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JIMFF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 리뷰
Jecheon International Music & Film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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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묻어둔 여름>, 소피 헬드만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
Germany, Switzerland, UK | 2026 | 114min | Color | Fiction | Korean Premiere | 12
1810년, 에든버러의 두 선생님이 스캔들에 휘말린다.가르치던 학생 중 하나가 그들이 연인 관계라고 주장한 것이다.
편견과 생존, 진실을 위해 맞서는 용기에 대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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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 티차 코비, 라이너 프리멜
제76회 베를린영화제 길드필름상 특별언급
Austria | 2026 | 86min | Color | Fiction | Korean Premiere | 12
알 쿡은 추억에 잠겨 살아간다.아파트와 지하 작업실에 빼곡히 채워진 책, 비디오테이프, LP 음반은
그가 충실하게 살았던 한때의 흔적이자 그에게 남은 전부이다.
무자비한 부동산 개발회사가 집을 철거 대상으로 삼자 그의 안식처는 무너지게 된다.
이제 그는 폐허가 된 자신의 존재를 마주해야 한다.
지켜온 것들이 무너진 뒤에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울타리의 무용함, 외면해온 감정, 익숙하게 늘 존재하던 사람과 공간. 소피 헬드만의 〈묻어둔 여름〉과 티차 코비·라이너 프리멜의 〈그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는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지역에서 다져온 삶이 제 모양을 잃기 시작하고 그 이후에 드러나는 것들에 주목한다.
두 영화는 파괴를 새로운 출발이나 성장의 계기로 낭만화하지 않는다. 어떤 시작이 이전의 세계가 무너진 뒤에 가능했다고 해서, 앞서 일어난 상실이나 파괴가 필요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묻어둔 여름〉의 원제는 《The Education of Jane Cumming》이다. 영화는 18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기숙학교에서 학생 제인 커밍이 두 여성 교사 제인 피리와 메리앤 우즈를 연인 관계라고 고발하며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원제가 사건의 기폭제가 된 제인을 전면에 세운다면, 한국어 제목 〈묻어둔 여름〉은 오랫동안 기록 뒤편에 묻혀 있던 그해 여름,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말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시간을 바라본다.
완고한 시대의 편견은 반복되는 규범을 만들고,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와 옳고 그름뿐 아니라 삶의 순간에 어떤 감정이 채워져야 하는지도 대신 결정한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를 죄의식이 따라붙는다. 피리와 우즈가 서로에게 품은 마음 역시 그런 시대 안에서 외면당했다.
그 마음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두 사람을 파멸시키려던 고발이다.
학교를 잃고 명예와 생계가 한꺼번에 휘청일 때, 오랫동안 이유 없이 억눌러진 감정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그 가운데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바라본다. 가장 가혹한 처벌의 순간에, 작은 해방이 움튼다.
그렇다고 이 비극을 제인이라는 한 아이의 악의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제인의 마음에는 애정과 질투, 두 사람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욕망과 자신만 밀려났다는 상처까지 엉켜 있다. 한 아이의 미숙한 말이 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두 여성을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시대에도 기어코 피어난 사랑은 그렇게 가장 쉬운 약점이 되었다.
우즈가 싸움을 내려놓는 마지막 선택은 패배가 아니었다. 세상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함께 나눴던 둘의 시간은 누구도 지우거나 부정할 수 없는 그녀들의 것이었다. 우즈는 사회의 인정을 받아내는 일보다 자신들이 나눈 삶의 가치를 온전하게 지키고자 했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시대는 당연하게 자신들을 버렸지만, 서로를 만나게 해준 그 시간만으로 충분했다는 고백의 뒷모습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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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차가운 기숙학교를 빠져나와 현대의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낡은 세계를 지탱해온 한 남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의 알 쿡은 실제 블루스 뮤지션이다. 영화에서도 자신과 꼭 닮은 인물을 직접 연기한다. 평생 빈에 살며 미국 땅을 밟아본 적은 없지만, 열네 살 무렵부터 미국 남부의 블루스를 듣고 독학으로 음악을 익혔다. 영화의 제목 ‘The Loneliest Man in Town’ 역시 그의 실제 노래에서 가져왔다.
그런데 화면 속 알 쿡은 제목만큼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아침을 차리고 LP를 튼다. 근사한 옷을 입고 익숙한 식당으로 향하고, 혼자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며 연말을 준비한다. 집을 가득 채운 8mm 영사기와 LP, 엘비스 프레슬리 수집품도 실제로 그가 오랜 세월 모아온 물건들이다. 혼자라는 사실보다 자신을 대하는 것에 능숙한, 좋아하는 것들을 잘 알고, 곁에 가득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먼저 든다.
그 평온은 역시 바깥이 깨뜨린다. 재개발에 동의하라는 압박이 사적인 공간과 생활의 리듬까지 침범하자, 결국 알 쿡은 서명하고 집을 비우기로 한다. 물건이 빠져나갈수록 공간은 넓어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지나간 시간들이 관객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의 앨범, 액자, 인형까지 하나씩 꺼내놓을 때마다 그는 과거를 되짚으며 물건들에 담긴 자신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준다.
그렇게 그는 어딘가 깊숙이 넣어두었던 꿈까지 꺼내 든다. 미국으로 가 음악을 해보겠다는 오래된 꿈이다. 집을 잃었기 때문에 꿈을 되찾았다고 말한다면 낭만적이고 희망적이겠지만, 이전과 같은 삶이 불가능해진 뒤 미뤄왔던 다른 가능성을 쥘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지 않을까.
떠날 준비를 마친 그에게 오래전 연인이 찾아온다. 모든 것을 비워내고 홀로 남았다고 믿은 순간, 낡은 문을 열고 그의 빛나던 과거가 걸어 들어오는 장면이다. 평생 짊어진 짐을 다 덜어냈다고 생각한 텅 빈 방 안으로, 그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이제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조각이 돌아왔다. 더 이상 자신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빈에서 음악을 했고, 사랑했고,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그에게 밀려든다.
영화는 그의 선택이 아닌 텅 빈 집을 비추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 빈 공간에서 두 영화가 겹쳐 보인다. 피리와 우즈는 자신들을 자책하게 만들며 지켜온 오래된 규범이 삶을 되레 공격해올 때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알 쿡은 자신을 지탱하던 공간을 잃고 나서야 꿈을 향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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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들의 이야기을 ‘위기가 기회가 된 이야기’라고 쉽게 부를 수 있는가.
그 문장은 위기를 한 번 겪어본 사람에게는 가혹하게 들리는 타자에 의해 지어진 문장이다. 한 번 무너져본 사람은 희망을 온전한 희망으로만 볼 수 없게 된다. 무언가를 얻는 순간부터 다시 잃을 가능성을 먼저 계산하게 되고, 과거의 상처가 기행처럼 욱신거린다. 비관은 희망을 부정하는 게 아닌, 희망 앞에서 먼저 의심하는 몸의 버릇이었다. 피리와 우즈는 시대가 허락한 범주 밖에서 서로를 선택하고, 알 쿡은 사라진 세계 앞에서 오래 바랐던 곳으로 움직인다. 상처를 극복했다거나 시련을 딛고 성장한 아름다운 서사로 포장해서 보지 않아도,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자기 몫으로 계속 살아냈다는 점에서 이 두 영화가 가진 힘은 충분히 드러난다.
알 쿡의 외로움은 음악을 통해서만 터져 나온다. 그가 자신을 이 도시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 노래할 때, 카메라는 청중들의 얼굴을 하나씩 비춘다. 혼자 온 사람도, 누군가와 나란히 선 사람도 같은 노래에 잠겨 노랫말에 젖어든다. 외로움은 각자의 몫이지만 누군가 먼저 그것을 발음하면 잠시 타인의 외로움과 맞닿는 찰나가 생긴다. 그 모습은 도시와도 퍽 닮아 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도 사람을 지독하게 고립시키는 곳. 불빛과 소음, 끊임없이 스쳐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의 외로움은 유난히 선연해진다. 그러나 우연히 한 장소에서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만들며, 그 고립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꿔놓는 것 역시 도시다.
무너지고 나서야 사랑이라 말하고,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며 떠나려는 순간에 그 장소가 남긴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이를 타인의 입장에서 ‘위기가 기회가 된 이야기’라고 재단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새로운 길 하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앞선 상실이 정당화되거나, 새로 생긴 길이 과거의 무너짐을 덜 아프게 할 수는 없으니까.
피리와 우즈에게 사랑은 시대의 폭력을 보상하지 못하고, 알 쿡에게 새로운 출발 역시 사라진 집을 온전히 대신하지 못한다. 다만 이전과 같은 삶이 더는 가능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사람은 다음을 선택해야 한다.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싸움을 이어갈 것인지 멈출 것인지. 그 선택이 옳았는지, 그 뒤의 삶이 행복했는지를 영화는 판정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섣불리 판정할 수 없다는 듯이 끝맺는다. 우리는 그저 다음 시간을 향해 가는 이들의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