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는 기다린다. 그런데 무얼 기다리나? 그가 먼저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이게 무슨 문장인가.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하는 건 홍상수 영화의 특징이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왠지 알 것은 같다. 원래 기다림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렇다.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건데, 사실 달라질 게 없는데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은 상태다. 오고 가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는 한 나와 함께 무한한 대기실에 놓여 있는 상태. 스웨덴에서의 내 생활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미리 계획해 놓은 여행 날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시차가 다른 친구들의 답장을 한국의 아침까지 기다리고, 수리 센터에 맡겨 놓은 맥북이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이 기다리고, 기차 지연 환불을 신청하려고 보낸 메일의 답장을 기다린다. 기다림에는 선택권 따위는 없다. 통달해보려 해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가 먼저 오면
오는 거고
유부남 감독과의 일이 알려진 뒤, 영희는 한국을 떠나 독일의 한 도시에 머물며 그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채로 지낸다. 친구와 공원을 걷고, 밥을 먹고, 별일 없어 보이는 하루를 보낸다. 괜히 서투른 영어로 몇 마디 더 해보고, 어색한 분위기에 어색해하고. 할 일이 없어서 할 일을 만들어 본다.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기다림은 원래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하루를 채우는 모든 일이 사실은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된다. 그렇다고 그 사람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 남자들 몸은 좋더라' 같은 실없는 말이나 던져 보고, 그래서 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지는 것 같고. 의미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진심이 섞인 말들로 시간만 낭비한다.
후회도 계속하다 보면 달콤해지지. 뭐든 오래 생각하다 보면 내 일부가 된다. 후회도 자꾸 하다 보면 그게 후회였다는 걸 잊고, 추억의 한 종류로 자리를 잡는다. 그가 먼저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뭐. 남자는 다 한심하다고 외치면서도 끝내 남자를 놓지 못한다. 외국 남자들 몸은 좋더라. 안은 다 똑같은데, 사람은 원래 다 똑같지.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그냥 여기 계속 살까.
그냥 여기서 계속 살까? 실현될 리 없는 넋두리지만, 영희나 나나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자주 읊조리게 되는 말이다. 별건 없지, 그냥 공원에 가고 별을 보고 책을 읽었다. 맥주 맛이 많이 좋아졌지, 한국에 비하면 여기 맥주는 정말 괜찮아. 함부르크의 공원이나 린셰핑의 공원이나 한적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마음이 딱 맞는 친구 찾기 어려운 건 똑같다. 맥주 맛이 한국보다 조금 나은 것도 거기서 거기고.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문득 공부가 하고 싶다, 똑똑해지고 싶어. 영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투른 영어를 한 마디씩 내뱉는 사람이고, 친구는 부끄러워서 입을 못 떼니까 영어 실력이 안 는다고 답한다. 멍청한 걸 들키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똑똑한 티를 내고 싶지도 않은데, 나보다 더 똑똑한 것처럼 설명을 늘어놓는 남자를 보면 국적 불문하고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질문하면 대답해, 내가 허락하면 말해.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 오래 있다 보니 머릿속 목소리만 점점 커진다. 입 밖으로는 고르고 골라 말하면서, 속으로는 누구보다 시끄럽다.
남자는
다 한심해
평소엔 잔뜩 긴장해서 단어 하나도 고르고 고르다가, 술만 마시면 이상하게 영어가 술술 나온다. 틀려도 상관없고,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고, 속으로만 시끄럽던 말들이 그제야 입 밖으로 쏟아진다. 영희가 강릉의 술자리에서 사랑에 대해 소리친다. 아무것도 모르면 입 좀 조용히 하세요, 자기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장 시끄럽게. 사랑이 어디 있는데, 있다면 보여줘 봐. 이미 사랑하면서 하는 말이다. 다들 사랑받을 자격 없어요. 가장 자격 없는 사랑을 하면서 하는 말이다. 지금 죽어도 상관없지, 그래서 살면서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늘 자기가 하는 말과 반대로 살곤 한다. 크게 바랄수록 멀어진다.
서울과 다르게 스웨덴의 작은 도시인 이곳에서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10분만 걸으면 Valla Pony Club이라는 곳에 다다른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등굣길에 그 앞을 지나고, 말들은 날씨가 좋으면 밖에 나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나는 자주 혼자 말을 보러 그곳에 간다. 어느 날은 걷다가 말의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눈을 맞추었나? 말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 그치만 말이나 사람이나 어차피 여기에선 다 똑같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도 모르니까, 이 일기장을 누가 찾아도 어차피 아무도 못 읽을 거다. **. **. **. 네 이름이지만 넌 읽지 못하지. 어쩌면 한국에서도 같을지 모른다.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긴 했던가? 남자가 있었나?
남자는
다 한심해
이유도 모르고 사과부터 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남자, 왜 사과해야 하는지 일일이 납득시켜 달라는 남자. 남자만 그런가. 영희도 나도 속으로는 여자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남자들처럼 생각한다.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관례처럼 어린 시절을 묻는다. 어린 시절에 베인 상처나 처음으로 따뜻한 살이 맞닿았던 기억은 한 사람의 거대한 암호가 되니까. 사랑해서 알고 싶은 건지, 알고 싶어서 사랑하는 건지 요즘은 모르겠다.
좋은 감촉을 위해 바세린을 매일 밤 치덕치덕 바르지만, 정작 오래 남는 건 상대의 부르튼 입술이다. 향수를 뿌리고 친절한 말을 건네던 말끔한 모습보다, 후드티에 피곤한 얼굴로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곤란해 하던 모습에 더 마음이 갔다. 강릉에서 술자리가 끝나고, 영희는 자기를 달래 주던 준희 언니에게 돌연 입을 맞춘다. 그 남자를 계속 기다리던 사람이, 남자가 아닌 언니에게. 준비되지 않은 얼굴로 온 사랑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기다리던 사랑은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고, 모르는 새에 새로운 사람은 계속 온다. 더 잘 사랑하고 싶다. 이번엔 괜찮을지도. 그래도 다음부턴 입맞춤부터 하지는 말아야지.
암탉과
달걀
영희는 끝내 그 남자를 버리지 못한다. 지나간 사랑은 깨끗하게 끝나지 않고, 품에 남은 채로 조금씩 식어간다. 사랑할 때마다 그냥 암탉이 된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 게 아니라, 그냥 품는 알이 늘어나는 기분. 썩은 줄도 모르고 품고, 깨지면 버리겠지만 그래도 계속 따뜻하게 유지한다.
남자는 다 한심해. 무정란 투성이에 쉽게 깨지고, 그러면서도 깨지기까지는 되게 오래 걸린다. 한 손으로는 깨지지도 않으면서, 어디 살짝 스치기만 해도 금세 흘러 넘친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이대로 그와 만나지 않는다 해도 재밌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키가 크고 어깨를 살짝 숙인 채 걷는 짧은 머리의 남자를 보면 잠시 움찔한다. 머리를 매만지고, 괜히 한번 내 얼굴을 확인하고. 달라지는 게 없으면서. 그렇지만 여긴 그런 뒷모습들로 가득하다. 기다림은 품고 있는 동안에도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한다.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입과, 닮은 뒷모습에 움찔하는 몸이 따로 논다.
그래서 후회도 계속하다 보면 달달해진다고 하는 걸까. 애착이라는 건 너무 이상하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가 없다. 죽고 못 살고 뭘 해도 다 품을 수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꼴도 보기 싫어지고,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나 자신만 가득하다가, 다 끝난 뒤에야 상대가 가득해진다.
말과
고양이
영희가 낯선 도시에서 보내는 시간도 그렇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람도 동물도 풍경도 비슷한 거리로 다가온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태는 오히려 이상한 평온함을 준다. 아무도 내 말을 읽지 못하는 곳에서만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이 일기도, 영희의 혼잣말도. 이름을 세 번 불러도 그 이름의 주인은 읽지 못하는 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무례한 글.
오늘 말에게 핥으라며 손을 내밀었는데, 말은 나를 물었다. 사랑도 사람도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내일 다시 가면 그 말이 어디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나는 가서 그 말이 있는지 다시 찾게 될 거다. 말을 보러 간 건, 그 남자에게 말을 보는 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근처에서 자주 마주치던, 그 애한테 자랑했던 턱시도 고양이를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양이를 보내며 웃었던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과 고양이, 사람을 만나는 건 다 같은 걸지도 모른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영희는 결국 해변에 혼자 남는다. 그를 다시 만났는데도 별다른 행복감 없이. 그렇다고 이대로 만나지 않는대도 별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산다. 후회를 곱씹고, 곱씹다 보니 달아지고, 그러다 까먹는다. 기다림에는 선택권도, 통달도 없지만,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루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