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외와 사랑에 관한 동화 - 뮤지컬 '카르밀라' [공연]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의 우정이 만든 현실의 은유
글 입력 2024.07.2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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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세월이 뭍은 고풍스러운 집이 있다. 정원엔 보라색 히아신스가 피어있고, 건축물 뒤로 펼쳐진 하늘엔 커다란 보름달이 걸려 있다. 음산한 듯 동화같은 풍경이다.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하얀 달은 붉은 핏빛으로 변한다. ‘뱀파이어’ 그리고 보름달과 피, 이 세 가지 키워드는 관습적으로 흡혈을 암시한다. 흡혈은 곧 뱀파이어에 대한 부정적이고 두려운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악의로 가득한 표정과 막강한 송곳니, 비명소리 같은 것들. 아마도 흡혈이 곧 피를 ‘빼앗기는’ 행위이고, 고통을 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부정적 인식은 극의 도입부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웬걸, 무대 위로 등장한 뱀파이어, 카르밀라는 강하고 악해보이기는 커녕 모든 삶의 의욕을 잃고 세월에 지쳐 있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죽기를 희망하는 카르밀라는 흡혈행위를 인간에게 들키고자 일부러 도망가지 않고 흡혈 장소에 머무르기까지 한다. 그런 카르밀라의 행동을 비난하고 우려하는 닉 역시 뱀파이어에 대한 보통의 예상과 다르기는 마찬가지다. 하늘을 날거나 햇빛에 피부가 불타고 마늘, 십자가를 무서워한다는 소문과는 달리,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뱀파이어에게 대적하기 위해 애쓰는 사제 옆에서도 능수능란하게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뽐낸다.

 

작품은 뱀파이어라는 비인간 존재 자체를 공포의 소재로 쓰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관객의 익숙한 기대를 배반하며 그 공포와 거부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관객 스스로가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동화처럼 시작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이고 폭넓은 논의로 번진다.


뮤지컬 <카르밀라>(민미정 작, 황예슬 작곡, 이강욱 연출)는 1872년 작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최초로 여성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고 알려진 소설이다. 뮤지컬 작품은 2017년 아르코-한예종 뮤지컬 아카데미를 통해, 2019년 충무아트센터 뮤지컬하우스 블랙앤블루를 통해 총 두 차례의 리딩공연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며 이후 행보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2024년, 드디어 본 공연으로 관객을 만나게 된 <카르밀라>는 지난 리딩 발표와는 달리 모든 배역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하며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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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카르밀라와 로라가 10년 만에 서로를 다시 마주하며 시작된다. 죽음을 갈망하는 카르밀라가 삶의 의욕을 되찾고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닉은, 마차 사고를 가장해 로라가 살고있는 집에 카르밀라와 함께 들어선다. 그렇게 세상에서 자신을 격리한 채 살아가는 두 존재, 카르밀라와 로라의 재회가 이루어진다.


카르밀라는 흡혈귀이기 때문에 인간의 배척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 숨어 다닐 수밖에 없다. 로라는 흡혈귀에게 아버지를 잃은 이후 사람들이 그녀를 불편해하기 때문에, 또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문을 잠근 채 집 안에서 살아간다. 망원경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바깥 풍경에 설레여 할 뿐이다. 두 인물의 소외에는 ‘흡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기본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로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만남과 우정은 선입견을 뛰어넘은 사랑의 의미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뿐만 아니라 흡혈귀가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짐에 따라 겪는 해묵은 고통을 단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폭넓은 사회 문제와 연관된 은유로 느껴지게 한다.


카르밀라와 로라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주로 무대 가운데 위치한 ‘로라의 방 안’이다. 방보다 높은 계단이 방의 양옆을 둘러싸고 있고, 방 뒤편으로는 더 높은 무대가 세워져 있어 방에서는 자연히 ‘폐쇄’와 ‘제한된 공간’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닉과 동행한 슈필이 흡혈귀를 공격하기 위해 찾아 나서는 동선은 방 바깥을 둘러싼 무대로 넓게 설정된다. 이와 대비되어 방 안으로 제한된 카르밀라와 로라의 동선은 그들의 고립을 명확한 이미지를 통해 한눈에 체감하게 한다.


그렇게 좁은 방 안에서 로라와 카르밀라가 빠르게 우정을 쌓게 되는 계기는 ‘지도’이다. 10년 전, 성에서 카르밀라를 마주친 날 로라는 멋진 지도 하나를 발견하고 그 매력에 빠져 지도를 가져온다. 지도를 통해 바깥세상 여행을 상상하는 것은 로라가 집 안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버티는 원동력이 된다. 카르밀라와 로라는 지도 속 세상을 함께 여행하는 상상을 하며 빠르게 가까워진다. 이때에 무대에 비춰지는 이미지와 동선이 인상깊다. 무대 바닥을 가득 채운 세계 지도 위로, 두 인물은 국경도, 길도 무시한 채, ‘길을 잃을 걱정 없이’ 함께 원하는 곳으로 걸어간다. 이미 닉과 함께 여러 지역으로 여행을 다녔던 카르밀라지만, 지도 위의 상상 여행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닉과의 여행이 배척의 세상 아래 물리적인 이동만을 뜻하며 피상적 자유를 맛보게 해주었다면, 지도 위의 여행은 기성 사회가 그어놓은 영역 구분의 경계선을 이해와 연대를 통해 뛰어넘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여지껏 서로를 제외하고 로라와 카르밀라를 사랑으로 대하는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라에게는 그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뱀파이어와 대적하기 위해 사제가 되려는 사촌 슈필이 있다. 카르밀라의 곁에는 그녀를 오래토록 사랑한 뱀파이어, 닉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인물의 행동은 어딘가 어긋난 사랑의 대표성을 갖는다. 슈필의 사랑은 무지한 선함이다. 그는 뱀파이어에 대한 관습적인 편견 외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그 대신 그의 신념과 싸움의 바탕이 되는 건 가족을 잃은 강렬한 아픔과 분노이다. 슈필은 로라를 걱정하며 그녀에게 문을 더 철저히 잠근 채 집 안에서의 격리된 생활을 이어가기를 요구한다. '악의 없는' 태도 아래 감추기 쉬운 그의 무지는 궁극적으로 로라의 세상을 제한하고 인간과 뱀파이어 존재 사이의 구분을 강화시킨다. 반면에 닉의 사랑은 상대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을 향해 있다. 그녀는 카르밀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영원히 곁에 두기 위해 카르밀라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든다. 카르밀라는 자신이 원치 않는 새에 닉과 죽음까지도 함께해야 하는 운명 공동체가 된다. 카르밀라가 그녀에게 거부감을 보이자, 닉이 분노하는 지점은 '카르밀라를 위해 자신이 바쳐 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닉의 사랑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강요이다. 하지만 로라와 카르밀라의 사랑은 이 두 지점을 적극적으로 극복한다. 카르밀라는 로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려 들고, 로라는 카르밀라를 친구로 받아들이며 선입견을 넘어 인간과 같은 쓸쓸함과 애정을 느끼는 그의 진짜 모습을 바라본다. 두 인물이 보여주는 사랑은 관객에게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온 행동 양상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차별과 배척을 넘기 위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그 주제의식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눈에 띄는 각색 지점은 닉을 여성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원작 소설과, 뮤지컬의 리딩 공연에서는 닉 역할을 남성으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성별의 변화를 통해 닉과 카르밀라의 강압적 관계가 주는 메세지를 가부장적 사회상 아래 자행되는 위계 폭력의 특수한 문제로 좁히지 않는다. 두 인물의 성별에 의한 권력차를 두지 않음으로써 사랑의 의미에 관한 보다 좀 더 본질적이고 포괄적인 고찰을 유도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객이 본 작품의 메세지를 따라가는 데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카르밀라와 로라뿐만 아니라, 닉과 카르밀라의 사랑의 유형에서도 공성간의 사랑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은유적 이야기를 성소수자의 차별, 배제와 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회 문제로 연결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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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후반부에 앞부분부터 제시된 ‘흡혈’이라는 행위가 가진 선입견을 반전시키며 극 내내 진행되던 논의들을 하나로 집약한다. 작품은 지금껏 누구도 제공하지 않았던 카르밀라의 흡혈 행위에 대한 변호를 제시한다. 카르밀라가 흡혈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이었으며, ‘당신이 삶을 선택하지 않았듯 나도 이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슈필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인물 개개인에게 주어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흐린다. 슈필이 과거의 상처에 대한 아픔의 책임을 카르밀라에게 묻듯 자신이 본 손해에 대한 분노는 눈 앞의 개개인과 집단에게 행하기 쉽다. 하지만 카르밀라의 대사는 그렇게 개인들이 서로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게 만든 궁극적인 사회 체계의 부조리로 시야를 넓히게 한다. 흡혈이 공격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인간 중심 사회에서 뱀파이어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은 인정받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공존 방법에 대한 논의 자체는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수한 정체성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을지라도.

 

오해를 벗고 카르밀라가 10년 전 자신을 해치기보다는 구해주었음을 기억해 낸 로라는 닉의 죽음에 따라 함께 죽어가는 카르밀라를 자신의 피를 통해 살려낸다. 그리고 스스로 카르밀라와 피를 나누기를, 그렇게 뱀파이어가 되기를 택한다. 로라는 흡혈로 인해 과거 자신이 겪은, 또 겪어야 할 손해와 아픔에 매몰되기보다는, 카르밀라와의 공존으로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가치에 주목한다. 그 순간 흡혈 행위는 사랑을 바탕으로 상대가 걸어온 길고 지난한 고통의 세월을 기꺼히 함께 겪으며 이해하고 연대하겠다는 의지 아래 자행되며, 그 공격성을 잃어버린다.


작품이 다소 명확한 메시지를 가진 만큼, 이야기 자체는 생각보다 전형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데에는 넘버가 큰 힘을 발휘한다. 뮤지컬 <카르밀라>의 넘버는 동화같은 아기자기함과 음산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초반부부터 작품이 가진 톤에 관객이 자연스레 젖어들게 한다.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하거나, 고음으로 인물의 열망에 압도당하게 유도하는 등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를 넘나드는 넘버 구성은 관객들이 극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만들면서 넘버 감상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놓치지 않는다. 특히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의 관계를 운명의 소용돌이 속을 달리는 마차에 비유한 첫 넘버, ‘마차’는 각 인물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멜로디와 가사를 통해 효과적으로 인물을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이 겹쳐 만들어내는 불안한 화음으로 긴장감과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로라와 카르밀라가 우정을 쌓으며 부르는 ‘지도 위를 걸어’는 도시를 이야기하는 두 인물의 꿈같은 묘사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예쁜 멜로디를 통해 구분을 넘은 두 인물의 우정을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만든다.


극의 마지막 장면, 뱀파이어가 된 카르밀라와 로라는 손을 잡고 방을 나선다. '우린 어디로 가게 될까?' 라는 질문에 두 인물은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존재들에게 고루 빛을 비춰달라’고 기도하는 슈필의 태도 변화는 관객에게 희망을 남긴다. 그들이 방을 나서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것을 그려내는 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두 인물은 지도를 벗어나 진정 자신만의 길을 그리러 나아간다. 카르밀라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다. 로라가 준 것이다. 로라는 그 십자가를 슈필에게 받았다. 뱀파이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의도였다. 십자가를 몸에 걸고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상당히 낯설다. 그 어색함은 사실 궁극적으로 혐오가 아닌 사랑을 말하고 있었을 신념들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박보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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