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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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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비너스 조각상을 닮은 넉넉한 여인들. 사람, 동물, 탁자 위 과일 모두 둥글게 그리는 '볼륨의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가 11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페르난도 보테로전>은 그가 2023년 타계한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국내 대규모 공식 전시다. 그가 남긴 세계를 만나러, 전시장으로 향했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풍만한 인물들이 나를 반겼다.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 기대하던 인물 누드의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 낯설고 불편했는데,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표현은 하나도 없이 둥글둥글하고 폭신해보이는 볼륨감, 풍만하다해서 접히거나 쳐지지 않은 동그란 형태와 조화로운 색감, 거리에 여유롭고, 담담한 인물들의 표정까지.


미술사에 센세이션을 일으길만큼의 파격적인 화풍을 고수한 보테로, 보통 파격적인 것들은 자극적이거나 불편하기 마련인데, 보테로의 그림은 오히려 편안했다. 여기서 거장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Section 1. 변주: 모든 것은 기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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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섹션은 미술사 거장들의 명작을 보테로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모나리자,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시녀들. 기존의 명화들을 모두 자신의 색을 입혀서 원작의 엄숙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둥글고 유쾌한 형태만 남아 있었다. 과거의 유산을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낸 그의 발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흔히 보테로를 인물을 뚱뚱하게 그리는 작가로 말하곤 하는데, 그는 사실 예술의 기반인 르네상스부터 제대로 공부한 철저한 학자였다.

 

"르네상스는 그림의 부피를 알아낸 최초의 예술이다."

 

르네상스는 이전까지 평면으로 표현했던 그림 사조를 벗어나 처음으로 양감을 불어넣었고, 이후 인상주의를 포함한 현대예술까지 모든 예술의 근본이 됐다. 그리고 이렇게 탄탄한 기초를 체득하고 있었기에 자신만의 조형 언어인 '보테리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발견한 순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만돌린이라는 악기를 그리던 중, 가운데 울림구멍을 아주 작게 찍었더니 악기 전체가 폭발할 듯한 부피감을 뿜어냈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그는 보이는 것보다 더 작게 그리는 데서 나오는 부피감이 가지는 폭발적인 영향력을 깨달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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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 양감은 관능이라는 특정한 개념과 맞닿아 있다. 나는 회화가 관대하고, 감각적이고, 육감적이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 페르난도 보테로

 

 

 

Section 2. 라틴 아메리카, 고향을 사랑한 사람


 

두 번째 섹션은 그의 뿌리이자 고향인 콜롬비아 메데인에 대한 이야기다. 보테로 작품 주제의 90%는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나온다. 그가 평생 그린 것들은 결국 어린 시절 고향의 그 골목들, 사람들,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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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후 자신의 고향에 한 일이 인상깊다. 마약 카르텔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메데인을 바꾸고 싶었던 그는, 자기 방에 걸려 있던 작품까지 몽땅 끌어모아 콜롬비아에 미술관 두 곳을 지어 기증했다. 그리고 유언으로 단 하나의 조건만 걸었다. 누구나 무료로 관람하게 할 것.

 

어두움의 도시를 예술의 도시로 만드는데 큰 힘을 썼던 보테로는 작품뿐 아니라 삶 자체가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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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시장 내 수많은 인물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밟히는 그림 하나가 있었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몸과 얼굴까지 정상적인 비율로 단정하고 예쁘게 그려진 아이. 그의 아들 페드리토다. 붓을 쥔 아이의 붉은 볼과 맑은 표정은 포근했고, 그 주변을 감싼 따뜻한 색감은 아이를 한 층 더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보테로가 가장 아끼던 아이였기에 수많은 인물 중 그를 가장 이쁘게 그린 것이 아닐까.

 

가장 안타까웠던 사연은 페드리토는 겨우 4살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이쁘게 바라봤던 아이를 잃었을 아버지의 상실감이 느껴져 한참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Section 3. 종교: 둥근 형태로 포장한 날카로운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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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섹션에 들어서자 다시 피식, 웃음이 났다. 권위로 가득해야 할 추기경은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풍선처럼 앉아 있었고,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역시 보테로 방식의 통통한 몸으로 재탄생했다. 성스러움의 상징인 예수마저 풍만한 형태와 멍한 얼굴로 표현한 모습에서는, 종교적 권위를 유쾌하게 비트는 보테로의 귀여운 반항심과 용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가톨릭교회, 폭력 집단, 교도소의 참상까지. 보테로는 무겁고 어두운 주제들을 특유의 둥근 조형 안에 담아낸다.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했던 콜롬비아에서 성장한 그가 이런 소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은 더욱 대담하게 다가왔다.


흥미로운 건 그의 그림이 날카로운 비판을 품고 있으면서도 공격적이지 않고 유머스럽고,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는 권위를 무너뜨리기보다, 우스꽝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천천히 내려다보게 만든다. 그래서 관객은 불편함 대신 웃음을 먼저 마주하게 되고, 그 웃음 끝에서야 권력과 폭력, 엄숙함의 허상을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사람들을 웃게 만들면서도 끝내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보테로 작품의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르겠다.

 

 

 

Section 4–6. 정물, 투우,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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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로의 풍만함은 인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사물과 동물, 심지어 꽃과 과일까지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둥글고 풍성하게 그려냈다. 정물화 섹션은 말 그대로 눈이 즐거운 공간이었다. 보테로 특유의 조화로운 색감과 부드러운 형태 덕분에 과일은 더욱 탐스럽게, 꽃은 한층 생기 있게 느껴졌다. 그의 그림 앞에서는 익숙한 사물들마저 낯설 만큼 풍요롭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투우와 서커스 연작 역시 인상 깊었다. 보테로는 어린 시절 잠시 투우사 양성 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투우사가 아닌 화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짧은 경험은 오히려 평생 작품 세계의 중요한 소재로 남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감각, 스쳐 지나간 경험들조차 예술 안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보테로는 자신의 삶을 통해 버려지는 경험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삶의 궤적은 결국 예술의 자양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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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말미에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인터뷰 영상이 나온다. 주변인은 그를 두고 “작업실에 들어가면 10살은 젊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그를 젊어보이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매일 오후 1시부터 밤 11시까지 그림을 그렸고, 작업의 30%를 스케치에 할애했다고 한다. 심지어 “완벽한 완성은 불가능하다”며 끝없이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그의 작업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치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남긴 그림들은 한없이 유쾌하고 평화롭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이 더욱 오래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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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삶에 대한 끊임없는 찬미이자,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오아시스여야 한다.”

 

- 페르난도 보테로 

 

 

이 문장은 내가 평소 품고 있던 예술에 대한 믿음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보테로는 그 철학을 말로만 설명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캔버스 위에서 끝내 실현해낸 사람이었다.

 

전시장을 나와 다시 차갑고 뾰족한 빌딩 숲 사이를 걸어가는데,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조금 둥글고 느긋해진 기분이었다. 일상이 각박하고 날선 사회에 지쳤다면, <페르난도 보테로전>을 통해 잠시 보테로가 만들어둔 이 넉넉하고 평화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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