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간은ㅡ"
가득 채우는 것만이 정답이 아닐 때도 있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들을 쥐는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그 시간을 의식하는 자는 거의 없다. 몸과 마음이 흐릿해지는 바쁨 속에서, 문득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보고 싶어진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국내에선 2019년 초연을 거쳐 2026년 초에 오연을 마쳤다. 공연은 한 명의 배우를 ‘서술자’로 내세우고 시몽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연기하도록 한다. 그의 가족, 친구, 연인, 그리고 장기이식을 진행하는 병원 사람들 등 다양한 인물이 배우의 몸과 말을 빌려 나타난다.
이것은 새벽 5시 50분에 서핑을 즐기던 청년 시몽 랭브르의 모습으로 시작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시 흩어지는 다음 날 새벽 5시 50분까지의 이야기다. 이 글을 읽으며 삶을 비워내고 충실해지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이 공연을 반드시 보기를 바란다.
Ⅰ. 일인극의 경이로운 연기술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잔기술 없이 간결하다. 그저 한 청년이 서핑하며 생명력을 느끼던 순간부터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다른 이에게로 심장이 이식될 때까지의 과정을 담담히 따라갈 뿐이다.
‘서술자’가 되는 한 명의 배우가 극을 이끌어가는 일인극의 형태인 만큼 배우의 연기술이 중요한 연극이다. 서술자는 제3자의 위치에서 발화함과 동시에 그 인물이 되어 말하기도 하고, 그 인물을 바라보는 다른 인물이 되어 말하기도 한다. 일인다역 연기야 연극에서 흔히 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술자이면서 동시에 서술 당하는 당사자의 정서까지 동시에 연기하는 기술은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각 인물의 특성을 살려 톤과 움직임 태도를 모두 다르게 하여 구분토록 한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렇게 다양한 인물에 이입하는 서술자는 순간적으로 시몽이 되기도, 그의 죽음을 듣고 무너지다가 이식을 결정한 부모가 되기도,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가 되기도, 이식에 참여한 의사들이 되기도, 다시 관찰자가 되기도 한다. 인상적인 것은 여러 명의 배우를 캐스팅하여 각자 그 인물의 역할을 맡도록 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서술자의 입을 거쳐 모든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더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게 되며,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이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의 열기’가 필요한지 느낄 수 있게 된다. 서술자의 언어를 따라가며 관객들은 이식 동의부터 수술까지의 긴박한 절차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Ⅱ. 감각적인 연출 - 파도, 시계, 심장
이 극의 가장 큰 축은 ‘시계’, ‘파도’, 그리고 ‘심장박동’을 통한 유기적 연출이다. 공연에서는 초 단위까지 나오는 커다란 시계가 때때로 시각을 알리고, 커다란 스크린에 파도가 밀려오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고 심전도가 보인다. 파도의 이미지는 무대를 집어삼킬 듯 압도적이다. 서핑을 하는 시몽의 뒤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무대에는 연기가 피어나 물보라처럼 보인다. 가상의 파도가 연기 때문에 공간이 확장되면서 현실로 다가와 실제로 파도 바람을 맞는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시몽이라는 어린 청년이 파도에 맞서 서핑을 하는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살아있는 자’의 육체적인 면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수선’을 위한 단계가 펼쳐진다. 사고를 당해 이송되던 새벽 5:49:59로 시작해 사망 진단과 이식 절차, 그리고 이식이 마무리되는 다음 날 같은 시각 새벽까지 꼬박 24시간을, 공연은 시계를 통해 가시화한다. 이러한 가시화는 필연적으로 압축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체감토록 하는 보완 장치이자, 생명이 존중받는 절차의 무게를 체감하는 효과를 주는 장치이다. 이식의 후반부에 이르면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적출하기 전 가족의 부탁으로 워크맨의 7번 트랙을 튼다. 이후 커튼콜 직전까지 긴 암전이 이어지며 음악 소리가 이어진다. 암전은, 마치 이 모든 상황을 함께 겪은 후에 하는 긴 애도 같다.
이식 수술이 시작되고 심장이 타인의 몸으로 옮겨갈 때, 스크린 속 테두리만 있는 흰 원 안이 채워지면서 심장의 형태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이후 피를 조금씩 흐르게 하는 순간 심장 모양 안에 혈관이 보인다. 이식한 심장을 뛰게 만들기 위해서 전기충격을 할 때 빨간 글씨로 다시금 현재 시각이 보인다. 그 뒤로 심장박동을 보여주며 생명의 시간이 흘러간다.
제세동 1차 시도 때는 두 번 뛰다가 삐익-소리를 내곤 멈추자, 의사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2차 시도를 한다. 이식받은 심장은 세 번 정도 뛰다가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이어서 재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심장이 세차게 뛰다가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우가 내뱉는 대사-태아의 심장이 최초로 뛰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가 함께 들린다. 죽음의 끝에서 다시 태어나는 극적인 순간이 긴박한 재생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공연은 이식받고 다시 뛰기 시작하는 심장의 순간을 단순히 말로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화면으로 보여주고, ‘청각적’으로도 들려준다. 이는 지금 뛰고 있는 관객의 심장과 같이 연결되면서 미치도록 생생한 감각을 선사한다. 감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직관적으로 활기차게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이 배우가 대사를 뱉는 호흡과 놀라울 정도로 하나가 된다.
파도가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듯, 시계가 시침과 분침이 째깍거리며 하루가 반복되듯,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가 멈추고, 이식된 후 또다시 뛴다. 긴박하고 긴장되었고 유독 부각되던 ‘심장이 뛰는’ 감각을 공연이 아주 자연스럽게 제속도로 돌려놓자, 관객도 긴장감이 해소된다. 깔끔한 연결성이 모든 절차 후에 온전한 여운을 남긴다.
Ⅲ. 생명과 이식에 대한 진지한 사유
심장을 연결하는 혈관들을 끊는 수술을 하는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연출 방식이 지나치게 적나라한 것 아닌가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무의미한 자극을 위해 이러한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다. 겉핥기식으로 의미를 명시하고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겪는 현실’을 통해 가장 본질에 가까운 사유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기에 충분히 의미가 있다.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경건하게 장기이식을 다루려는 연출의 노력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장기이식 수술을 집도하는 ‘손’에만 흰 조명을 비추며 부각하는 것, 수술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배우가 위치를 바꿔가며 한 과정씩 보여주면 각각의 위치에 조명의 흔적을 연속적으로 남기는 것, 그리고 시몽의 몸을 가를 때 십자가 모양처럼 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종교적으로 신성한 느낌을 의도하는 것 등등.
언어 사용의 섬세함이 순환과 연결성을 받쳐주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 무대에는 최소한의 장치인 책상과 의자, 그리고 배우 한 명만이 놓여 있다. 그곳에서 긴 암전 속 파도와 음악 소리, 독백은 무언의 언어로 작용한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는 ”아드님은 장기를 꺼내기만 하면 되는 장기 보관소가 아닙니다“라고 ‘언어’로 명확하게 발화한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한다는 제목이 인간의 몸을 별것 없는 도구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종교적 이유로 이식을 반대하는 부모가 “내 아들을 두 번 죽게 할 순 없어요.”라고 말하는 거절의 대사, “1/3은 이때 반대를 합니다.”라는 객관적인 통계는 대사가 아닌 ‘자막’으로 처리되며 ‘말’에는 필연적으로 실릴 수밖에 없는 긍정 혹은 부정의 어조를 지운다. 온전히 모든 선택을 존중한 것이다.
Fin.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남긴 감각
“나 시몽 랭브르가 되었다가 나온 것 같아.”
공연이 끝나고 어느 관객이 객석을 나오며 했던 말이다. 청년의 심장은 공연 속 나이 든 여성에게로, 그리고 이제 관객들에게로 이어져 뛰기 시작할 것이다. 그에서 그녀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 고리는 ‘살아있음’을 소중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암전이라는 공연의 묵직하고도 간결한 마무리 앞에 관객은 말을 잃는다.
공연에는 무대, 오로지 한 명의 배우, 그리고 어렵지만 필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소식과 사건·사고를 접하며 쌓이고 지치고 혼란스러워지는 이들에게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충만하게 비우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면밀히 고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예술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정말 잘 보여주는 이 작품을, 지금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당신의 당신의 생각보다 살아있다. 그것도 아주 열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