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예술이 된 비누조각 - 코리아나미술관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

글 입력 2023.03.2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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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파격적인, 충격을 주는, 평범하지 않은'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작품의 재료부터 표현방식, 담고 있는 메시지까지. 미술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앞서 나가며,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마치 마법처럼 말이다.


최근, 개관 20주년을 맞은 스페이스 씨에서 열리고 있는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은 미술의 세계가 종잡을 수 없는 마법 같다고 느낀 전시였다. 현대미술가 신미경이 단독으로 참여한 전시에서는 그를 '비누 조각가'로 소개한다.

 

흔히 사용하는 미술 재료도 아닌 일상 공간, 특히 화장실에서 매일 사용하는 비누로 조각 작업을 해온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3>에 선정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도 국내외의 미술관에서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과 친숙히 소통해왔다.


쉽게 마모되고, 손길이 닿으면 시간에 따라 녹아 사라지는 '비누'는 신미경 작가가 30년 가까이 사용해온 특별한 재료이자 그의 예술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탁월한 매체적 특성을 보인다. 비누를 통해 작가가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조각상을 번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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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나미술관

 

 

비누 조각가의 탄생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미경 작가는 유학 간 런던의 브리티시 뮤지엄에 처음 방문해 그리스 고전 조각상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고전의 위대한 조각상들이 어디서, 어떻게 뮤지엄으로 들어와 놓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뮤지엄에 있는 유물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물음을 품었고, 그 물음을 서양의 고전 조각상을 번역한 <번역 시리즈>로 확장해갔다. 이때부터 비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신미경 작가는 전시 인터뷰 영상에서 물질을 통해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재, 또는 인간의 흔적들을 재해석하고자 고전의 조각상을 번역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번역 작업은 지난날의 유물을 현대적 의미의 미술관에 새로운 방식으로 가져다 놓아 뮤지올로지 (museology), 즉 미술관과 박물관에 관한 연구를 총체적으로 수행하고 오늘날의 시점으로 다시금 유물의 가치를 해석하게끔 돕는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가의 행위는 번역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시간의 연결성을 담보한다. 보편적인 언어 간의 번역 이외에도, 시간의 흐름에 자리한 하나의 오브제를 번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작업이기에 '번역'의 신세계를 발견한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과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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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인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에서 파악할 수 있듯,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된 키워드는 바로 '시간', 그리고 '물질'이다. 작품에 시간과 물질이 공존하기에, 그의 작업에서 두 가지 키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주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재료로 택한 조각은 시각예술 중에서도 두드러진 물질성이 돋보이며, 깎아내고 다듬는 과정을 셀 수 없이 반복한 결과로 나타난다. 그렇게 나타난 물질은 고전의 조각상, 과거의 유물 또는 작가의 노동과 고민이 압축된 시간성을 고루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시간성을 포함하는 작가의 작품에 맞게, 전시장 역시 유럽의 박물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로 조성되었다. <번역 시리즈>의 초창기 작업인 두 점의 입상 조각은 전시실 중앙에 놓여있어 고전적인 분위기를 한층 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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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 1998

©코리아나미술관

 

 

특히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은 1998년 작으로, 현시점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치 하나의 고전 작품처럼 유물화 된 모습이다.

 

겉면은 비누로 제작했다는 사실 또한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거의 유려함과 수많은 시간을 견뎌온 현재성을 동시에 보인다.

 

 


#가까이서 볼수록 되살아나는 비누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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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코리아나미술관 

 

 

비누 조각의 물질성은 무엇보다도 회화처럼 보이는 조각 작품인 <라지 페인팅 시리즈>(2023)에서 잘 드러난다. 본 시리즈는 작가가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페인팅 시리즈>의 확장판이다.

 

150호 정도 되는 캔버스 화면은 굳힌 0.1톤 이상의 비누 조각을 담기 위해 대형 철제 틀로 제작되었고, 200kg이 넘는 무게로 인해 여러 명의 인원이 들어야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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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 페인팅 시리즈> 작업 모습

©코리아나미술관

 

 

멀리서 보기에 언뜻 추상회화를 닮아 있는 비누 조각은 가까이서 볼수록 비누의 질감과 향기, 두께감이 되살아난다. 표면은 매끈하면서도 다양한 색감이 뒤섞여 입체감이 돋보인다. 비누를 대형 틀 안에 부어 토치 불로 색을 정교히 조정하고, 표면을 다듬어 굳힌 과정을 여러 번 거친 결과다.


대형 비누 조각이 전시된 전시장 내부에서는 다른 섹션보다 짙은 비누 향이 느껴졌고, 향기가 작품 일부로 작용했을 만큼 감상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주었다. 멀리, 그리고 가까이 시점을 옮겨가며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화장실 프로젝트와 풍화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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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프로젝트> 2022~2023

©코리아나미술관

 

 

<번역 시리즈>, <페인팅 시리즈>뿐만 아니라 신미경 작가의 대표적인 두 가지 프로젝트도 전시에서 선보이고 있다. 바로 <화장실 프로젝트>와 <풍화 프로젝트>다.


먼저 <화장실 프로젝트>는 2004년부터 이어온 획기적인 작업으로 이번 전시에는 신작을 공개함과 동시에, 작품명에 걸맞게 미술관의 화장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비누 조각상 4점은 지하 1층과 지하 5층의 남녀화장실에 설치되어 직접 손으로 만지며 체험하게끔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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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프로젝트> 2023. 코리아나미술관 화장실 설치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작품을 손으로 만지면서, 만지는 행위를 통해 변형되는 비누의 특성으로 인해 정교한 비누 조각상은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구(球)체로 바뀌어간다. 그러한 변형의 과정에 함께하는 관람객에게 일종의 희열감을 선사해주며 엄숙한 미술관의 공간적인 의미를 전복하여 흥미를 유발한다.

 

작가는 관람객들에 의해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마모되어 가는 "되어감"의 과정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하여 화장실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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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 프로젝트> 브론즈, 2023

©코리아나미술관

 

 

다음으로 <풍화 프로젝트>는 공간 외부에서 자연환경을 직접 마주하고 견뎌오며 적응해온 비누 조각을 일컫는 작품으로, 그 외형은 변형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풍화에서 발생한 조각상을 다시 캐스팅해 레진이나 브론즈를 입혀 작업하는 행위를 통해 시간성을 지닌 오브제에 물질성을 덧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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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 프로젝트> 레진, 2023

©코리아나미술관

 

 

레진과 브론즈로 덧입혀진 조각을 두고 작가는 '진정으로 마침표가 찍힌 멈추어진 시간'이라 표현하면서 풍화 과정의 끝맺음을 암시한다. 또한 새로운 재료가 표면을 덮으면서 풍화를 거친 조각상의 다른 차원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의 의도처럼, 레진과 브론즈를 걷어내면 숨어있는 이면과 어떤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지를 상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되어감'의 과정은 비로소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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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2023

©코리아나미술관

 

 

신미경 작가의 비누 조각은 작업 과정부터 완성, 관람객들에게 닿는 순간까지도 '되어감'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해준다.

 

비누의 조각화, 조각에 담긴 시간성과 물질성, 시각 또는 촉각이 오브제에 닿아 또 한 번 새로워지는 되어감의 과정은 연속적이고 예측 불가하게 진행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되어감의 과정, 그 짜릿한 긴장감은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재미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처럼 비누가 조각이 되는 작가의 상상이 현실로 구현된 미술관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상상은 현실로 바뀔 준비를 하고 있다. 생동하는 뮤지엄에서 생각이 트이는 재미, 그와 함께 발현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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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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