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연극을 보면서 막 웃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나니 꽤 개운했다. 아, 기분 좋게 편해졌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굵은 나무 기둥과 촘촘한 문살, 그 앞으로 한 단 높이로 올라선 널찍한 마루가 있었다. 집 왼편에는 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부유한 선주(船主)의 집이었다. 그러나 처음 간난이 무대 위에 등장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집보다도 그녀의 발이었다.
간난은 바다에 빠져 죽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며 관객과 선주에게 아예 등을 돌린 채 돌아누워 있었다. 그러면서 새카매진 발바닥이 보였다.
아홉 척의 배를 소유한 선주는 무사한 항해를 위해 해마다 어린 처녀를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왔다. 이번에는 겉보리 스무 가마에 간난이라는 소녀를 사들여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그렇게 데려온 아이를 '마마'라고 부르며 극진히 모시면서도, 정작 맨발로 누워 있는 그녀의 발 하나 가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양말을 꼭 신고 다닐 필요는 없다. 집에서는 맨발로 지낼 수도 있고, 여름에는 샌들을 신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추울 때면 발 하나마다 옷을 입혀주지 않는가. 딱 봐도 얇아 보이는 옷가지에 발까지 그대로 내놓고 있으니 자꾸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러니 그녀가 밥이라도 먹고, 뒤뜰에서 깨끗이 목욕한 뒤 버선을 신고 나타났을 때 얼마나 마음이 놓였던지. 옥빛 저고리에 분홍색 치맛자락보다도, 그녀가 찬 바닥을 더는 맨발로 짚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렇다고 버선 한 켤레가 간난의 처지를 바꿔주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 집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머지않아 인당수로 떠나야 하는 소녀였다. 다만 나는 그때까지도 간난의 죽음보다 그녀의 새카만 발바닥이 더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니. 순진한 소녀 하나를 어떻게든 꾀어내려고 악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재미를 느낄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연극 자체가 지루했다는 말은 아니다. 저마다 자신의 배역에 딱 들어앉은 세 형제의 연기를 보는 맛은 물론 있었다.
세 사람이 간난을 바다에 뛰어들게 하려고 갖가지 수를 쓰는 모습에는 조금 우스운 구석도 있었다. 이를테면 심청전을 읽어주며 효녀가 되길 강요한다거나, 종이 연꽃을 건네며 죽은 뒤에는 영생과 행복이 기다린다고 설득한다거나, 왕비의 옷과 가채까지 가져와 죽기 전에 왕비로서의 행복을 마음껏 누려보라며 달래는 식이었다.
참, 어디 말이나 잘하나 들어보자. 거의 반쯤은 반항 어린 마음이었는데, 놀랍게도 세 형제는 저마다 선주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얼마나 진심으로 간난을 설득하던지. 정말 내가 저 무대 바깥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면, 누구의 의견이든 한 번쯤은 흔들렸을 것 같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둘째 아들의 말에 따르면 간난이 바다에 빠지면 커다란 연꽃이 나타나 그녀를 싣고 올라와 대궐로 데려가고, 심청이처럼 왕비가 될 수 있다고!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밥 한 끼 마음 편히 먹어보지 못한 간난에게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까. 설령 믿기 어려운 말이라 해도, 한 번쯤은 그 말을 믿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내가 가장 웃지 못한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 간난이 극을 이끄는 고수에게 글을 배우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고수가 허공에 글자를 써주면 그 움직임을 따라 붓을 들고, 자신에게 붙여진 온전한 그녀만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던 순간. 그때의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또 셋째 아들의 회유로 가채를 쓰고 왕비의 복장을 한 간난이 선주에게 왕비는 어떻게 걷느냐고 물으며 몇 번이나 그 앞으로 걸어갔을 때도 그랬다. 이제는 버선도 신고, 좋은 옷도 입었으니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간난은 왕비처럼 걷는 법을 몰랐다.
선주는 걸음걸이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고, 간난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걸어보기도 하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다시 간난의 발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마루에 맨발을 내놓고 누워 있던 소녀가 이제는 왕비의 옷을 입고 몇 번이고 걸음을 연습하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배우고, 왕비의 마음가짐도 익혔지만 정작 그 발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여전히 간난의 뜻대로 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걷는 법을 배우는 동안에도 그 아이가 향해야 할 곳은 인당수였다. 내 시선 안에 놓인 간난이라는 꽃 한 떨기가 너무도 불쌍해 웃지 못하였다.

왼쪽부터, 선주와 간난
선주에게도 큰 연민을 느끼지 못했다. 그와 눈을 몇 번 마주쳐도 내가 그에게 보낼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살았구나.' 하는, 그냥 그 정도의 한마디였을 뿐이다. 그의 앞뒤로 너무 많은 죽음이 놓여 있었다. 말년에 갑작스레 후회해서 무엇 하는가?
그가 만약 죽음을 앞둔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의 사업이 조금 더 번창하는 시점이었다면? 세 아들이나 경리가 조금 더 매혹적인 제안을 했다면, 선주는 정말로 간난에게 시간을 더 주었을까.
사람이 나이가 들고 허리가 굽고 체력이 다할수록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차라리 원래처럼 하기라도 했으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할 텐데.
하필이면 그동안 만났던 '마마'들과는 확연히 다른, 당돌하고 매력적인 간난을 보고 나서야 그 아이의 죽음을 어떻게든 미뤄주려는 선주의 태도가 간난보다 언니인 내 입장에서는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나 나나 결국 남이고, 그의 선택을 비판한다고 해서 이미 지나간 수많은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배우의 육신을 통해 내 눈앞에 나타난 선주를 편치 않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그런 선주가 마지막에는 간난에게 금은보화를 건네며 달아나라고 권했다. 그러나 간난은 떠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죽을 곳은 있어도 살아갈 곳은 없다고 했다.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빌었다면, 자신은 아홉 척의 배에 탄 뱃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겠다고 했다. 바다에 빠져 죽느니 굶어 죽겠다던 간난이 결국 스스로 인당수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는 그 선택을 마냥 아름다운 희생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소녀가 아닌가. 밥을 먹고, 목욕을 하고, 새로운 옷을 입고, 자신의 이름을 쓰는 법까지 배우며 살아 있는 동안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던 간난이었다.
이제는 선주마저 살아남으라고 말하는데, 간난은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그토록 살고 싶어 했으면서.
그렇다면 간난을 보며 나는 누구를 떠올렸던가? 그냥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간난이만 보였다. 때때로 간난이 된 배우의 얼굴도 보였다. 목소리나 딕션이 참 뚜렷하시네. 그런데 눈빛이, 눈빛이…… 정말 박간난이구나.
공연을 보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막이 내리고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에는 조금 전과 달리 어딘가 긴장되어 보이는 배우들의 표정과 시선도 기억에 남았다. 간난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그 역할을 연기한 배우로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도 좋았다.
그런데 연극을 왜 보나 했더니,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뚫어져라 눈 맞춤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또 있나 싶더라.
나는 보통 사람과 이야기할 때 거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그걸 스스로 부담스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나도 사회적 동물이니 적당한 타이밍을 봐가면서 눈을 내리깔 때도 있고, 먼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는 내가 관객이고, 그들은 각자 맡은 인물이 되어 있으니 내가 그들을 오래 바라본다고 해서 어떤 압박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내 시선이 반드시 응답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얼굴을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고, 그들 또한 우리를 바라보며 연기할 수 있다.
연극이라는 게 사실 무대 위의 배우들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관객이 있어야 비로소 무대의 막이 오를 수 있다. 나는 그들이 연기를 이어갈 이유 중 하나가 되고, 그들은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이 되어준다.
그리고 우리는 공연장 밖에서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도 나눈다. 왜 간난은 죽어야 하는가? 아니, 왜 죽어줘야 하는가. 왜 간난은 결국 선주를 용서하고, 자신을 팔아넘긴 아버지까지 용서했는가?
간난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죽은 뒤에는 정말 영생이라는 게 있는가? 당장 지금 죽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을 우리는 그들의 대사와 눈빛 속에서 발견하고 곱씹을 수 있다. 그동안 내 삶에서는 좀처럼 꺼내보지 않았던 것들이기도 했다.
그래, 이런 걸 보면 우리는 극 중 인물들에 비해 참 많은 것을 가졌다. 내가 가진 것을 먼저 털어놓아볼까?
나는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지언정 누군가의 제물이 될 운명에 처해 있지 않다. 당장 먹을 것을 고민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 나는 당장 내일을 싫어할 수도 있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수도, 배가 부르면 여기서 그만, 하고 스스로 멈춰 설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내가 부모를 원망할 이유가 지금으로서는 전혀 없다. 그냥, 이기적이게도 나의 지금을 감사히 또 감사히 여기고 마는 것이다.
간난에게는 없었지만 내게는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난은 좋은 옷을 입고 왕비처럼 걸어보았지만, 자신이 살아갈 곳을 마음대로 고르지는 못했다. 반면 나는 공연장에 오기까지도, 공연이 끝난 뒤에도 어디로 향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참 당연한 일이어서 그동안 별다르게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 나는 꽤 많은 업무를 쳐낸 뒤에 밖으로 빠져나와 잠시 후 도착한다는 버스에 힘겹게 올라탔다. 그러니까 오전부터 오후까지 그날 내 하루의 박자가 정말 빨랐다.
쿵. 쿵. 쿵. 쿵. 거의 이 속도였으니 시간이 빨리 간다고 좋아하면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건들에 내가 끌려다니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날따라 라면이 먹고 싶었다. 시간이 꽤 촉박하니 식당은 어렵겠고,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 하나는 먹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공연장 근처의 편의점에는 앉아서 식사할 수 있는 테이블이 없었다. 그렇게 바삐 움직여놓고는 일찍 도착해서도 무언가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닌 것이다.
결국 공연 전에 뭘 먹을 수는 없겠구나. 체념한 뒤에는 극장에 미리 들러 티켓을 수령하고, 주변 골목을 빙 돌아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 박동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도 빨리 움직이던 걸음이 골목 곳곳에 놓인 가로등의 간격을 따라 조금씩 느려졌다.

그날따라 어두운 길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 불빛이 내 눈에 잘 들어왔다. 원래 이렇게 고즈넉했나? 하루 종일 바삐 움직이는 동안에는 미처 살펴볼 생각도 못 했던 골목이었다. 늘 그 자리에 있던 불빛이 유난히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걷는 내내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그날 나는 참 많이도 걸었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서둘렀는데, 나중에는 아무런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시간이 좋았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갈지, 어디에서 멈춰 사진을 찍을지, 조금 더 걷다가 극장으로 돌아갈지. 그 사소한 일들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심청을 본 것이다.
아, 무대 위에서는 분명 살아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야기하는데, 내게 남은 감각은 어쩐지 책을 읽었을 때와 닮아 있었다. 그것도 한 자 한 자 곱씹기 좋은 책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대사를 들으며 내 속도로 하나씩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연극이 다 끝나고 나서는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그토록 빨리 움직이던 내 삶의 속도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해방감도 있었고 안도감도 있었다. 간난의 삶을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었고, 그동안 나에게만 복잡하고 바쁘게 여겨졌던 일들에서도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만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던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이다.
나는 단순한 삶을 지향하면서도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앞으로도 무언가를 쓰고, 만들고, 배우며 새로운 일을 해내는 과정은 반복될 것이다. 다만 그 일들의 가짓수를 조금 더 명확히 하고 싶다.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지, 어디까지 해냈을 때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지, 그 순서를 알고 싶다.
그렇다고 나태하게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과 육체 안에서 내가 맡은 역할들을 재미있게 수행하고 싶다. 그런데 하나를 끝내고도 다음 일을 걱정하게 되니, 가끔은 당장 주어진 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마저 부럽게 느껴진다. 적어도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보이니까.
다만 그날만큼은 무대 위 사람들에게 집중하며 내 일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도 해야 할 것들은 그대로였지만, 당장 모든 것을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에는 간난의 새카만 발바닥이 마음에 걸렸고, 이후에는 버선을 신고 왕비처럼 걷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내가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밤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아,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