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논의의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때의 논외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서사와 문법을 무시한 채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마는 것, 그래서 다른 기준이 하등 중요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나의 경우 논외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터놓고 과감해지자면 여자끼리만 지지고 볶는 이야기라면 더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수많은 삶의 궤적을 거쳐온 여성들의 이야기. 절대 너와 나는 같아질 수 없는, 하지만 선처럼 공존하며 때로는 겹쳐지고 포개졌다가 다시 영영 멀어지기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증조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엄마를 거쳐 내게 도착한 이야기. 그렇게 나에게로 삶이 전해지듯 지금의 나도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과거의 무수한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듯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수많은 나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그러니 『밝은 밤』에 붙은 출판사 서평을 보고 단숨에 책을 집어버린 건 우연한 일은 아닌 셈이다. 나, 엄마, 엄마의 엄마와 그 엄마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딸이 몇 명이나 있을까. 첫 장을 넘길 땐 감히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최은영의 장편 소설 『밝은 밤』은 서른두 살의 ‘지연’이 서울에서의 생활과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엄마의 고향이자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도시 ‘희령’으로 떠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람을 피운 남편과 이혼한 후 배신감과 충격, 그리고 가족인 부모님이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어릴 적 어렴풋한 기억이 남은 도시로 이사하며 희령 천문대의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
희령에서 지연은 엄마와 인연을 끊게 되어 어릴 적 기억이 전부인 할머니를 마주한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따뜻한 애정 속에 두 사람은 가까이 지내게 되고, 어느 날 할머니의 집에서 지연이 두 여자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면서 백 년에 걸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 속엔 할머니의 엄마, 즉 지연의 증조할머니가 절친인 ‘새비 아주머니’가 있었다. 할머니 영옥이 들려주는 이야기엔 증조할머니 정선과 새비 아주머니, 그리고 지연의 엄마이자 영옥의 딸 미선과 지연이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의 상처가 될 수 있는 가족, 그리고 몇 대를 건너뛰고 다시 내가 된 사랑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를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 라는 말을 들은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최은영, 『밝은 밤, 252쪽.
『밝은 밤』이 네 사람분의 여성 서사이자 가족의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비단 이 이야기가 가족의 애틋하고 행복한 면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만나는, 대개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가족은 아주 가깝고, 가깝기 때문에 서로를 더 상처 주며 자란다. 때로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지연이 어렸을 적 언니 정연을 잃었던 것에 대해 지연의 엄마 미선에게 영옥은 회복하지 못하리라고 예상할 만큼의 큰 상처를 줬다. 그렇기에 영옥은 미선에게 다시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한 세대를 건넌 지연에게 할머니 영옥은 ‘가족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는 애정 어린 존재다. 지연 역시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것에 대해 아픔을 보듬어주지 않는 미선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밝은 밤』 속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존재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한 셈이다.
『밝은 밤』이 상처를 다루는 방식은 우리의 삶의 것과 닮아있다. 시대가 내게 남긴 상처, 손쓸 새도 없이 일어난 일들이 내게 남긴 것,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이가 내게 남긴 상처까지. 안타깝지만 그 상처는 영영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불쑥불쑥 내게 남아 내 삶을 건드릴 것이다. 이 소설에 찾아오는 밝은 밤은 상처의 완전한 치유가 아닌, 상처를 그대로 직면할 수 있는 것과 그냥 그대로 ‘살아낼 수 있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소설은 정상 가족이나 사회에 구겨지듯 맞춰지기 위한 규정들을 들이밀지 않는다. 그것들은 세대를 지나쳐오며 점점 옅어진다. 상처의 흉터가 점점 옅어지듯,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옅어지듯이 말이다. 그들에겐 삶의 고개를 함께 할 친구가 있고, 피 한 번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만큼 애틋한 존재가 있었다. 때로는 반려동물이 되기도 하고, 어쩌면 그것은 다시 돌아와 손녀딸, 즉 가족이 되기도 한다.
밝은 밤이라는 건, 밝아도 밤이라는 거다. 우리는 그 밤이 우리에게 왔었다는 사실을 영영 잊지 못할 테다. 하지만 언젠가, 그 밤이 밝아지고 밝아져서 밤이었던 것이 아주 흐릿해진다면 어떨까. 정선과 영옥, 미선과 지연이 그러했듯이. 『밝은 밤』에 담긴, 네 번의 삶을 거쳐 온 여성 서사와 삶의 상처가 흉터가 되는 과정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