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제작된 <원더풀 라이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초기 대표작이자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역, 이른바 '림보'다. 망자들은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평생의 기억 가운데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단 하나의 순간을 골라야 한다.
<원더풀 라이프>가 건네는 질문은 간단하다. 천국에 갈 때 단 하나의 기억만을 가져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순간을 고를 것인가.
영화를 따라가며 그 답을 찾으려 했던 나는 처음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결론에 도달했다.
삶의 끝에서 떠올린 평범한 날들
영화의 초반부를 보던 중에는 내가 질문을 받는다면 어른이 된 뒤의 시간을 고르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태어난 순간처럼 인생에서 분명한 의미를 지닌 사건 말이다. 하지만 인물들의 선택은 달랐다.
한 노인은 어린 시절 오빠 곁에서 춤을 추었던 순간을 고른다. 또 다른 노인은 지진을 피해 가족과 대나무숲에서 지냈던 어린 날을 떠올린다. 심지어 수십 년 전의 하루를 무척이나 선명하고 자세하게 그려낸다. 그때 입었던 치마가 어떤 디자인이었는지, 그때 먹었던 주먹밥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는지.
길었던 생을 마무리하며 가장 소중했던 순간으로 풍족하거나 특별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머나먼 과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먼저 생을 떠난 사람들과의 시간을 그들은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왔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안온했던 그 때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되는 동시에 기억하는 존재들
림보의 직원들은 망자가 되어 이곳에 온 이후, 하나의 기억을 선택하지 못해 머물게 된 존재들이다. 모치즈키 역시 자신에게 영원히 간직할 만큼 특별한 순간이 없다고 생각한 채 다른 망자들의 선택을 도우며 이곳에서 50여 년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와타나베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선택을 어려워하는 그를 돕다가 그의 생을 함께 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의 아내 쿄코가 과거 자신의 정혼자였으며, 그녀가 생의 마지막에 선택한 기억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얼마 뒤 모치즈키는 마침내 남기고 싶은 기억을 선택했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히 쿄코와의 순간을 고르리라 생각했지만, 촬영장에 앉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카메라 뒤에 모여 있는 동료들이었다.
우리는 소중한 기억이라고 하면 으레 이미 지나가버린 어느 순간부터 되짚어보곤 한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 보다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지만 그의 선택을 보고 나니 우리가 언젠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할 장면 역시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이미 내가 살아가고 있는 소중한 한 때겠구나.
단 하나의 기억만 남은 ‘나’도 ‘나’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지금까지 망자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던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들어오듯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지만, 영화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지 않은 채 끝난다. 덕분에 그동안 타인의 기억을 들여다보던 관객은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자리에 자신을 앉혀보게 된다.
하지만 내가 그 의자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소중했던 순간을 선택하면 그 기억 단 하나만 간직한 채 영원을 살아야 한다. 반대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살아온 모든 기억을 품은 채 계속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내게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말보다, 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는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행복한 기억 하나만 남은 내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미치자 답은 분명해졌다.
나는 림보에 남고 싶다. 기쁘고 아팠던 모든 시간을 품은 채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다. 다른 이들의 소중한 생을 함께 기억해 줄 수 있는 내가 선택한 나의 천국에.
하나를 고르지 못한다는 것은
화면 속 의자에 앉아 선택을 내리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고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잃고 싶지 않은 순간이 많다는 뜻이라는 생각.
좋았던 날도 그렇지 않았던 날도 어느 하나 쉽게 놓아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지나온 삶을 꽤나 아끼고 있다는 나 자신을 향한 고백과도 같았다.
그렇게 영화의 끝에서 발견한 나의 '원더풀 라이프'는 다음과 같다. 찬란하지 않더라도 어느 하나 덜어낼 수 없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바로 지금의 삶. 언젠가 또 하나의 소중한 기억이 되어 있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이 참으로 원더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