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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눈이 아닌 삶으로 겪어내는 풍경에 대하여 -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도서]

같은 이야기를 본다는 것

by 임솔지 에디터
2026.07.14 20:26

 

 

2021년 겨울, 대학 입시에 봉사 활동 점수가 반영되는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1365 자원봉사포털에서 우연히 한국영상해설협회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상해설사 교육”이라는 창을 발견했다. ‘뭐야, 앉아서 교육만 들으면 봉사로 그냥 인정해 준다고?’ 그렇게 나는 편하게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영광시각장애인 모바일점자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한 그 교육이 내 삶의 온도를 몇 도쯤 올려놓을 줄은, 그때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곳에서 만난 강사님은 예술, 스포츠, 관광 등의 현장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실시간 음성해설을 제공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그분에게서 시각장애인의 문화 향유 실태와 음성해설의 필요성, 그리고 몇 가지 사례를 들으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이 끝나고 질문이 있느냐는 강사님의 물음에 용기 내어 손을 들었다. 그 당시에도 뮤지컬을 좋아하던 나는 뮤지컬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음성해설이 제공되는지 질문했다. 이에 강사님은 공연장 내부에 작은 부스를 마련할 때도 있지만, 객석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아 해설을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셨다. 강의실 안에 약간의 충격과 씁쓸함이 감돌았다.


교육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꼭 현장영상해설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한 목표이다. 그렇지만 대학 입학 후 ‘관광’을 전공하게 된 나는 장애인의 관광에 관심이 생기면서 관련 교육 과정을 수료하기도 하고, 무장애 관광지 모니터링에 참여하기도 하고, 공연장 배리어프리 자막 오퍼레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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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활동들을 하면서 나는 모두가 동등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장애인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는 이사님, 뮤지컬에 배리어프리 자막을 단 스타트업 대표님, 휠체어도 접근 가능한 시설을 갖춘 로컬 천문대의 담당 주무관 님 등등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이라는 책을 읽으며 서수연 작가님 또한 글로써 만나 뵙게 되었다. 작가님을 포함해서 내가 만난, ‘포용성’이라는 가치를 직접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들은 모두 드라마틱한 이유 대신, 그저 당연함이 당연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그분들이 그 일을 시작한 이유에 주목하곤 했었다. 뭔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대단하고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하고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념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거창하고 강력한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역시나 ‘소외감 해소’라는 본질이었다. 완벽할 순 없어도, 적어도 이 소란스러운 즐거움 속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는 마음. … 우리가 하는 일이 거창한 구원이나 예술은 아니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관객으로서 소외감 없이 다 같이 웃고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 딱 그 정도의 배려면 충분하지 않을까. - 96p

 

 

누구나 접근 가능한 천문대의 시설 환경을 조성한 주무관 님께 이러한 일을 추진했던 이유를 여쭤봤을 때도 그분은 비슷하게 대답하셨다. “’Simple is best’니까요. 누구는 이용할 수 있고 누구는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제일 심플하잖아요.” 그렇다. 그냥 누구나 동등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 곳곳에서는 그런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바꾸는 것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단순하고 명료한 생각 때문이었다.


서수연 작가님은 2003년부터 현재까지 영화, 드라마는 물론 예능프로그램, 연극, 뮤지컬, 미술작품, 무용, 마술쇼까지 정말 다양한 작품의 음성해설을 쓰셨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이라는 책에서는 이분이 그동안 걸어오신 여정을 글자를 통해 생생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런 분이 우리나라의 1호 음성해설 작가인 것이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작가님은 음성해설에 대한 깊은 고민과 철학, 직업의식을 갖추신 분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해설 대본을 작성할 때 대상이 되는 콘텐츠를 그저 객관적으로 설명하거나 주관적으로 자신의 해석을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의 축의 중간점을 찾기 위해 오랜 고민을 해 오신 흔적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작가님은 대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의 해석들로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사람들을 다정하게 살피는 사람이었다.


 

게으른 화면 받아쓰기의 진짜 피해자는 시각장애 이용자다. 원본 화면을 확인할 길이 없는 시각장애인, 특히 태어날 때부터 시각 경험이 없는 전맹 시청자들은 해설이 얼마나 맥락 없이 뚝뚝 끊어진 불량품인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저 들려주는 대로 ‘아, 원래 이런 내용인가 보다’ 하고 짐작하며 무던하게 수용할 뿐이다. 그 당연하고 담담한 체념을 생각하면, 대본을 쓰는 손끝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 136p

 

 

이러한 작가님의 노력들로 지금까지 7800여 개의 작품들에 음성해설이 제공되었고, 시각장애인들은 비시각장애인들과 동시간대에 같은 작품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결과가 정말로 소중한 이유는, 음성해설과 같은 지원들을 통해 장애가 더 이상 콘텐츠 향유 가능의 여부가 아니게 되기 대문이다. 즉 장애가 더 이상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의 차이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필요한 이유는 비단 장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장애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기준으로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배리어프리는 그러한 개인들 사이에서 서로의 차이를 온전히 보듬어주는 방법을 알려주는 시스템이다. 나와 같고 다르다는 차가운 이분법에서 벗어나 각자의 특성에 맞는 방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나와 다른 82억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음성해설에 색상 표현을 사용해도 되나요?” 이 질문에는 시각장애인은 색을 볼 수 없으니, 선천성 전맹이라면 색의 개념조차 모를 테니 색상 묘사가 과연 실효성이 있겠다는 단정이 담겨 있다. … 애초의 색은 감정이자 상징이다. 그리고 감정과 상징은 태어날 때부터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배우는 후천적인 개념에 가깝다. … 감각은 기억을 만나고, 기억은 감정을 부르며, 감정은 다시 색을 살아 숨 쉬는 세계로 빚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붉게 타오르는 일출 앞에서 웅장함을 느끼고, 무거운 잿빛 하늘 아래서 까닭 모를 쓸쓸함에 젖어 든다. 굳이 복잡한 과학의 사례를 빌려 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색이란 ‘본다’라는 시각적 행위 너머에 존재하는 것임을. 색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겪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에서 색상 묘사를 결코 배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채로운 색으로 무언가를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문화와 사회가 오랜 시간 공들여 일군 풍요로운 상징의 세계가 시각장애인들 앞에도 비로소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 52~55p

 

 

이 책을 읽으며 나는 5년 전에 들었던 짧은 교육에서는 듣지 못했던 음성해설의 세계를 마음껏 탐험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나의 발걸음을 가장 오래 멈춰 세웠던 곳은 음성해설에서의 색깔 묘사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목이었다.


작년에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기자단으로 활동하던 때에 시각장애인이 전시를 즐기는 법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적이 있다. 그때 시각장애인이 촉각으로 색깔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소개했었는데, 기사에는 이것이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시도라는 식으로 적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정작 그때의 나는 색깔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데 저 대목을 읽고 ‘어차피 알지도 못하는데 뭐 하러 설명을 해’라는 단정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알게 되었다. 짧은 생각으로 인한 배제가 누군가의 세상을 검은색으로 덮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무장애 관광 관련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프로그램에서 그 분야에서 활동하는 종사자분들에게 공통적으로 “장애인의 관광을 위해 일하면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때는 언제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놀랍게도 그 답변이 똑같이 일치했다. 음성해설을 동반한 시각장애인 단체 여행 일정이 끝난 후, 시각장애인 관광객들이 “덕분에 내가 여길 ‘볼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고마움을 표했을 때였다고 한다.


 

‘본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짧은 단어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시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생물학적, 물리적 행위를 뜻하지만 ‘생각해 보다’, ‘알아보다’, ‘살펴보다’처럼 마음의 감각을 확장하는 은유로 쓰이기도 한다. - 50p

 

 

무언가를 ‘본다’라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알고 느끼며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본질이 있다. (보는 것 이외에도 다른 감각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에게 음성해설이 있다면 시각장애인은 볼 수 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은 감각으로 무언가를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다른 감각과 방법으로 같은 상황과 정보를 충분히 공유하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다면, 어쩌면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장애가 결함이 아닌 하나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사회를 위해서, 그리고 당연한 것이 정말 당연해질 수 있기 위해서, 오늘도 바쁘게 손끝과 입술을 움직이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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