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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거꾸로 선 세계에서 땅을 바라보다 - 게오르그 바젤리츠 [전시]

끝까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보기

by 이수진 에디터
2026.11.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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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무언가를 볼 때 그것을 만든 사람의 ‘방식’을 자주 생각한다.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 수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결국 한 사람의 것으로 알아볼 수 있는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데, 가끔은 너무 쉬운 것이 아닌지, 간단하여 모두가 따라할 수 있어 가볍게 보이기도 한다.

       

      무작정 따라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형태를 보면 어떻게 산출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무언가를 쓰고 만들수록 오히려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새롭기만 해서도 안 되고, 한번 찾은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자기다움을 유지하면서 계속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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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전시를 보면서 그 어려운 일을 한 사람의 긴 시간으로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거꾸로 놓인 인물이라는 강렬한 형식을 대표로 내세울 수 있는 그의 전시에서 숲과 영웅, 손과 발, 아내 엘케와 자신의 몸까지, 그는 익숙한 대상을 끊임없이 다시 그리고 이전의 작업마저 다시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거꾸로 그리는 화가’라는 특징이 눈에 들어왔지만, 전시를 따라갈수록 더 궁금해진 것은 그 뒤에 놓인 시간이었다. 한 가지 시선을 자신의 언어로 만들고, 그것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면서도 낡게 두지 않는다는 방법이 궁금하다.

       

       

       

      익숙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일

       

      바젤리츠는 1969년부터 인물을 거꾸로 그리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완성된 그림을 뒤집어 전시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상을 거꾸로 놓고 그렸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관람자는 얼굴을 보면서도 얼굴에 곧바로 몰입하기 어렵다. 누구인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시선이 잠시 멈춘다. 그제야 붓질과 색, 선과 물감의 흔적이 먼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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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언가를 알아보는 순간 그것을 충분히 보았다고 착각하곤 한다. 사람을 만나도 직업이나 성격 같은 몇 가지 정보로 그를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익숙한 장소는 더 이상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는 일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되기도 한다.

       

      바젤리츠의 뒤집힌 그림 앞에서는 그 익숙한 이해가 잠시 작동하지 않는다. 거꾸로 놓인 몸은 여전히 몸이지만 내가 알고 있던 몸과는 다르다. 그 불편함 때문에 오히려 조금 더 오래 보게 된다. 어쩌면 새롭게 본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낯설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하는 시선


       

      전시에서 오래 남은 문장이 있다.

       


      “우리가 다른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는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이 문장을 읽은 뒤부터 바젤리츠의 그림에서 유독 많이 등장하는 손과 발이 다르게 보였다. 우리는 인간을 이야기할 때 얼굴을 먼저 본다. 생각은 머리에, 감정은 가슴에 있다고 말한다. 반면 손과 발은 그 생각을 수행하는 주변적인 기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것은 오히려 손과 발이다. 손으로 만지고, 발로 딛고, 걷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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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젤리츠의 화면에서는 이 위계가 뒤집힌다. 발과 신발은 유난히 커지고, 몸은 잘리고 분리되며, 때로는 추락한다. 그에게 땅은 단순히 우리가 서 있는 바닥이 아니라 몸과 물질, 상처와 죽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독수리조차 그의 그림에서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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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위를 본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지금보다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바젤리츠가 반복해서 아래를 향하게 만드는 일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곳은 목표가 있는 저 위가 아니라 오늘 두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기 때문이다. 삶을 이루는 것은 멀리 있는 이상보다 결국 매일 만지고 걷고 견뎌내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같은 사람을 평생 다시 그린다는 것

       

      그의 작품 속에서 또 하나 오래 남은 존재는 아내 엘케였다. 1962년 결혼한 이후 엘케는 60년 넘게 그의 화면에 반복해서 등장했다. 젊은 날의 초상에서부터 거꾸로 뒤집힌 인물, 거칠고 강렬한 형상, 그리고 말년의 가느다란 선으로 남은 모습까지. 같은 사람인데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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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말년의 작품에서 바젤리츠 자신과 엘케가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이 금빛 화면 위에 희미한 선으로 남아 있었다. 금은 영원과 신성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위의 두 사람은 오히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연약하다. 젊은 시절의 두껍고 공격적인 물감 대신 노년의 몸처럼 가늘고 불안정한 선이 남는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사랑한다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같은 사람을 계속 바라보지만 사실 우리는 매번 다른 사람을 만난다. 상대가 변하고 나도 변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오래된다는 것은 처음의 모습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변해가는 상대를 계속 새롭게 알아보는 일에 더 가까울 것이다. 바젤리츠가 같은 사람을 수십 년 동안 다시 그렸다는 사실이 그래서 단순한 반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을 복제하지 않는 법

       

      바젤리츠는 영웅, 발, 숲처럼 젊은 시절 그렸던 소재들을 노년에 다시 불러왔다. 자신의 과거 작품을 다시 해석하는 ‘리믹스’ 작업도 이어갔다. 예술가라면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할 것 같지만, 그의 작업은 오히려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창조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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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점점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낀다.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이미지와 문장, 음악과 방식들 사이에서 ‘나만의 것’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막막하다. 잭슨 폴록이나 에곤 쉴레 같은 다른 예술가들의 흔적이 떠오르는 작품도 있었지만, 전시를 끝까지 보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분명히 바젤리츠의 세계였다.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독창성이라기보다, 받은 영향을 자기 안에서 충분히 오래 소화해 결국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내는 것이 독창성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어려운 것은 그다음이다. 어렵게 찾아낸 자기 방식을 공식처럼 반복하지 않는 것. 바젤리츠는 거꾸로 된 형상을 수십 년간 이어갔지만 색을 바꾸고, 재료를 바꾸고, 과거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조각으로 옮겼다.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도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결국 자신만의 스타일이란 한 번 찾아내면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정답이 아니라, 평생 수정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하나의 질문에 가까워 보였다.

       

       

       

      몸이 마지막까지 남긴 흔적

       

      전시의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을 바라보는 마음도 달라졌다. 바젤리츠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고 거동이 불편해졌다. 휠체어를 타고 작업하면서 화면에 바퀴 자국이 남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한국 전시를 준비하던 4월, 작가는 숨을 거두었고 당시 생전 인터뷰 영상이 전시회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끝까지 붓을 내려놓지 않음을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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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야기를 알고 작품을 보니 바퀴 자국은 더 이상 우연한 얼룩처럼 보이지 않았다. 젊은 바젤리츠가 물감과 붓질을 통해 자신의 몸을 화면에 남겼다면, 노년의 바젤리츠에게는 움직이기 어려워진 몸과 휠체어마저 그림을 만드는 도구가 된 셈이다. 작품에서 계속 다루어온 몸의 취약성이 어느 순간 더 이상 그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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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의 금빛 작품들도 그래서 오래 남았다. 금빛은 영원성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위에 놓인 몸은 오히려 희미하고, 늙고, 곧 사라질 것 같다. 영원한 배경 위에 유한한 몸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예술이 죽음을 이겨낸다고 말하기보다는,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남기려는 인간의 태도에 더 가까워 보였다. 탄력있는 깨끗한 금이 아니라 날카롭고 위태로워 보이는 까칠한 금이었다.

       

      전시장을 나오며 처음 보았던 거꾸로 된 인물들을 다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이 바젤리츠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60여 년을 따라가고 나니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한 번 만들어낸 시선을 평생의 시간 속에서 계속 갱신해왔다는 사실이었다. 젊은 시절의 반항도,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의 늙어가는 몸도 결국 같은 화폭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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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것은 남들과 전혀 다른 무언가를 단번에 발견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질문으로 수십 번 되돌아가고, 그때마다 조금 다른 답을 내놓으면서 결국 그것을 자기 삶만의 방식으로 만드는 일. 바젤리츠는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가 하늘이 아니라 땅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자신만의 세계 역시 아주 먼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발을 딛고,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바라본 사람에게 조금씩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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