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공포라는 장르가 오랫동안 기대 온 문법은 '미지'였다. 크리처, 살인마,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인. 관객이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한 대상일수록 공포를 조성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이 문법은 어느 순간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비슷한 구조의 콘텐츠가 너무 많이 쏟아졌고, 이성적 사고에 익숙해진 관객은 더 이상 미지의 존재가 실재하여 자신에게 닥쳐올 것이라 쉽게 상상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의 공포 영화들은 방향을 틀었다.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서 공포를 끌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마주하는 엄마가, 매일 통화하는 친구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할 때 생기는 균열. 오늘날 공포는 대체로 그 틈에서 자란다. <옵세션> 역시 이 계보 위에 있다. 낯선 존재의 틈입이 아니라, 이미 잘 알고 있던 존재가 이질적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으로 공포를 쌓아 올린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연애에 서툰 베어가 짝사랑하는 니키에게 고백했다가 실패한다. 골동품 가게에서 소원을 이뤄준다는 나뭇가지 장난감을 사고, "니키가 나를 가장 사랑하게 해달라"고 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제목이 예고하듯 지나치게 정확하게 이뤄진다. 니키는 베어에게 미치도록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 집착은 곧 주변 인물 전체의 파국으로 번져 나간다.
#1.
가장 먼저 짚고 싶은 질문은 이거다. 이 소원, 제대로 이뤄진 걸까.
나는 제대로 이뤄졌다고 본다. 베어는 정확히 "니키 프리먼이 나를 가장 사랑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니키 프리먼이라 불리는 존재는 정말로 그를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문제는 소원의 언어가 지나치게 헐거웠다는 데 있다. 만약 베어가 원했던 게 '지금까지 알아온 그 니키'의 사랑이었다면, 훨씬 정교하게 빌었어야 했다. 지금까지의 니키로 살아온 자아가, 지금까지의 니키다운 방식과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소원은 그렇게 발화되지 않았다. 결국 이뤄진 건 니키라는 이름을 가진, 그러나 니키는 아닌 어떤 존재의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베어가 첨예하게 설계된 소원의 언어를 말했다면, 잇따른 비극은 없었을까. 그것 또한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것은 그 염원이 실체에 가장 유사할 것이란 착각 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변수 속에서 결국 베어 또한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새로운 모순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흥미로운 가설을 세운다. 소원을 들어주는 장난감의 제조업체가 니키의 진짜 자아에서 '사랑할 때의 니키'만 분리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설정이다. 베어를 사랑하게 된 존재는 니키와 완전히 무관한 타자가 아니다. 니키의 연애 성향 중 일부가 극단적으로 증폭된 형태와 가장 가깝다고 추측한다. 그렇기에 그 단편적 부분만 남은 존재가 낯선 타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베어가 '나를 가장' 사랑해 달라고 빌어버린 탓에, 본래 이언이나 세라 같은 주변인들에게 나뉘어야 했을 사랑의 총량까지 모두 베어 한 사람에게 쏠려버린다. 더 나아가 니키는 소원의 치명적 오류로 인해 니키 '자기 자신'보다도 베어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결국 니키의 자학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사랑의 형태도 이곳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옛 연인과 친구, 그리고 본인마저 무참히 살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을 향해 흘러야 했던 사랑의 자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2.
베어와 니키, 그리고 세라와 이언 영화가 사각관계를 통해 그려내는 건 결국 사랑이 향하는 방향의 문제다.
베어의 고양이가 죽었을 때, 가장 먼저 그를 위로한 사람은 세라였다. 니키는 그 위로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정확히 파악한 뒤, 아버지가 아프다는 거짓말로 베어를 유인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세라와 이언의 해석이 갈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라는 베어가 이용당한다고 여기고, 이언은 세라가 이용당한다고 여긴다. 각자 마음이 향한 대상을 자기도 모르게 두둔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렇게 언제나 객관을 가장한 편향을 데리고 다닌다. 소원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그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괴담을 보여준다.
이언이 베어에게 "나는 남는 게 시간이다"라는 고백 멘트를 코칭해 준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니키와 한때 연인이었던 이언은 니키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단서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니키와 이언의 묵은 관계뿐만이 아니다. 함께 있는 시간, 함께 보내는 순간. 니키에게 사랑은 그런 형태로 존재했다. 그렇다면 니키의 집착도 이 성향이 왜곡되어 극대화된 결과로 읽을 수 있다.
이쯤에서 이 영화가 진짜로 건드리는 지점이 드러난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내재한 근원적인 오인 말이다. 흔히들 친구보다 연인에게 더 엄격해지는 이유가, 연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나와 가장 비슷한 방식과 정도로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일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기대다. 베어가 니키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했던 정도와 방식을 초과해서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고, 니키가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며 절규하는 이유도 베어가 자신과 같은 강도로 화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논리의 양극단에 서서 서로를 향해 절규하고 있는 셈이다.
베어가 니키와 다투며 "진짜 니키가 되란 말이야, 넌 진짜가 아냐"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오인의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그리는 '진짜 니키'는 사실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파편만 모아 조립한 상상 속 존재일 뿐이다. 눈앞의 니키는 그 이상이거나 미달하는, 어느 쪽으로든 어긋난 현실이다. 조금 거칠게 요약하면, '니키'와 '프리키 니키'의 대비는 결국 '연애의 이상형과 연애의 실체' 사이의 대비다.
#3.
영화가 사랑을 그려내는 또 하나의 방식은 포식, 즉 먹어치운다는 이미지를 통해서다.
극의 중반, 니키는 베어의 도시락 샌드위치에 죽은 고양이의 살점을 넣는다. 단순한 혐오 연출이 아니다. 여기엔 니키 나름의 사랑 논리가 담겨 있다. 클라이맥스에서 니키는 "차라리 널 먹어버리고 싶어"라고 절규하는데, 이는 사랑하는 대상을 삼킴으로써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어딘가 어긋난 욕망의 표현이다. 베어가 사랑했던 고양이의 사체를 베어 자신이 먹게 함으로써, 니키는 둘이 진정으로 합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포식의 이미지는 파티 장면에서 니키가 직접 들려주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로 다시 한 번 변주된다. 자신이 썼다고 소개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남매는 근친의 관계를 맺고, 그레텔은 오빠 헨젤의 신체를 차라리 먹어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니키가 예전에 베어를 두고 "남동생 같은 애"라 칭했던 장면을 떠올려 보면, 이 우화는 단순한 그로테스크 삽화가 아니라 니키의 처지에 대한 암시로 읽힌다. 친남매처럼 여겼던 대상과 원치 않는 관계로 얽매이는 상황, 자신의 신체와 자아를 빼앗긴 채 사랑해야만 하는 처지. 베어의 시점에서는 주술적 힘으로 짝사랑이 이뤄지는 낭만처럼 보였을 이야기가, 니키의 시점에서는 신체의 박탈과 강요된 사랑이라는 끔찍한 사건으로 뒤집힌다. 베어의 서사에 가려져 있던 니키의 공포를, 영화는 이 우화 하나로 슬며시 되비춘다.
#4.
이 지점에서 볼프강 카이저의 그로테스크론을 잠깐 빌려 오고 싶다. 카이저는 우리가 진정 이질적으로 느끼는 대상은 그저 '생경한 것'이 아니라 '생경해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원래 낯선 존재보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던 일상적 대상이나 관계가 전혀 다른 것으로 뒤바뀌어 버리는 순간이 오히려 더 기괴하다는 것이다.
<옵세션>이 고른 공포의 자리가 정확히 여기다. 크리처나 살인마 대신, 원래도 그냥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니키를 공포의 진원으로 삼는다. 시각적으로 흉측한 존재를 만들어낼 수 없는 이 설정 안에서, 영화는 어둠이라는 장치를 빌려 익숙했던 얼굴을 왜곡하고 은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오래된 공식을 계승하면서도, 공포의 대상 자체는 '알던 사람이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이 시대 공포의 문법을 아주 정확하게 따라간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변모한 니키조차 베어를 직접 해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 상황이 어긋날 때마다 자기 자신을 해친다. 사랑이 결코 상대를 겨눌 수 없을 때, 그 폭력은 방향을 바꿔 관계 안에 계속 서 있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 갈등은 흔히 상대와의 투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 관계를 놓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훼손하며 상대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니키의 자기파괴적 몸짓은 극 후반, 베어가 일을 나가고 홀로 남겨진 장면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혼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토하고, 실금하고, 과하게 웃으며 그를 배웅한다. 기이하게도 이 모습은 반려견, 특히 분리불안을 겪는 개의 행동과 겹쳐 보인다. 감독이 분리불안이라는 임상적 증상을 인간이 아닌 동물의 신체 언어로 빌려 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장면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하다. 어떤 차원의 욕망과 집착이든, 그것이 일정 수위를 넘어 과열되면 결국 같은 곳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차원적인 정신적 애정이라 믿고 싶어 하는 감정조차, 상식의 경계를 넘는 순간 짐승의 본능이라 부르며 낮잡아 온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쩌면 사랑은 애초에 그리 숭고한 무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숭고하고 고결하다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랑의 형태가 따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그저 가장 솔직한 본능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5.
연출적으로도 영화는 익숙한 문법을 비틀어낸다. 긴장을 서서히 고조시켜 위화감을 위기감으로 확장하는 통상적인 크레셴도 대신, 예측 불가능한 이완과 급격한 긴장을 반복해서 배치한다. 잠잠하다 싶으면 갑자기 조여 오고, 팽팽하다 싶으면 뜬금없이 풀어 놓는다. 점프스케어도 단순한 등장의 충격이 아니라, 인간의 발성 범위를 넘어서는 듯한 절규를 통해 짐승에 가까운 낯섦을 조성한다.
특히 목소리와 비명이라는 청각적 재료를 적극적으로 쓴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전화기 너머로 찢어지듯 들려오는 고함,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절규. 음향이 좋은 상영관에서 볼 때 그 효과가 배가될 법한 영화다.
결국 이 영화가 도달하는 자리는 소원이라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 근본적인 한계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일은 언제나 상상했던 형태 그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바라던 것의 가장 근사한 근삿값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이상과 실체가 정확히 포개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기적에 가까울 것이다.
<옵세션>은 그 기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가장 사적인 감정의 영역 안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사랑받고 싶다는 소원이 문자 그대로 이뤄지는 순간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된다 — 이 아이러니야말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가장 오래 가는 잔상일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