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온갖 것들을 수집하는 일을 좋아했다. 조금이라도 내 눈에 예뻐 보인다면 나의 보물 주머니 한 켠에 들어가 한참이고 나오질 못했다.
해변가의 조개와 길을 걷다 만난 예쁜 색감의 돌부터 포장지가 마음에 드는 초콜릿 포장지와 형형색색의 구슬, 심지어 흔들리다 빠진 유치와 아깝게 잘렸던 머리카락도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조금 괴이해 보일 수 있는 수집품들이지만, 당시에는 그것들을 함부로 버리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참 소중하게 다뤘었다. 엄마가 버리라며 잔소리를 할 때도 굳건히 버티며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다 커서 어른이 되어도 이 소중한 물건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다짐이 그리 단단할 수는 없는 법, 마치 엄마에게 삐지고 이제부터 말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 뒤돌아서면 잊혀지듯이 나는 세월과 함께 나의 보물들을 천천히 그리고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이사를 다닐 때면 나의 보물들은 한번씩 대거 버려지곤 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나의 최애(?) 돌멩이들이 여전히 서랍 안에서 잠자고 있긴 하지만 90% 이상이 버려졌음은 틀림없다. 시간이 흐르며 더 이상 그것들에 이전과 같은 애착이나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그보다 더 좋고 세련된 것들이 더 많이 생겼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버릴 때는 조금 아쉬운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버리고 나서 다시 생각나는 것들은 없는 걸 보면 더 이상 나에게 소중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런 나도 모으기 시작한 순간부터 단 한번도 버린 물건이 없는 보물상자가 하나 있다. 일명 추억상자인데, 그 동안 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상자이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늦어도 중학생부터 받은 편지들은 거의 빠짐없이 상자 안에 남아있다. 모으기 시작한 순간부터 한번씩 정리를 할 때마다 뒤적이며 손에 잡히는 편지들을 읽어보곤 했지만 버릴까 고민이 되는 편지는 없었다. 그저 한 장씩 읽어나가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어 할 일을 미루게 된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렇게 상자 안에는 남편과 연애할 때 받았던 편지부터 친구들의 생일축하, 대학 동기의 군인 시절 한탄은 물론 학창시절 친구와의 소소한 뒷담화까지 차곡 차곡 쌓이게 되었다.
문득 진작 버렸던 초콜릿 껍데기와 편지 사이의 차이점이 궁금해졌다. 단순히 편지에는 보관할 만한 정보들이 있고 초콜릿 껍질에는 없다는게 이유라기엔 석연치 않았다. 편지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은 이미 수백 번도 더 들었고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편지의 내용보다 그 외의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편지 위의 손 글씨는 단순한 활자와 다르다. 같은 문장이라도 인쇄된 글자와 종이 위의 손 글씨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진다. 어떤 단어를 더 꾹꾹 눌러 썼는지, 어디서 마음이 바뀌어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했는지, 휘갈긴 획과 정자로 반듯한 글까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건 손 글씨뿐이다. 단순한 문자로서 읽히는 내용이 다가 아니라 그것을 쓰던 이의 움직임과 마음을 함께 읽을 수 있는 흔적 그 자체다.
그래서 나의 보물상자를 열어 오래된 편지를 펼칠 때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었다. 지금은 쓰지 않던 그 시절의 말투와 스티커, 삐뚤빼뚤한 글씨, 망설임이 느껴지는 쓰다 지운 단어들. 색이 바랜 이 종이 한장은 그저 누군가의 말을 보관한게 아니라, 나와 그들의 한 시절을 통 채로 접어 두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한다. 좋아하는 것도, 기준도, 모든 것이 변한다. 그래서 과거의 물건을 보았을 때 그것이 이전과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하고 버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편지는 특별하다. 변화된 지금의 나로서 읽어도, 그 시절이 눈에 띄게 묻은 글은 나를 다시 편지를 받던 순간을 되돌려 놓는다. 정성스레 쓰여진 마음을 받던 시절로 돌아가 글을 읽는다면 누가 그 종이를 버릴 수가 있을까. 편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다. 그 말을 읽고 또 읽던 내가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래된 종이 쪼가리가 아닌, 기억 속 나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