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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소설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의 줄거리와
결말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노아씨의 이름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나요?”(291쪽) 천문대로 가는 트럭 안에서 박녹원이 묻는다. 잡담처럼 흘린 질문이다. 소설은 끝까지 답하지 않는다. 대신 같은 질문을 두 번 더 던진다. 한 번은 산 위의 사람들에게, 한 번은 산 밑에서 겨울을 나는 독수리들에게.
면사무소에 갓 들어온 이노아는 선임 박녹원을 따라 산속 폐천문대로 출장을 간다. 일 년 전부터 정체 모를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곳이다. 시끄럽다는 민원과 고요하다는 민원이 함께 들어온다. 노아는 이 산을 두 번 오른다. 한 번은 낮에, 한 번은 그들이 스스로 지른 불 속으로.
1. 판정 직전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공동체가 위기를 넘기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임의의 외부자를 지목해 내쫓거나 죽이고, 그다음 그를 성스러운 존재로 뒤바꾼다. 저주받은 자가 구원자가 된다. 제목이 이미 이 역설을 품고 있다. 산 위의 사람들은 적을 두려워하면서 기다린다.
희생물에는 조건이 있다. 공동체와 충분히 닮아야 하고, 죽여도 되갚음당하지 않을 만큼 공동체의 보복 관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지라르는 그 자리에 사람과 동물이 서로 대신 들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소설에서 독수리와 산 위 사람들이 같은 단어로 묘사되는 까닭이다.
지라르가 성경에 주목한 건 성경이 이 메커니즘을 되풀이해서가 아니다. 폭로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추방당한 자가 정말 죄인이었다고 말한다. 요셉 이야기는 거꾸로 말한다. 구덩이에 던져지고 이집트에 팔려간 쪽은 죄가 없었고, 죄는 형들에게 있었다. 신화는 메커니즘을 완성하고, 성경은 폭로한다. 함윤이의 소설은 세 번째 길로 간다. 메커니즘이 완성되려는 순간, 판정을 보류한다.
2. 노아의 계보
노아의 이름은 개신교도 어머니가 지었다. 노아는 이름 얘기만 나오면 초조해졌고, 오래전부터 개명을 바랐다. 어머니는 밤마다 기도했지만 산 위 사람들 같은 굳건함은 한 번도 보인 적 없다. 습관은 있고 확신은 없는 신앙이다.
관측대에 처음 갈 때 노아가 빌려 쓰는 가짜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 선화다. 그 이름은 공동체 사람의 진짜 이름과 겹친다. “기막힌 우연이네요. 내 이름도 선화거든요.”(295쪽) 선화는 노아의 팔을 쓰다듬는다. 말씨와 걸음걸이는 부드러운데 손아귀 힘이 억세다. 어머니도 노아가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할 때마다 웃으며 양손을 쓰다듬곤 했다. 같은 몸짓이 세기만 바꿔 돌아온다. 노아에게는 웃어넘길 우연이다. 확신을 가진 사람의 손을 거치면 우연은 운명이 된다.
화재의 밤, 연기를 빠져나오며 노아는 털어놓는다. 가명을 댔다는 것, 그 이름이 어머니의 것이었다는 것, 진짜 이름까지. 선화는 말없이 노아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관측대의 새 이름을 알려준다. 거센 풍랑에도 뒤집히지 않고 더 깨끗한 세상에 닿았다는 오래된 목선의 이름. 어머니가 어린 노아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다.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답은 이미 거기 있었다. 정작 노아는 방주를 짓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만난 게 대단한 운명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한참 뒤에야 노아가 답한다. “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딱히 적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선화가 되묻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나요?”(315쪽)
이 질문은 심사다. 공동체가 기다려온 적이자 구원자가 마침내 나타났는지 가리는 자리. 노아는 답하지 못하고, 소설도 대신 답하지 않는다. 장면은 판정 직전에서 멈춘다.
3. 독수리와 공동체
노아가 산 밑에서 처음 마주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새다. “독수리예요.” “저, 야생 독수리 자체를 처음 봐요.”(289쪽) 종교 질문은 이 대화 다음에 온다. 독수리들은 겨울마다 몽골에서 삼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도축 부산물을 받아먹는다. 쫓아내 달라는 민원과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민원이 함께 들어온다. 산 위 사람들 차례가 되면 같은 말이 되풀이된다. 너무 시끄럽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마을은 불안을 떠넘길 대상을 찾고, 그 대상은 새여도 사람이어도 상관없다.
소설은 둘을 겹치는 순서까지 계산한다. 관측대는 국가가 버린 지 오래되어 이름마저 검은 페인트로 지워진 건물이다. 마을에는 털옷 입은 아이나 노인에게 말을 걸었더니 날개를 펴고 날아갔다는 농담이 돈다. 이 농담을 먼저 들려준 다음에야 소설은 공동체원들에게 검은 털옷을 입힌다.
화재의 밤, 평소 거의 날지 않던 독수리들이 일제히 떠올라 불타는 돔 주위를 맴돈다. 나중에 녹원이 알려준다. 독수리는 위험하거나 비상시에만 밤에 난다. 이 한 문장이 그 밤을 두 번 쓴다. 공동체에게는 오래 기다린 구원의 절정이었고, 새들에게는 위험 신호였다. 소설은 어느 쪽이 진실인지 가리지 않는다. 희생양이 성스러워지는 순간과 놀란 짐승이 흩어지는 순간을 한 장면에 포개 둔다. 성스러움이 완성되려면 둘 중 하나를 지워야 한다. 소설은 지우지 않는다.
4. 원의 중심
노아와 독수리는 같은 자리에 세워지지만 빠져나오는 방식이 다르다. 노아는 이름이 요구해온 역할을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산을 내려온다. 끝내 판정받지 않은 채로. 독수리들은 처음부터 판정 바깥에 있다. 공동체가 믿어온 구원은 언제나 바깥에서, 적과 함께 왔다. 새들은 새의 이유로 난다.
이 소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건 의미가 그 사람의 운명으로 굳는 과정, 그 과정이 완성되기 직전의 한 박자를 붙잡는다. 지라르가 성경에서 읽어낸 폭로보다 조용하다. 대신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가장 필요한 부품 하나를 빼놓는다. 확신이다.
노아의 이름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 어머니가 붙였고, 선화가 읽어냈다. 다만 그 의미가 노아를 산 위에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산을 내려온 노아가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독수리들은 한곳을 향해 날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둥글게 돌다가, 목적지가 그 원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듯 천천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