그녀가 발달장애 자식으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립된 '섬'에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장면은, 다름 아닌 가족을 만났을 때이다. 그녀의 오빠는 아이를 시설로 보내자는 말을 한다. 결과도 불확실한 치료를 통해 아이와 사회에 섞이려고 온 마음을 다하고 있는 지선에게 그 말이 어떻게 와닿을까. 그녀에겐 사실상 아이를 버리자는 말과 똑같이 들렸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소록도로 들어왔던 부모들 역시 그렇게 아이를 버리는 기분이었을까, 자신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지선이 제 삶을 살아갔으면 해서 한 말이라지만, 그 안에는 존재를 분리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내포되어 있다. 참 아픈 말이다.
Fin. 2026년의 섬
지선의 인정받지 못하는 반복이,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주린 배와 시린 마음을 달래줄 따뜻한 우유 한잔'을 매일 나누어주던 상황과 비교된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그 생활의 반복으로 한센병 환자들에게 ‘나을 수 있다’라는 희망을 불어넣으며 짙게 드리웠던 편견의 그늘을 조금씩 걷어냈다. 지치지 않고 희망을 전하는 목소리를, 더 이상 ‘섬’이 아닐 수 있는 실마리를 ‘지금의 지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장면이 전환되고, 장애인 학교 설립 토론으로 찬성과 반대 측이 갈라진 틈으로 지선이 나온다. 지선은 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탔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아이는 달리고 싶어 했고, 지선이 손을 놓자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닌다. 의아하고 당혹스러운 시선도 잠시, 짧은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다시 시선을 내려 스마트폰을 본다. 사람들은 발달장애 아동을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음악극 <섬>은 그 '익숙함'에서 답을 찾는다. 뛰어다니는 소란이 사그라들기까지의 단 몇 분이 지나는 동안, 앉아 있던 청년은 아이가 지나가면 다리를 접었다가 펴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섞여 들어가고,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면 된다. 나와 다른 이를 외딴곳에 격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의로 바라보고 대한다면 희망은 ‘섬’이 아닌 바로 이곳에 있을 것이다.
연산호 작가는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라는 웹소설에서 “나는 선의의 순환을 원한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섬>에서 1966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한국이 “도움을 받던 국가에서 도움을 주는 국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선의는 정말로 순환하는 것 같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보살폈던 이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았다. 결국 희망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희망은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망이 현실에 ‘정착’하려면 나와 너와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이 작품이 내린 결론이 진부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 그들이 이동권 시위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일상적으로’ 지하철을 타는 장애인을 본 적이 있던가. 섬은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 섬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희망과 사랑이 관념적 유토피아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 현실에 머무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