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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이름이 뜻을 가지지 않을 때 [도서]

구병모의 「니니코라치우푼타」를 읽고

by 최은파 에디터
2026.10.2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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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소설 「니니코라치우푼타」의

      줄거리와 결말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끝내 오지 않는 외계인


       

      구병모의 「니니코라치우푼타」를 외계인이 등장하는 SF로 읽는다면, 이 소설은 끝까지 실패한다. 외계인은 나타나지 않고,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쉽사리 해독되지 않는다.


      인류가 지구 바깥의 지적 존재와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다루는 이야기, 이른바 콘택트 서사는 독자에게 몇 가지를 관습적으로 약속한다. 낯선 존재와의 만남, 그 언어의 번역,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상호 이해. 이 소설이 끝내 지켜내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실패야말로 이 소설이 장르적 상상력을 다루는 방식이다. 치매를 앓는 여든일곱 살 어머니가 발음조차 힘겨운 이름 하나를 붙들고 놓지 않고, 특수분장사인 딸이 그 정체를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는 언뜻 콘택트 서사나 추리 소설의 문법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이 몰두하는 것은 ‘외계인이 실재하는가’가 아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이름―니니코라치우푼타―을 어떤 뜻에도 고정 시키지 않은 채 소설 내내 모호하게 함으로써, 장르적 상상력을 언어 자체에 관한 질문으로 바꿔놓는다.

       

       


      2. 풀리지 않는 암호, 미끄러지는 기표


       

      언어란 관습적이고 자의적인 기호 체계이며, 기표(소리 이미지)와 기의(개념)의 결합은 필연이 아니라 사회적 계약에 의해서만 성립한다. 소쉬르의 이 오래된 전제 위에서 이 소설의 플롯은 출발한다. 어떤 소리가 특정한 뜻을 가지려면 그것이 속한 체계, 즉 랑그라는 사회적 약속과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의 그물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딸은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소리를 어떻게든 그 체계 안에 편입시키려 한다. 철자를 바꿔가며 검색하고(“C의 자리에 K도 넣어보고, P의 자리에 F나 PH를 대체”(24p)), 어머니가 몸담았던 학회의 이력과 위성지도를 뒤지고, 비슷한 발음의 지명이나 인명을 찾아 나선다. 하나의 소리가 뜻을 가지려면 그것과 이웃한 다른 기호들 사이의 차이 체계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하므로, 딸은 그 체계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를 “다른 것들의 동시적 현존으로부터만 나오는 각각의 가치를 갖는 상호 의존적 항들의 체계”(폴 프라이, 『문학이론』, 8장(기호학과 구조주의))라고 불렀다. 하나의 소리는 원래부터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소리들과 나란히 놓였을 때, 그 소리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비로소 뜻이 생긴다.


      그러니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소리가 뜻을 가지려면 그것과 나란히 놓일 다른 항들, 즉 그 소리가 속할 체계부터 있어야 한다. 딸이 헤매는 것은 바로 이 체계다.


      그러나 이 탐색은 끝내 실패한다. 사무장도, 딸도 그 이름의 사전적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신 진실은 전혀 다른 기표 배열로 인해 드러난다. 어머니가 필담으로 남긴, 철자조차 부정확한 영화 제목들의 목록을 통해서만, 그것도 우연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플롯은 추리 소설의 문법을 빌려오되, ‘암호를 풀면 뜻이 나온다’라는 그 장르의 기본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기표는 어떤 기의에도 도착하지 않은 채, 은인일까 원수일까, 외계인 친구일까 학회 지인일까, 끝내는 영화들의 이름 없는 총합일까로 모호함 속에 남아 있다. 마치 같은 빨간 불이 신호등에서는 멈춤을, 크리스마스트리에서는 아무 의미도 지시하지 않듯, 니니코라치우푼타라는 기표 역시 그것이 놓이는 서사적 맥락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 재규정되고 재조립된다.


      이 모호함 자체가 외계와 접촉하고 그 언어를 해독한다는 SF의 관습적 소재를 가져와 정작 해독 불가능성을 이야기 구조의 중심에 놓는 구병모만의 방식이다.

       

       


      3. 조립하는 기억, 조형하는 얼굴


       

      이 소설이 빌려온 장르적 상상력은 외계인이라는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 배경으로 깔린 근미래 한국 사회를 보여준다. 바닥을 드러낸 국가요양보험, 사업장마다 무시되는 정년, 비바람 속에서 지원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요양보호기관 종사자들, 안락사 허용을 둘러싼 시민단체와 종교단체의 대치까지. 그 당시로서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였을지 몰라도, 최근 장애인활동지원사들의 처우 개선 시위 등 현실의 뉴스와 나란히 놓고 읽을 때 근미래와 현재의 거리는 이미 상당 부분 좁혀져 있다.


      장르문학이 흔히 ‘지금, 여기’로부터 한 걸음 비켜선 배경을 통해 오히려 당대의 문제를 선명하게 노출시킨다면, 이 소설의 근미래 설정 역시 정확히 그 문법을 따른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장르적 상상력을 이중으로 배치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어머니의 것으로 치매 걸린 상황에서 파편적으로 남은 스키마를 끌어모아 하나의 존재를 조립해 내는 상상력이다. 소설은 이를 “젊은 날 쌓아 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 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던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 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65p)라고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딸의 것으로 특수분장사라는 직업 자체가 무언가를 덧붙이고 덧붙여 가짜를 진짜처럼, 현실을 낯선 존재처럼 빚어내는 일이다. 딸의 팀은 자신을 “어쩌면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를, 소수정예로 명맥을 이어가는 아날로그 방식의 특수분장팀”(36p)이라 부른다.


      어머니가 무너진 기억의 파편들로 이름 하나를 조형해내는 것과, 딸이 라텍스와 오블레이트로 얼굴 하나를 조형해 내는 것은 ‘만들다’, ‘덧붙이다’와 같은 유사한 동사를 공유한다. 소설은 이 두 개의 제작 행위를 겹쳐 놓음으로써, 장르적 상상력이란 결국 결핍이나 부재를 메우기 위해 무언가를 이어 붙이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4. 자격 없는 기호가 이름이 될 때


       

      이 해독 불가능성은 단순한 플롯의 트릭이 아니라, 소설이 언어 자체에 대해 취하는 입장과 맞닿아 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고 따지는 것도 이제 와서 보자면 지극히 우리 중심적인 사고예요. 나를 이해시켜봐라. 모두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무의미하고 따라서 소용없는 것이다. 그렇잖아요? 하지만 외계의 언어를 우리의 사고 체계에 끼워 맞춰 이해하겠다는 것부터가 너무 오만이다 말이지요.”(30p)


      소쉬르의 틀 안에서라면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처음부터 기호가 될 자격이 없다. 그것을 공유하는 언어 공동체, 즉 랑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차이 체계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무어라 부를 개념이 없다. 그러나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정확히 그 자격 없음의 자리에 서사적 이야기를 더한다.


      니니코라치우푼타가 소설의 결말부에서 도달하는 자리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一者)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65쪽) 이 문장은 이름에 뜻을 붙이는 대신, 뜻이 없어도 이름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쉬르의 체계 안에서 뜻이 없는 소리는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지만, 이 소설은 그 소음 같은 소리에 도리어 일자니 진리니 세계정신이니 하는, 인간이 가진 가장 무거운 말들을 가져다 붙인다. 뜻을 갖지 못했다는 결핍을 애초에 뜻이 필요 없다는 충족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딸이 사전과 지도와 학회 명단을 뒤지며 벌인 일련의 번역은 애초에 번역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음을 실패를 통해 증명한 셈이다. SF 장르에서 빌려온 외계어라는 소재는 결국 소쉬르적 기호 바깥에 있는 것―뜻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였다.

       

       


      5. 아무에게도 증명되지 않아도 되는 사랑


       

      그렇다면 이 ‘이름이 아닌 이름’이 끝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 니니코라치우푼타의 정체가 실은 딸이 십여 년간 몸담아온 특수 분장팀의 흥행에 실패했거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SF·B급 영화들의 목록이었음을 암시한다.


      치매로 언어와 기억의 체계 대부분을 잃어가던 어머니가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세상 그 누구도―심지어 함께 일한 동료조차―알아주지 않는 딸의 노동을 홀로, 몰래 지켜봐 온 시간이었다. “우리 사무실 바깥에서는, 즉 이 세상에서는 나의 엄마만이 알고 있는. 아니, 이제는 알고 있었던.”(64p)이라는 딸의 독백에서 소설은 외계인을 빌려 모성애, 사랑을 말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이 SF라는 장르의 문법―낯선 존재, 해독되지 않는 외계어,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을 빌려와 끝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외계와의 조우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도 논증도 가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조용히 지속 되어온 응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뜻이 아니라 존재로서만 성립하는 사랑이다. 플롯이 해독에 실패할 때 비로소 완성되고, 기표가 기의를 얻지 못할 때 비로소 진실해지는 이름. 니니코라치우푼타는 그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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