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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세계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 입장을 다수 포함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혹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이 계신다면 존중을 보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계관


 

만약 나에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세계관의 한 지점을 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는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가 등장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세계에는 어른들의 세계 안에서 독립된 생태를 이룬 아이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에서 관찰되는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살아가는 세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렵다. 아이들은 매사 솔직하고 감정적이지만, 그만큼 용감하고 진실하다. 이들의 세계는 꼭 그들만큼 작고, 충실하다.

 

조금 덜 솔직하고 조금 더 비겁한 어른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함부로 잣대를 들이밀 수 있을까. 이들의 세상은 얼마나 어렵고 거대할까. 나름의 고민을 나름의 고통으로 견뎌내고 온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이들에 대한 영화에는, 이런 작고 귀한 고뇌가 카메라를 삼아 존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세계관의 작동 방식


 

아이들의 세계관이 가진 순수함은 가장 결정적인 지점에서 되살아나, 가장 본질적인 지점을 후벼판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이들의 시선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이들의 시선은 료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저씨, 아줌마에게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붙여야 했던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면 늘 남겨지는 것은 어른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를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까. 아이들의 불평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어른들은 어디를 보아야 할까. 감독은 이런 명제 앞에 서게 된 어른들을 카메라로 담는다. 구체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카메라가 담는 것은 이 명제가 발화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 앞에 남겨진 인간이다.

 

그 감정에 이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담아내는 것이 캐릭터를 그리고 감정을 존중하는 것인가? 감독의 접근법에는 이런 인문주의적 질문이 늘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정서의 과잉이 없다. 대신 그들의 정서가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히 다룬다. 그들의 정서가 살아있는 생물인 것 마냥, 배려와 존중을 깔고 접근한다.


관객은 그렇게 과잉없는 정서가 담긴 영상을 받는다. 그 영상은 카타르시스를 남기며 끝을 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체험된다. 이번에는 관객이 남겨질 차례다.


감정에 휩쓸려버리는 인간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 과정 속의 감정의 상호작용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순간순간의 감정을 마치 개울가 작은 연못에 갇힌 올챙이를 손바닥으로 살살 들어 올리듯 다룬다. 특별히 강조점을 찍지 않고,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바라본다. 가려내어 조감하는 그 시선에서 관객은 여러가지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적인 메시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의 상황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것이다. 잘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어느 가족>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다룬 것.


 

<어느 가족>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평생을 자기합리화하며 살아온 한 여성을 담는다. ‘노부요’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마트에 진열된 상품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훔쳐도 돼.’ 와 같은 생각을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이 작은 여성에게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곧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합리화에 동참할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오사무(남편), 하츠에(할머니), 아키(여동생), 쇼타(아들), 유리(딸)는 각자의 사정이 겹쳐서 모여살게 되었다. ‘어느 가족’ 정도로 치부되길 희망하는 그들의 작은 세계는 다양한 결핍과 속사정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합리화를 문법 삼아 돌아간다. 그렇다면, 돌아가기만 하면 다 괜찮은 거 아닐까. 막 잘나지 않아도 그럴듯한 정도의 가족이라면, 사소한 문제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가족들은 나의 합리화를, 문법을 옹호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세계는 무수히 많은 측면들로 이루어진 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수히 많은 측면의 구를 보면, 하나의 측면이 있으면 정 반대에도 같은 종류의 측면이 있다. 이 세계에서 하나의 측면을 주장하는 일은 자연히 그 정반대에 있는 측면도 끄집어내게 된다. 하나의 측면을 세우는 순간 그 정 반대의 측면도 자동으로 성립된다. 개인적 영역에 머무르는 진실이 공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진실의 바로 정 반대에 있는 진실을 포용할 수 있는 당위, 혹은 넉넉함이 필요하다.


그들의 문법은 그들의 작은 집 안에서 그들을 가족으로 정의 내렸다. 그 작은 집 안에서 그들은 분명 가족이었다. 아이들은 분명 그 세계 안에서 행복했으며, 한순간이라도 가족의 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집은 세계가 될 수 없다. 그들의 집은 허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넓은 사회로 나아가기에는, 그들의 문법의 결함이 너무 크다.


그들의 문법의 실체는 이러하다; 좋은 부모란 아이의 방식과 자유를 존중하며 같이 있어 주는 부모이다. 오사무와 노부요, 이 좀도둑 부부는 ‘같이 있어 주기’ 만을 훔쳐서, 재해석한다. 같이 있어 주면 좋은 부모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을 품을 능력이 없다. 같이 있어 주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우리들의 삶을 배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고, 합리화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래도 괜찮다. 좋은 부모는 같이 있어 주고, 우리는 같이 있으니까.


영화의 중 후반부는 노부요가 만든 세계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다. 사실은 노부요와 오사무가 쇼타와 유리를 유괴하였으며, 할머니의 보험금을 이용하기 위해 할머니를 모시는 척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사실이 드러난다. 이 붕괴가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지점은 노부요가 취조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때일 것이다.

‘아이들이 당신을 뭐라 불렀나요?’

 

 

 

노부요의 취조실 장면


 

취조실의 노부요가 마주한 것은 사실이 되지 못한 그들만의 문법을 해체하는 과정이었다.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는 그들의 언어는 곧 그들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그 해부 끝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담는다. 노부요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영화의 모든 장면을 통틀어 유일하게 정면을 바라본다. 그 고정된 앵글은 노부요의 고통을 세심하게 담아내지만 휩쓸리지 않는다.


사실이 될 수 없는 그들만의 진실을 지탱해 온 그녀의 문법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순을 키운 것은 그것이 주는 만족감에 안주해 버린 자신이었다. 자신의 나약함이 아이들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했다. 유리와 쇼타가 그녀에게 어머니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란 폭력을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쇼타와 유리의 입장을 알지 못했을까. 그녀는 눈앞을 비비듯이 눈물을 훔친다. 누군가를 품을 능력이 없는 그녀에게 쇼타와 유리의 입장이 덜컥 놓였다. 그녀의 문법에서 나와, 비로소 아이들의 입장을 헤아려본다. 부모의 역할을 체험해 본다.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느꼈을 폭력과 두려움을 상상하는 것이 괴롭기만 하다. 부박한 스스로를 마주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괴로움에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밖에 없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감정을 다루는 데에 미숙한 어린아이의 눈물이다. 

 

취조실의 그녀는 마치 잘못을 해서 엄마에게 용서를 비는 어린아이 같이 보였다.

 

 

취조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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