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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이건 개념미술이 (아니)다 [전시]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by 김혜원 에디터
2026.07.3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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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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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의자를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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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의자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

 

미술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탈피를 거듭하며 다양한 기조를 거쳐왔지만, 그중에서도 현대미술은 유독 악명이 높다. 이미 하나의 이론으로 완성되어 지나간 과거의 미술과 달리 현대미술은 우리와 함께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예측 불가능성도 한몫하겠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아무래도 작품을 보는 사람마다 이해하는 바가 달라지는 ‘해석 가능성’ 부분일 것이다.

 

사람들은 직관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골치 아픈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답을 도출해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그린, 혹은 사과를 설치한 작품을 두고 곁에 ‘사과’라는 이름의 설명을 붙이면 그것은 아무 이견도 나올 수 없는 ‘완벽한’ 예술작품이 된다. 바나나, 나비, 피아노 등 대상이 무엇으로 바뀌어도 통용되는 만능 이론이다. 편리하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시각적으로 음미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다. 미술관을 나와 근처 마트에 들어가면 그곳엔 하나의 귀한 작품으로 걸려 있던 사과와 똑같은 사과가 산처럼 쌓여 있다. 심지어 이 사과들은 약간의 돈을 주면 내 것이 되게끔 소유도 할 수 있다. 이 사과를 장식품으로 쓸지, 깎아 먹을지, 길에 내다 버릴지는 온전히 나의 마음대로다. 아니면 사진을 찍어볼까? 찰칵, 소리 한 번에 화가가 정성껏 그려내고 내가 관람했던 사과 그림보다 더 사실적이고 정확한 사과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몇백 장씩 내 손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대체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미술관에 걸려 있던 그 사과는 이 사과들과 무엇이 달랐던 것이란 말인가?

 

결국 초점은 ‘사람’으로 옮겨간다. 개념미술은 이곳에서 나온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억 개의 사과 알맹이 중 작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연출하기 위해 의도를 불어넣은 단 하나의 사과.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람객의 마음에 각기 다른 상념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서의 사과. 단순히 보고 끝나는 시각적인 외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와 사고의 대상으로의 개념적 전환.

 

그것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전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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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중시하는 개념미술은 본래 1960년대 중반, 서구 미술계에 등장해 당시 시각 중심으로 돌아가던 모더니즘 미술에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던 사조다. 그렇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다루며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던 말과 언어, 행위가 개념미술에서는 반대급부로 떠올랐다.

 

한국 미술계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들여 1970~90년대를 기점으로 미술의 본질을 묻고 세상을 새롭게 사유해보고자 하는 개념주의가 전개되었다. 이번 전시는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던 개념미술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개념미술은 그들과 무엇이 같았고 또 무엇이 달랐는지, 28명의 작가와 140여 점의 작품들을 통해 조명한다.

 


 

1. 움직이고, 해체하고, 생각하라: 언어·논리·행위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는 총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중 첫 번째는 미술을 감각의 재현이 아닌 사유의 구조로 전환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모여 있는 ‘언어·논리·행위’다. 이번 글에서는 각 장당 하나씩의 작품들을 같이 살펴보며 한국 개념미술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훑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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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전시다. 그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전시장을 처음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이 사진 작품부터 그야말로 개념미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 간단하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1초면 끝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약간의 관심이라도 기울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물음표의 구덩이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이 극명한 사고의 차이가 개념미술의 특징이다. 보는 만큼 보인다.

 

이건용 작가가 1975년에 발표한 <장소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종이에 프린트된 사진 네 개가 붙어 있는 작품으로, 한 사람이 등장해 원을 그린 뒤 그 안을 “저기”라고 외치며 가리키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같은 곳을 “여기”라고 하며 가리킨 뒤, 원을 빠져나와 또 그곳을 등 뒤로 가리키며 “거기”라고 외친다.

 

작가가 해당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점은 ‘장소’의 개념, 그리고 장소와 신체 사이의 관계다. 이는 전시 후반에 나오는 지도에 관한 담론과도 어느 정도 연결된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향을 가리키고 장소를 명명한다. 그러나 그 당연해 보이는 개념에는 사실 철학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 작품 속 남자가 원을 그리기 전까지 그곳에는 장소랄 것이 없었다. 그가 처음 등장했던 전시장이 ‘전시장’이라는 공간으로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세분화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작가가 원을 그리는 순간 그곳의 장소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신체를 통해 가리키고 언어를 통해 명명하는 순간 정식으로 성립한다. 더욱이 원은 처음 그려진 곳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데도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행위자의 위치에 따라 ‘저기’가 되었다가 ‘여기’가 되고, 또 ‘거기’로 바뀐다.

 

‘저기’일 때의 장소와 ‘여기’일 때의 장소, ‘거기’일 때의 장소는 위치가 변하지 않았으니 모두 같은 장소일까? 혹은 이름이 달라졌으니 다른 장소가 된 것일까? 물리적인 존재와 관계적인 언어 중 어느 것을 더 우선시해야 할까? 바로 그 의문이 작가가 <장소의 논리>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이용해 언어의 사용을 탐구하고자 했던 이유다.

 

이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사회적인 인간관계와도 다르지 않다. 한 여자가 집에 있을 때는 누군가의 딸이지만, 친구를 만날 때면 누군가의 절친이 되고, 직장에서는 누군가의 상사가 되고, 아이를 낳으면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 마치 바닥에 그려진 원처럼, 여자의 본질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를 부르는 명칭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것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달라지는 것은 그녀가 머무르는 장소일까, 혹은 그녀일까?

 

 

 

2. 나를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사물과 언어 


 

개념미술이 작가의 아이디어와 언어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미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개념미술이 시각성과 물질성을 모두 제거한 채 순수한 언어 체계로 환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언어적 사유’와 ‘물질적 조건’을 교차시키며 전개된 편에 가깝다.

 

안규철 작가의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은 그런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에 빠지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내 편이라 믿고 있던 언어를 잃어버리고 만다. 세상 모든 것을 언어로 명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안정성과 자명함에 질문을 던지게끔 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장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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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럽다. 이것은 의자인가, 화분인가. 양측의 문은 또 어떻고? 손잡이가 없어 드나들 수 없는 문은 그래도 문으로 만들어졌으니 문이라 불러야 하는가?

 

1990년대 초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안규철 작가는 어느 관객에게나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미술을 하고자 했다. 1991년에 제작된 이 작품에는 긴 다리 하나가 화분에 심겨 있는 의자와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손잡이가 무려 다섯 개나 달린 문에는 ‘Kunst(예술)’라고 적혀 있고, 손잡이가 하나도 없는 문에는 ‘Leben(인생)’이라고 적혀 있다.

 

언뜻 보면 당황스러운 이 설치작품의 이해에 대한 힌트는 작가가 설정한 제목에 있다.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이 작품에 속한 존재들은 모두 ‘좌절된’ 존재들이다.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문, 나무가 없는 화분, 한때 나무였답시고 화분에 발 하나를 걸치고 있기는 하나 이젠 의자가 되었는데도 앉을 수 없는 의자.

 

예술의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나 달려있어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긴 시간이 필요하고 해결해야 할 단계도 많지만, 인생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 들어갈 수조차 없다. 즉, 쉽게 되돌아갈 수 없다. 눈앞에 남은 것은 고통스러운 예술의 길뿐이다. 더욱이 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자라나긴 했지만 기이하고 불균형적인 형태로 솟아난 의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무명 작가 시절 작가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렇게 암울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손잡이가 많은 문은 여닫을 때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분명히 통로로 난 ‘문’이고, 정성을 좀 들여 열기만 하면 반드시 건너편을 보여줄 테니까. 의자 역시, 다른 의자들보다 높이 솟아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으니까. 의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꼭 앉는 것만을 소명으로 삼을 필요는 없을 테니.

 

작가의 의도와 달리 마음대로 작품을 해석하면 틀린 것일까? 흠. 아마 괜찮을 것이다. 이 전시는 개념미술이 (아니)니까.

 

 

 

3. 대한민국을 찾아보세요: 지도와 측정



지도는 언어와 같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로 우리 곁에 머문다. 우리는 큰 의식 없이 그것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 그 속엔 생각지도 못한 의도와 의미가 숨어 있다.

 

지도, 계량, 시계, 측정 등은 객관적이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1 더하기 1은 2이듯이, 시계와 지도 역시 변하지 않는 표준화된 언어다. 어떤 지도를 펼쳐도 모두가 같은 곳을 가리켜 대한민국을 짚어내고, 현재 시각이 몇 시인지 말하는 데에 주관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3시는 3시일 뿐이니까. 그러나 간과되기 쉬운 점은, 힘의 서열이나 합의는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개념미술이 지도와 측정, 시계를 다루는 이유다.

 


[크기변환][포맷변환]곽덕준, 〈4개의 시계〉, 197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6분 2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jpg

 

 

곽덕준 작가의 <4개의 시계>는 이름 그대로 4개의 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화면 속 영상으로도, 그 옆의 나무 프린트로도 전시되어 있다. 화면은 처음 ‘WHAT TIME’이라는 글자를 보여준 후 한동안 4개의 시계 속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만 보여준다. 그것이 전부다. 여느 개념미술과 같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간단하기 그지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의미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곽덕준 작가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 2세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와 두 문화 사이의 경계에서 작품 활동을 해왔다. 두 곳에 모두 속해있다는 건 장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후 일본 사회에서 살아간 그로서는 오히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방성으로 작용했다. <4개의 시계>는 동일한 기능을 가진 시계들이 나란히 늘어서, 같은 장소에 있으니 당연히 같은 시간을 가리키리라 생각되는 예상을 깨고 각기 다른 시간으로 흐르는 의외성을 보여준다.

 

시간에 대한 신뢰를 깨면서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던 것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체계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또 그를 통해 근대적 측정 체계의 권위와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개념적 실천 작품이다.

 

 

 

4. 어디를 보고 있나요?: 기호의 조정자들


 

이번 전시 내내 우리는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잊곤 하는 또 한 종류의 언어가 있다. 바로 기호다. 도형, 화살표, 포스터 문구, 통계 숫자 등 단순히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해서 그들을 언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너무나 섣부른 판단이다. 오히려 그들은 가끔 글자보다도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더 많은 얘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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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성능경 작가의 <현장 1>로, <현장> 연작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신문 보도사진에 삽입되었던 편집 기호를 재촬영하고, 그 위에 작가가 새로운 기호를 덧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첫눈에 바로 흥미를 끌었던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림을 보면 그 안에 다소 연하게 표시된 동그라미, 화살표, 가위표 등의 기호들이 ‘여기를 보세요’하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손길을 따라 해당 위치를 바라보면, 갑자기 나타난 더 밝고, 더 힘차고, 더 거침없이 그려진 다른 기호가 강하게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어디를 봐야 하는 걸까?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신문의 편집 기호가 재배치되면서 그 이면에 존재하던 권위가 흩어지고 하나의 진실로만 보이던 것이 ‘기호의 조정자’에 의해 흩어지고 펼쳐졌다는 것이다. 독자의 시선을 통제하고 이미지의 해석을 규정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꼭 작가가 그려 넣은 새 기호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남이 가리키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데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주변을 새롭게 사유해보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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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마지막 단계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김용익 작가의 <가까이... 더 가까이...> 작품의 이름표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영락없이 그 옆에 같이 있던 환기구에 대한 설명인 줄 알았다. 더 가까이 오라고 관람객을 유혹하는 낮은 곳에 설치된 환기구라니 이건 어떤 의도를 담은 개념미술일까, 시키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자세를 낮추는 사람들의 행위를 노린 무언가일까 열심히 고민하는데 문득 이름표 속 ‘150x218cm 캔버스에 혼합재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뒤를 돌아보니 진짜 작품은 등 뒤에 버젓이, 그리고 멀쩡히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지는 않았으니 부끄러워할 필요까지는 없는 거겠지? 머쓱히 물러나는데 발견한 더 재미있는 점은 그곳을 지나가던 관람객들 중 몇은 꼭 그 이름표를 읽은 뒤 나처럼 옆의 환기구를 열심히 들여다본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환기구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전시장을 벗어나기 전에 사실 그건 설치작품이 아니라는 걸 깨닫긴 했을까? 아니, 굳이 깨달을 필요도 없다. 어쩌면 이 환기구야말로 개념미술 전시에 꼭 들어맞는 존재일지 모르지.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개념미술의 탄생을 지켜봤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0월 1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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