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효녀 심청이 아닌 소녀 심청 [공연]

심청전의 재해석, 연극 <심청>

by 전주현 에디터
2026.11.01 14:44
이 브라우저에서 최근 읽은 글입니다.
      이전에 읽던 글입니다.

      심청_공연포스터.jpg

       

       

      어릴 적 심청전을 읽으면서 심청의 효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장님인 아버지를 눈 뜨게 해주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제물이 되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왜 그토록 뭉클하게 느껴졌던 걸까? 10대 소녀 심청보다 훌쩍 나이를 먹고 돌이켜보니 심청이가 안쓰럽고 불쌍하다. 목숨값이 고작 공양미 삼백 석이라고? 얼토당토않은 미신과 경제적 어려움에 등 떠밀려 차디찬 바다로 뛰어든 소녀의 죽음을 과연 '효'라고 볼 수 있을까?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연극 <심청>은 앞선 의문에 화답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6년 우수창작 공연 재공연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2017년 이후 9년 만에 무대를 찾은 작품이다. 이강백 작 <심청>은 고전소설 <심청전>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나 고전을 재해석하여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심청전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 박간난과 선주, 그의 아들 등 새로운 인물이 극을 이끈다. 소녀 '박간난'이 제물이 되길 거부하지만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여정을 그린다. 중국과 무역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 선주는 매년 띄우는 배에 제물을 태운다. 선주는 젊을 적부터 머리가 하얗게 세 버린 칠순이 되도록 어린 여자들을 제물로 바쳐왔다. 수많은 제물 중 가장 고집이 세고 당찬 소녀를 만났으니, 그 이름은 바로 '박간난'이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살아온 소녀 간난은 노름꾼 아버지에 의해 겉보리 스무 가마 팔리게 된다. 간난은 바다에서 끝을 맞이하기보단 곡기를 끊어 죽겠다며 식사를 거부한다. 선주는 간난을 '마마'라고 부르며 극진히 모시고, 선주의 세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못마땅해한다. 당장 배를 띄우지 않으면 막대한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선주는 어떤 영문인지 제물이 준비가 안 되었으니, 출항을 사흘 연기하라고 말한다. 식사를 거부하는 간난에 잣죽을 끓여 받치고, 간난은 선주에게 점차 마음의 문을 연다.


      선주 자리를 탐내는 세 아들은 간난을 설득하여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 한다. 첫째는 제물이 되지 않겠다며 버티는 간난에 심청전을 읊어준다. 인당수에 뛰어들었지만, 용왕님의   은혜로 연꽃을 타고 떠오른 심청의 이야기가 실화라며 간난을 속이려 든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매년 재물을 바쳐왔는데, 그중 한 명이 심청이야. 심청이는 죽지 않았어."


      그러나 간난은 그깟 책에 속지 않는다며 여전히 고집을 피운다. 그러자 둘째가 나타나 말한다. 불행하고 힘들게 사느니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죽음 이후에는 영생이 있다고. 그전까지 영생이 무엇인지 몰랐던 간난은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린다. 매번 노름판에서 돈을 잃고 술을 퍼마시며 손찌검하는 아버지. 배불리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훨씬 더 많았던 지난 인생을 떠올린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평안에 이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잠깐 흔들리나 싶었지만 돌처럼 단단한 간난의 고집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출항이 계속 연기되고 뱃사람들이 노하자, 보다 못한 셋째가 나선다. 셋째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죽는 장면을 읽어준다. 그러곤 어차피 죽을 목숨 모두를 위해 희생하여 왕비로 환생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얘기한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죽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에 젖은 간난의 여린 마음을 파고들려 한다.


      그들은 지어낸 이야기를 마치 실화처럼 꾸며 이야기한다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심으며 간난을 현혹한다. 장님인 아비가 홀로 젖동냥하여 키운 심청과 달리 노름에, 손찌검을 반복한 못난 아비를 위해 죽는다면 그게 더 효녀인 거 아니냐며 간난을 구슬린다. 제4의 벽 너머에서 간난이 그들의 말장난에 마음이 움직이는 걸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간난은 태어나 처음 왕비 옷을 입고, 밥을 배불리 먹고 값비싼 종이 연꽃을 선물 받는다. 게다가 살아있는 한순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며 글자를 배워 제 이름 석 자를 쓴다. 태어나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본 적 없는 간난은 그들의 호의가 반가웠을 거다. 속내가 어떻든 간 간난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제 이름 석 자를 쓰고 죽겠다는 소원을 이뤘다는 게 기쁠 뿐이다.


      간난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심청전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나아가 생에 끝자락에 서고서야 제물을 불쌍히 여기는 선주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고찰을 끌어낸다. 육신이 병들어가고 죽음이 닥쳐올 것임을 직감한 선주는 제물 된 간난이 느낄 공포를 헤아린다. 세 아들은 그간 제물을 호통치며 인당수에 뛰어들게 했던 사람이 맞냐며 선주를 나무란다.


      "제물이 울지 않았던 게 아니라, 못 울었던 거구나."


      선주는 그제야 자신이 해오던 짓의 잔혹함을 깨닫고 사후를 두려워한다. 죽음 이후를 알 수가 없다며 발버둥 치는 선주의 모습은 살아생전 우리가 집착하던 명예와 부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닫게 한다. 선주는 출항 하루 전날 밤, 간난더러 대문을 열어놓을 테니 도망치라 말한다. 집을 지키는 수많은 사람, 높은 담벼락을 뚫을 수 없어 곡기를 끊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간난. 이제 자유의 몸이 되라는 선주의 말에 간난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어린 간난과 초연한 척하지만 두려움에 가득 찬 늙은 선주. 간난은 끝을 확실하게 알아서 덤덤한 듯하고, 선주는 끝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한없이 작게 웅크린 채 덜덜 떠는듯하다. 두 사람의 극명한 대비는 관객에게 한 가지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죽음 앞에 선 나의 모습을 두려워하는 걸까?"
       

       

      선주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승사자가 찾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그건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이었네. 내가 내 등을 떠밀고 있어. 수많은 소녀를 인당수로 떠밀었던 선주가 선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어쩌면 그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닌 그간 살아온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따라오는 꼬리 질문으로간난이 자유의지로 제물이 되기로 한 것인지, 외부의 간섭으로 인한 결과인지 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이 끝난 후 극장을 나서자 차디찬 바람이 불어왔다. 심청이 뛰어들었을 바다도 저 하늘처럼 새까맸을까? 빛 하나 없는 인당수에서 철썩이는 물살이 온몸을 휘감을 때, 심청은 어떤 꿈을 보았나. 간난처럼 가슴에 제 이름 석 자를 품었을까. 씁쓸한 여운을 곱씹으며 친구와 짤막한 감상을 나누었다.

       

      "원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착해져. 선주 본성이 착한 게 절대 아니야."

       

      친구는 선주가 간난더러 도망치라고 말한 이유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착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선주를 향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선주가 뒤늦은 깨달음을 얻고 그간의 악행을 뉘우친 걸 수도 있겠으나, 나 또한 친구처럼 그가 죽을 때가 되니 사후세계가 두려워 선해진 거라 생각했다. 연못에서 뿌리 내린 꽃이 아니라 종이로 만든 연꽃을 선물 받은 간난. 종이 연꽃에 활짝 웃던 간난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향기 없는 꽃이라도 아름다워 웃은 것처럼, 속이 텅 빈 친절과 다정함이라도 좋으니 한 순간이라도 쥐어보고 싶었을 거다.


      간난은 대문 밖을 나섰을까? 아니면 제물이 되어 바닷속에 뛰어들었을까? 간난이 내린 선택이 궁금하다면 <여행자 극장>을 찾길 바란다. 9년 만에 돌아온 연극 <심청>은 11월 9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무대를 빈틈없이 장악하는 배우의 열연과 현장감 넘치는 음향은 잊지 못할 공연 경험을 선사한다.

       

       

      이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전주현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다정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전주현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드라마]
      2. 02 [Opinion] 아빠와 딸, 도쿄에 가다! [여행]
      3. 03 [Opinion] 프로젝트 헤일메리: 멀리서 날아온 공을 기꺼이 받아준다면 [영화]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