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슬픈 일이다. 어제까지 당연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익숙했던 사람과 공간마저 낯설게 느껴지는 일. 기억이 흩어지는 당사자에게도,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머릿속을 유쾌하고도 따뜻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뮤지컬이 있다. 바로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다.
이 작품은 치매라는 무거운 소재를 슬픔만으로 채우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할머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이상한 나라를 함께 여행하며 기억과 상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창작 뮤지컬로, 초연의 호평에 이어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 극본상 및 남자 신인상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치매 환자의 세계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저 조금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1. 일흔 살 생일, 일곱 살이 되어버린 할머니
이야기는 춘자씨의 일흔 번째 생일에서 시작한다. 가족들과 식당에 모여 케이크에 촛불을 꽂고 소원을 빌려는 순간, 춘자씨는 무슨 소원을 빌려고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눈앞의 모든 것이 느려지더니, 갑자기 물고기 한 마리가 나타난다.
그렇게 현실은 춘자씨만의 이상한 나라로 변하기 시작한다.
정신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그 안에 있던 물고기들이 빠져나오고, 춘자씨는 일흔 살에서 0이 하나 빠진 일곱 살 아이가 된다. 이때 등장하는 물고기는 단순한 상상의 존재가 아니다. 춘자씨의 내면과 기억, 어쩌면 영혼의 조각처럼 느껴진다.
빠져나온 물고기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이와 노인의 물고기 수가 같다고 노래한다. 아이는 작고 가벼워 귀엽지만, 노인은 무겁고 안쓰럽게 여겨진다. 물고기의 수는 같은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주는 감정은 다르다. 어린아이가 엉뚱한 말을 하면 귀엽다고 웃으면서, 노인이 같은 말을 하면 걱정하거나 답답해한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마음까지 달라진 것일까?
어린아이가 된 춘자씨는 물고기와 함께 자신의 내면을 여행한다. 소변 실수를 하기도 하고,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비오는 날 움직이는 와이퍼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었고 세월이 흘러 이렇게 되었다고 이야기도 듣는다. 한때는 시간을 가리키던 존재들이 이제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모습에서 춘자씨의 삶이 겹쳐 보였다. 한때는 가족을 돌보고 집안을 세우며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왔을 사람. 그러나 나이가 들고 기억이 흐려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서게 된 지금의 사람.
"늙는 게 슬프다." 춘자씨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늙으면 울고 싶은데 눈물은 나지 않고,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흐른다. 밥은 먹는데 목에 걸리고, 몸과 마음은 예전 같지 않다. 늙는다는 건 슬프다고,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치매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뿐 아니라, 예전 같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춘자씨의 고백은 노년의 삶이 지닌 막막함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상한 나라의 유쾌한 상상력 뒤에 이런 슬픔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작품은 웃음만큼이나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2. 춘자씨의 이상한 나라, 가족의 기억을 되찾다
춘자씨의 이상한 나라 여행은 현실에서도 이어진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주변의 물건들과 대화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던 중 춘자씨는 '은빛 가루 나라'에 가고 싶어 한다. 그곳은 그리운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천국같은 곳이다. 춘자씨에게는 남편과 엄마, 누렁이, 그리고 먼저 떠나보낸 딸이 기다리는 세계다.
그곳에 도착한 춘자씨는 그리운 이들과 재회한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어린아이처럼 울기도 한다.
"나 열심히 살았지, 엄마?"
이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졌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을 견뎌냈을까.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 속에서 정작 자신을 위로할 기회는 얼마나 있었을까. 이제는 기억마저 놓쳐가는 춘자씨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결국 엄마의 품이었다.
그리운 가족들은 춘자씨에게 자신들이 늘 곁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따뜻한 햇살, 시원한 바람, 맛있는 냄새가 우리라고 생각해.'
그리운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곁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이 작품은 환상적인 세계를 빌려 그 따뜻하고 삶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전한다.
한편 춘자씨를 찾아다니는 자식들 역시 엄마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본다. 떡볶이를 만들어 자식들을 키워낸 엄마,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아이들을 구하려다 막내딸을 잃게 된 엄마. 가족들이 하나씩 떠올리는 기억 속에는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엄마의 삶이 담겨 있다.
자식들에게 엄마는 언제나 엄마였지만, 그 이전에 한 사람의 삶을 살아온 여성이었다. 자식들이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은 단순히 실종된 가족을 되찾는 과정이 아니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엄마의 삶을 다시 이해하고, 그동안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마음을 마주하는 과정이다.
3. "내가 우산이 되게 해주세요", 춘자씨가 빌었던 소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보호받고 있던 춘자씨. 생일날 끝내 떠올리지 못했던 소원을 마침내 기억해낸다.
춘자씨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절을 올리며 소원을 빈다.
자식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아들들이 죄책감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게 해달라고 빈다. 그리고 자신이 우산이 되게 해달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비와 힘든 일을 막아주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든든한 집이 되어주고 싶다. 특히 '우산'이라는 표현이 좋았다. 그 비를 맞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젖도록 곁에서 막아주는 존재. 부모의 사랑을 이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눈물이 났다.
자신의 기억조차 온전히 붙잡기 어려운 순간에도 춘자씨의 소원은 온통 자식들을 향하고 있었다.
춘자씨에게 자식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지켜주고 싶은 존재였다. 자신의 행복을 먼저 빌기보다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에서 오랜 세월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삶이 드러난다.
부모의 사랑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종종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를 위해 우산이 되어준 사람에게, 나는 얼마나 따뜻한 우산이 되어주었을까. 춘자씨가 빈 소원은 무대 위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 각자의 삶으로 질문을 건넨다.
4. 웃음과 눈물 사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뮤지컬의 형식을 빌린 연극처럼 느껴졌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음악과 환상적인 장면들이 그 감정을 더욱 섬세하게 전달한다.
특히 어린아이가 된 춘자씨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엉뚱하고 발랄한 넘버들은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환기한다. 치매라는 소재를 다룬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으로만 채우지 않는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있고, 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두 감정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것이 작품의 매력이다.
무엇보다 극 중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건네는 마음이 좋았다. 춘자씨를 걱정하는 가족들, 그를 돕는 주변 사람들, 이상한 나라에서 그를 맞이하는 그리운 존재들까지. 서로의 사정을 모두 알지는 못해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음을 건넨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의 의미는 치매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치매 환자의 행동을 가족이나 주변인의 시선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당사자에게는 어떤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지 상상하게 한다. 춘자씨가 경험하는 세계와 가족들이 바라보는 현실은 서로 다르다. 그렇다고 한쪽의 세계를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치매는 환자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며, 우리 사회가 노년과 돌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돌아보게 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보여주는 상상력은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선다. 환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기보다, 그 안에 어떤 감정과 경험이 있는지 헤아려 보도록 이끈다.
예술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바꿀 수 있다면,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치매를 낯설고 두려운 문제로만 바라보던 관객도 춘자씨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 있는 한 사람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따뜻한 유머와 사랑스러운 상상력, 그리고 묵직한 감동을 함께 담아낸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치매라는 사회적 문제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돌아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기억은 흐려져도 사랑은 남는다. 춘자씨의 이상한 나라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잊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그들이 남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