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느러미>는 붉은 바다를 비추며 시작한다. 바위 위를 기어 가로로 나란히 이동하는 존재들. 그들은 포장재로 둘둘 싸인 시체들을 바다에 던져 놓는다. 어떠한 비극을 암시하는 듯, 영화의 서막은 매캐하고 비릿하다. 영화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따른다. 막연히 광활하고 푸르게 우리를 압도할 것 같던 바다는 더 이상 푸르지 않다. 벌건 하늘은 우리가 으레 올려다보던 하늘의 인상과 다르다. 전반적으로 섬뜩함을 자아내는 색채를 사용한 화면, 낮은 명도, 거칠고 그로스테스크한 텍스처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다.”
시사회에서 박세영 감독이 영화에 대해 언급한 말이다. 그 언급에 부응하듯 영화는 ‘편한’ 영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품 내내 지속되는, 자극적인 동시에 침울하게 가라앉은 기류는 분명히 우리에게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인간과 오메가, 그들의 관계
동해 제114구역, 인간들은 가축의 수를 세듯 알 수 없는 인원들을 통제한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쟤네 다 순해.”
인간이 ‘오메가’라고 칭하는 존재. 그들은 남루한 행색과 재와 오물로 더럽혀진 얼굴로 무자비하게 ‘취급’된다. 인간들은 오메가들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경계한다. 동시에 그들을 ‘독성 폐기물을 수집하는 노동력’으로 이용한다. 존재에 대한 권리와 존엄이 말살된 순간은 마치 가혹한 노동착취의 현장과 닮아 있다.
대한 자유 청년 공무원
끝없는 복도, 그 사이의 무수히 붙어 있는 문들. 문들은 어떤 용도인지 모두 짐작할 수는 없지만, 모두 일제히 닮아 있다. 그리고 일제히 앉아 있는 노란 작업복의 청년들. 그들은 낭창하게 구호를 복창한다.
“국민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그리고 전광판에 붙어 있는 거대한 문구. ‘더러운 얼굴은 애국의 상징’. 이것은 국가 전반에 스며 있는 과도한 성취주의와 성과주의를 투영한다. ‘독한 노력’과 함께라면 우리는 무수히 나아가리라. 하지만 무엇을 위해 ‘독해져야’ 하는가, 얼마나 ‘독해져야’ 하는가. 그들은 생각해 본 적 있을까. 구성원들에게는 사유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국가와 기관은 그들의 개성과 권리를 말살하고, ‘노력’이라는 피상적인 목표만 남긴다.
‘지느러미’의 존재
“지느러미는 독성이 강하다.”
지느러미는 ‘인간은 없고, 오메가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성을 가지고 있는 부위이다. 지느러미와 같은 존재들이 또 존재한다. 길다란 갈퀴발과 성대.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고, 인간과 ‘다른’ 것이고, 마지막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오메가들의 지느러미에는 독성이 있고, 그들의 고함만으로 무참한 살인이 가능하다 입을 맞추지만, 거리를 배회하는 그런 말들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거리에 즐비한 전단지 그림의 오메가는 상당히 괴이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얼굴보다는 어류의 형상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로 거리를 헤매는 오메가는 육안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실상 그들이 강력히 대치하는 오메가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상을 하고 있다. 왜곡되고 과장된 이미지와 말들이 집단 이성을 압도한다. 오메가를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정작 그들이 토해내는 감정들은 ‘두려움’과 ‘경외’보다는 더 선명한 ‘혐오’에 가깝다.
지느러미는 ‘혐오’를 각인시키는 사회적 낙인의 일종이다. 오메가들을 더욱 쉬이 축출하기 위해, 그리고 더욱 쉬이 착취의 현장에 배치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오메가들은 지느러미를 숨기고, 인간들은 지느러미를 쫓는다.
두 소녀, 미아와 수진
노란 작업복을 입고, 공무원으로 일하는 ‘수진’은 고된 업무를 마치고 귀가한다. 걸음한 집에는 어머니가 그녀를 맞이한다. “첫날인데 벌써 왔니?”, “다 죽여버려라”. 일반적인 모녀의 대화로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수진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라오면서, 그리고 현재까지 그러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어왔을 것이란 것이다. 그래서 수진은 아주 ‘성실’하다. 하나라도 더 잡으려고,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현장을 뛰어다닌다. 그녀가 어떠한 일을 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혐오를 실행하는 손이 되는 데는 특별한 신념조차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폭력의 평범함을 더 서늘하게 만든다. 그녀를 먹이고 기르던 윗세대, 그리고 사회와 국가는 그녀에게 그런 ‘성실’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한편, 다른 소녀 미아가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낚아올리고 있다. “황금 소망의 집”. 꿈과 희망으로 무장한 그 이름은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가. 사실 미아에게는 꿈이 있다. ‘오메가가 아닌, 인간’이 되는 것. 그녀는 아슬아슬히 경계에 걸쳐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이 아니지만 사회적으로는 오메가도 아니다. 그녀는 ‘오메가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오메가를 혐오한다. 발을 잘라내고 낚시터에 숨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을 낚아올린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정체성을 삭제하고 묵인하기 위해 반복된다.
미아는 피아노를 배운다. 갈퀴발을 잘라낸, 짧게 반토막 난 인간의 발을 닮은 발로 페달을 밟는다. 피아노 선율은 그녀가 성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오메가의 고함’과 대비되면서 동시에 대응한다. 성대가 낼 수 있는 것이 오직 ‘살육의 소리’로만 규정된 세계에서, 발로 빚어내는 선율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은 언어를 대신 발화하는 셈이다. 인간이 사회 속에 고정시킨 ‘고함을 질러 인간을 학살하는’ 이미지와 다르게, 미아는 그녀의 발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선율을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듣고자 할까.
결국 수진과 미아는 같은 낙인의 구조를 각기 다른 자리에서 살아내는 인물들이다. 수진이 타의에서 파생된 자의로 낙인을 집행하는 손이라면, 미아는 낙인을 스스로에게 새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몸이다. 그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가해와 자기부정은 이렇게 한 사회 안에서 맞물려 돌아간다.
권력관계의 비극은 대상과 형태만 바꾸어 반복된다
이질적이고 생경한 화면, 그리고 참혹하게 설정된 디스토피아 세계관으로 인해 우리가 오인하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는 '오로지 픽션'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바다가 푸르지 않고, 하늘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만 비극이 아니다. 시대적 비극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올 준비가 되어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의 단상들, 그리고 사회적 상황들을 엿볼 수 있다.” 박세영 감독이 시사회에서 언급한 말이다.
우리는 최근 한 차례 큰 비극을 지나왔다. 팬데믹 시기를 지나온 시점에서 우리는 시대의 공통된 어려움 속에 ‘화합’하고 ‘협력’하여 비극을 ‘극복’한 우리들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속에 또 다른 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그러한 비극을 극복한 역사는 온전하고 정당한가. 우리 사회가 보여준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노력이 가끔 아주 ‘독해서’ 누군가를 질식시키지 않았는지, 입을 닫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다시 물을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명칭과 기호만 다른 오메가들이 ‘지느러미’를 품에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어쩌면 미래에도 살아가고, 살아갈 것이다. ‘지느러미’는 사실 당연스레 존재하는 것이기보다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낙인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뻗어 나온 뿌리는 ‘자집단의 생존’이다. 자신이 몸담은 집단이 도태되지 않고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우월성’을 증명해 내야 하고, 그 ‘우월함’이 인정받기 위해선 ‘열등함’의 존재가 필요하다. 영화의 ‘붉은 바다의 세계’가 ‘오메가’를 만들어냈듯, 우리의 세계는 나란히 ‘열등한 대상’들을 만들어내고, 그럴듯하게 꾸며서 혐오의 먹이감으로 던진다. 그리고 그 먹이감으로서의 효용을 다한 이들과 그들의 목소리는, 영화 서두의 시체들처럼 조용히 포장되어 깊은 바다 아래로 던져진다.
이 낙인, 그리고 그것을 좀먹는 혐오로 사회는 점차 진전하고 발전하지만, 동시에 구성원들의 권리는 퇴화한다. 우월과 열등의 구도는 한 번 완성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열등함’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갱신한다. 오메가가 소멸하면 또 다른 이름의 오메가가 지목될 뿐이다. 이것이 사회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은밀하게 녹아내리는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굴레는 점차 큰 원을 그리며 확장된다. 더 ‘잘’ 살아남길 점점 욕망하고, 더 ‘많이’ 혐오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이 영화를 통해 엿본 ‘욕망과 비극’의 굴레이다. 그리고 이 굴레야말로 혐오와 낙인이 사라지지 않고 사회를 계속해서 굴러가게 만드는, 우리가 좀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동력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그저 한 사람의 몽상에서 비롯된 판타지에 불과하지 않다. 영화는 몽상가의 시선이 아닌 예리한 성찰과 통찰의 시각으로 세계를 비춘다. 다만 이 영화가 비춘 세계와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 사이의 거리를, 우리는 얼마나 정확히 가늠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