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나와 어떤 향수가 가장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고개를 움직일 때 좋아하는 이름의 향이 맡아지면 나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 마련이겠다. 그러니 좋아하는 연주가의 공연이 있는 날이면 내 주위로 ‘비누’가 동동- 떠다녀야 했을 텐데, 8일은 ‘재즈클럽’이 함께였다.
재즈클럽은 얄쌍한 공병 안에 담겨 있었다. 무슨 향기려나? 작은 궁금증에 칙-칙- 상단부를 검지로 눌렀다. 니스칠한 나무 서랍, 앉는 면이 많이 갈라진 선홍색 가죽 소파, 주황과 노란빛이 적절히 섞여 든 향이 났다.
무겁지 않게 달라붙는 그 눌림이 이상하게 좋아, 머리를 도리도리 했다.
그게 오전 11시쯤의 일이니, 오후 7시면 향이 다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지속력이 좋았던 건지, 음악당 로비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은 순간 불현듯 오전의 향이 스쳤다. 이러다 공연까지 같이 보겠다? 실없는 생각을 했다.
아마 그때부터 심장이 동동거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공연이 잘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는지, 그냥 긴장했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장 좋아하는’ 연주가의 공연을 보러 가는 길에서는, 이상하게 기본 상태가 불안정해진다.
얼마 전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이 있는 문을 열기 전까진 하나도 안 떨렸는데, 그거 하나 넘어갔다고 목소리가 덜덜- 거렸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웃음) 참, 아무 일도 없었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저곳으로 향한다는 게 이만큼이나 사람을 뒤숭숭하게 만든다.
또박또박 로비를 지나, 객석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다. 좌석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니 시간이 7시 5분이었다. 딱 그 시각, 김성현 기자님이 나타나 파가니니와 드보르자크에 관한 프리렉처를 시작하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이른 때여서 좌석에 사람이 꽉 차진 않았지만, 워낙 말재주 좋게 이야기를 풀어 주시니 프리뷰를 위해 단독으로 콘서트홀을 대관한 것 같았다.
다만 여전히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뒤편에서 웃음이 나면 같이 웃음을 지어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그러했다. 25분쯤에는 아무도 없는 무대 위를 찍어 보던 카메라도 내려놓았다.
가만히 이별을 기다렸다. 7시 30분이 되면 내 앞에 ‘무언가’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이젠 나도 잘 알고 있다.
클래식만큼 슬픈 예술이 또 있을까. 가녀리고, 예쁘고, 속을 터뜨린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서, 우리는 그저 사잇길에서 맴돌게 된다.
누군가 알아줄 때까지. 연주해 줄 때까지. 그리고 눈을 맞춰 줄 때까지… 이런 걸 보면 클래식이 우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7시 30분이 되었다. 관객석은 어둑한 그대로. 살짝 밝아졌던 무대 위로 한층 더 밝은 빛이 넓게 펴진다. 그러면 왼편의 커다란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협연자가 먼저, 지휘자가 그 뒤로 또각-또각- 걸어 나온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만 느낄 수 있는, 크게 드러내지 않는 설렘. 들뜸. 기대감이 연주자의 눈 위에 보인다. 파가니니를 앞두고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나기도 했고, 역시나 싶기도 했다. 그가 연주를 잘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이 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명성에 오히려 내 쪽에서 긴장감이 엄습했다.
어떻게 두터워지려나. 어떻게 물러나려나. 얼만큼 강하게, 얼만큼 가녀리려나.
그가 기교적으로나 역동적인 모먼트를 잘 살려내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타이밍이 어떻게 될지는 본인 혹은 그때마다의 무의식이 결정하는 일일 테니 일단 기다려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을 예습할 적에는 오히려 딱- 정석적으로, 뭔가 다양한 변화구를 귀로 막 때려박는 스타일의 버전을 피해 듣는 정도로 귀만 열어 두었다.
그러니 이리 생각했다. 1악장과 카덴차, 3악장은 오로지 임동민에게 맡겨 보자. 다만 2악장 중반에 소리가 가라앉는 때가 오면, 그때는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자. 그러기로 약속했다.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D장조 Op.6 (협연: 임동민)
1악장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바이올린의 입장을 위해 은은한 쾌활함을 들여다 놓는다. 임동민은 지휘자 쪽으로 몸을 세운 채 서 있었고, 관객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흥을 안고 그 입장을 기다렸다. 무대와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서, 나도 그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생생함에 이를 앙 다물었다.
연주자는 가만히 음미하고 있는데, 나는 혼자 덜덜 떨고 있었다. 바이올린이 바로 치고 들어오는 도입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저 앞에 선 사람에게서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긴장감이 절로 치솟았다.
속절없이 그가 들고 있는 바이올린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의 손에 프란체스코 루제리(1667)가 있었다. 마테오 고프릴러(1715-1720)보다 색이 밝고 카라멜색에 가까웠다. 루제리 씨는 무슨 말을 하려나.
너그럽지만 당찬 풍경 사이에서 한참을 기다리는 사이, 임동민이 루제리를 어깨 위에 얹었다.
첫 음부터 그는 통보했다. ‘나 시작한다’가 아니고 ‘나 살아난다!'. 이 연주자의 활과 현 사이에서 나타나는 음은 유달리 그때마다 태어난다. 그냥 지나갈 수 있는 한 선에 크게 에너지를 들여다 놓는데, 그 힘이 지나가는 길목에 스파크가 튄다.
그의 연주를 보면 활이 가장 어깨 안쪽의 현을 누를 때, 이쪽으로 쭉- 다가오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가 나타난 다음에는 꼭 일이 벌어진다. 콱콱- 이 아니라 콰작! 거칠게 밀어붙이다가 금세 지워 버리고 가느다란 물줄기 하나를 흘려보낸다. 한 사람의 연주인데도 서로 다른 성량이 번갈아 앞으로 걸어 나온다.
연주가의 외형만 보면 우직하게 갈 것 같은데, 진짜- 내가 아는 바이올린 중에 제일 소리에 동작이 많다. 숨을 한 번 쉬어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시니컬하게 무대 뒤편과 앞으로 새카만 끈으로 체조를 하는 것이다.
끈이 흩날리는 때의 나긋한 나풀거림도, 예상치 못한 때에 마구 나부끼는 것도, 이게 다 몇 초 안에 벌어지는 일이다.
사람을 다그치듯 몰아붙이다가도, 금세 뒤로 물러나 조용한 빛 하나를 남긴다. 그렇게 가련해지는 소리 앞에서 버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1악장에서 파가니니가 따뜻한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 도래하면, 평화롭기보다 홀연히 서서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다. 소리가 막 물 흐르듯 흐느껴진다기보다, 건조한 상태로 애원하는 무표정의 간청에 가깝겠다.
이렇게까지 독백체로 새카매질 줄은 몰랐는데. 그곳에 오래 머문 것도 아니다. 나아갈 길에 뛰어넘어야 하는 장벽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기교라고 명명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더 새카맣게 공중에 음표를 박제한다. 새겨 넣는 길에 따라 소리가 번뜩일 것이다. 갑자기 입체적인 면모를 보임에 놀랄 것 없다. 뒤쪽에서 휘파람을 부를 때에도, 소쩍새를 닮은 소리를 낼 때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게 정말 바이올린이 맞나 싶어진다. 한 악기에서 저렇게 많은 소리가 나올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파가니니에서 만난 임동민은 프로코피예프 때보다는 붉은빛이며, 자유를 찾으면서도 아주 깊이 숨겨져 있는 중심부에 무게감을 잊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날아오르지 않는다. 사방에 체크포인트를 남겨 버리니, 잠깐이라도 바이올린이 다음 음을 기다릴 적에 형성되는 정적 소리가 귓속으로 타고 흘렀다.
낮은 노래를 부를 때에도 소리는 고개를 숙였는데, 희번뜩함이 곳곳에 서려 있다. 가는 길이 상향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려앉는 길이다. 커다랗게 몸집을 키우기 전에 그다음의 고요함을 돋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높게 방점을 두었다가 서서히- 내려오다가, 놀랍도록 조용해지는 때를 따라 주의 깊게 시선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파가니니에서도 공기 소리에 가까운 것의 고즈넉함을 만나 볼 수 있다.
넓은 면을 끝도 없이 앞뒤로 뒤집어 우리 속도 같이 뒤집어 놓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애처롭게- 정확하게는 그런 표정만 지으며- 무대 위를 그야말로 박박 긁어놓을 것이다. 그는 활로 활을 연주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낼 것이다.
그 위에 네 개의 현 위에서 전부 도출될 수 있는 게 맞나 싶은 온갖 째깍임과 물줄기, 종소리, 그리고 듣기 좋은 성깔이 끈질기게 만연할 것이다.
카덴차? 그동안을 생각하면 임동민의 카덴차를 어떻게 해낼 것인가에 대한 기대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가 어떻게 그 순간을 가지고 놀 것인가에 대한 호기로운 궁금증이 더 컸다. 오케스트라도 관중도 숨죽이고 있는 사이에 저를 둘러싼 눈과 귀에 무슨 이야기를 전할 것인가.
사실 말이고 이야기고 나발이고, 쏟아지는 소리 스펙트럼에 정신없어서 혼났다. 절벽 끝까지, 그러니까 정말 추락하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다가 확! 뒤쪽으로 몸을 끌어당겨 놓고는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강으로 풍덩! 하고 빠트려 놓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세이렌의 노래를 강기슭에서 부르는 것이다.
강속구와 일시정지가 절묘하게 혼합되고, 바이올린이 아코디언이 되는 때도 있다. 이게 전자 악기인가? 현 위에서 파편이 튀다가도 갑자기 디바가 나타나 관객에게 이기적인 표정으로 제 소리를 갈구한다. 맨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당신이 이 순간을 당분간은 절대 잊을 수 없게 회오리칠 것이다.
그렇다고 쉬는 때를 놓치지 않는다. 지금 이곳이 얼마나 고요한지 꼭 짚고 넘어갈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살아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상기할 것 아닌가? 붉게 타오르는 얼음꽃이 간들어진 춤을 출 것이다.
아, 그때쯤 알았다. 파가니니라는 곡이, 그 자유를 위해 온전히 호출되고 있구나. 바이올린 하나로 저만큼 자유로워지려면 이 정도의 독주가 필요하겠구나.
무서운 줄도 모르고 달겨들고 지판을 사정없이 괴롭혀 대는데, 아…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카덴차가 끝나고 오케스트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신 브라보를 외쳐 주는 틈에 나도 양손의 검지손가락으로 몰래 박수를 쳤다.
2악장
자-. 그가 잘해낼 것이라 예상했던 구간이 지나고, 이제 그의 표현을 가장 즐겁게 탐색할 수 있는 악장에 도래했다. 그렇다고 첫 음이 다정하다고는 말 못 한다. 우리가 왼쪽 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면 그는 오른쪽 최상단에 위치해서 일단 그늘부터 길쭉하게 그려다 놓는다. 어둠이 드리워진 그 아래로 오케스트라가 먹구름이 되어 줄 것이며, 테너가 등장해 가창을 시작할 것이다.
그는 정장을 갖춰 입고 꽤 체격이 있을 것이며, 오른손을 허공에 뻗은 채로 눈시울이 붉어진 채 숨을 들이키거나, 소리를 새파란 청아함으로 중무장할 것이다. 그에게는 꽤 강한 신념이 있었을 것이고, 제 생각을 마음껏 펼쳐내지 못하는 ‘무언가’를 향한 원망을 담아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멈춰 섬과 아름다움을 잊지 않는다. 파가니니에게 정적을 선물하고, 정적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모두가 입술 위에 손가락 하나를 얹은 사이, 세상이 가만히 그를 기다리는 사이 청록색의 기다란 안부가 찾아온다.
높은 자리에 향할 수 있는 만큼, 충분하리만큼 뒤로 멀찍이 떨어져서 이런 ‘인사’도 있음을 당신에게 선물할 것이다. 바이올린이 차갑게 노래하면, 공기 소리를 활 아래에 담아내면, 어떤 입체감이 전달될 수 있는지.
3악장
지체할 것 없이, 지나온 악장 중에서는 가장 상큼하게! 보다 통! 통! 춤을 추면서! 거칠되 나름의 여유를 들여다 주니 좋았으면서도 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손모양을 구경하기도 바빴다. 색-색- 숨을 내쉬며 새근-새근- 장난을 치다가 아주 잠깐! 고무줄을 늘여다 놓다가, 삐에로가 등장해 끝도 없이 재주를 부릴 것이다.
오로지 손으로! 이 악장에서는 끝이 날 듯 끝이 나지 않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돌아오는데, 바이올린이 화르륵-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후진하는 모습이 아주 절묘하게 간드러져서 웃음이 났다. 또 저렇게 포인트를 주네?
두 번째로 반가운 소리가 돌아올 적에는 소리 끝에 빛선이 달려 있다. 세 번째로 돌아왔을 적에는? 소리에서 나무 향기가 났다. 다르륵- 거리는 효과음이 추가되었음을 눈치채기 전에 멈칫, 바이올린이 멈춘 상태에서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는 그 모습에 또 한 번 불현듯 향이 스쳤다.
오전의 그 아이였다.
가장 안쪽의 현을 괴롭히는, 그러니까 두터운 소리가 입장할 때에는 지금까지 봐왔던 표정 중에서 가장 울적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다음 사람은 어떤가? 그를 딱 위로하는 연약한 실선의 가녀린 입꼬리다. 그다음 사람은? 그들 사이를 질투라도 하는 듯 양껏 광대를 들어 올린 채 그들 사이를 파고들려 애쓴다.
이 악장에서도 한 번씩 찾아오는 정적과 영롱함을 욕심내지 않고, 관객이 딱 끌어당겨질 수 있을 만큼만 고요하게 소리를 작게 뽑아낸다.
이 다채로움을 어떻게 다 받아 적어야 할까. 이날의 파가니니를 채색하려면 꽤 많은 색이 필요했을 것이다.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다뤄지는 소리가 너무 많았는데도 하나하나가 관객 가까이로 정확히 쏟아져 내렸다. 그러니 통제되지 않는 것은 연주가 아니라 내 박동 쪽이었다. 3악장이 끝나기 직전 양옆에서 터져 나온 브라보와 환호성이 아직도 마음 안에 남아 있다.
앙코르 - 에른스트, 슈베르트의 마왕에 의한 그랑 카프리스 Op.26
그래, 파가니니의 불규칙한 박동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슈베르트의 마왕이 등장했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심장이 아직 진정되지 않아서 무엇을 정확히 판단할 새도 없이, 분위기만 끝없이 끌어올려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사람을 들어 올려 놓으려는 걸까. 그러면서도 꼭 한두 번씩은 연약한 목소리를 들여다 놓는다. 악마 같은 파가니니 뒤에 마왕까지 오다니, 이날의 축제는 정말 끝이 없었다.
반복되는 걸음과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바이올린을 보며 그 생각만 반복했다. 바이올린이 입체 음향 필터를 끼고 검은 그림자를 몇 마리나 그려 놓는지 알 수가 없다. 어질어질- 쿵쿵- 어질어질- 쿵쿵..
그러다 목가적인 선율과 그의 중저음으로 단숨에 떠나 버렸다. 미련 없이!
인터미션
잠깐의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블록 3열 끝에 앉아 있는 지인을 찾았다. 우리는 발그레한 얼굴로 눈을 맞추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밖으로 향하는 줄에 함께 서서 만족스러운 탄식을 나누며 로비로 향했다.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반짝-반짝 얘기하기도 전에 우리는 아예 음악당 밖으로 뛰쳐나가 “아 이거지!” 하고 광장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아- 정말 너무 신이 났다! 이게 축제죠! 아 진짜, 이거지! 행복이 만개했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8번 G장조 Op.88
1악장
파가니니와 마왕의 활약 덕에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뚫어져라 무대 위를 응시하고 있던 때를 지나 이때는 관객석 1열 눈앞에 있는 무대 단차면의 나무줄기만 줄기차게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너무 높게 날아와서 그런지, 이제는 그냥- 포항시향에게 알아서 맡겨 버리고 듣기만 하고 싶었다.
앞선 곡으로 귀를 완전히 틔워 놓은 상태로 현악이 물결치고 내려올 때에도, 관악이 얇은 장막을 형성할 때에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품 안에서 무슨 복잡한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눈을 내리깐 채 그냥 듣고 또 들었다. 몸을 움크린 채 한 떨기의 이파리가 될 때에도, 사기가 잔뜩 오른 채 합을 맞춰 나가는 이들의 움직임을 귀로 음미했다. 그러다 보면 옆에서 바람이 살랑- 살랑- 같이 불어온다.
확실히 리허설 때와는 다른 크기, 본 게임에 임하는 그들의 확실한 움직임이 알아서 관객을 리드했다. 앞쪽에 앉으면 오케스트라의 합을 제대로 못 하겠지 싶었는데, 전혀. 나는 폭풍의 눈 한가운데 갇혀 있었다. 아- 1악장이 이렇게 개운하고 신명 나도 되는 건가? 된다!
2악장
이곳까지 다가오는 ‘서정’의 밀려듦, 저마다 다른 부드러움을 들여다 놓는 조그마한 지저귐. 일자 형태의 모여듦. 관악기가 아롱다롱 하늘에 놓여지고, 현악기가 보기 좋은 웃음을 짓고, 제1바이올린이 노래를 부르고, 포항시향의 소리가 이 앞까지 쏟아진다.
관악기 하나가 평화를 말할 때는 또 어떤가? 작게나마 응해내는 악기들의 대답을 같이 음미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단순하지만도 않다. 비애를 들여다 놓기도 할 것이며, 웃다가도 멈춰 서서 정색한 채로 끝을 확실히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길을 바른 목적지로 이끌어야 하지 않은가. 다 이를 위해서겠다.
그 생각을 하면 쉽게 떠나보낼 수 없다.
3악장
이렇게 물 흐르듯 3악장으로 넘어와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른 때보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워낙 알아서 잘해주니까 그냥 물길이 흐르는 곳을 따라갔을 뿐인데, 시야에 담겨지는 숲 사이를 지났을 뿐인데 이곳에 도래했다.
드넓은 일렁임을 따라, 혹은 선발대의 깃발을 기쁘게 응시하며 눈을 감은 채 드보르자크의 길을 함께 걸었다. 이제는 가만- 그냥 풀숲 안에서 숨어 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4악장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고 기상 나팔을 불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 들어도 누군가의 핸드폰 진동 소리만 같은 저 관악기의 소리를 붙잡으며 나머지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악장 안에 있으니 밑바닥을 감싸 안아주기도 하는구나.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발견하지 못한 영역까지 꽉꽉 부족함 없이 화음으로 메꿔졌다.
콘서트홀이 풍성하다 못해 풍족해지는 순간이다. 하이라이트의 하이라이트를 제대로 장식해 낸다.
이별이 찾아오기 전의 얼굴은 어떤가? 곧 찾아올 축제의 마지막을 그리는 표정은 어떤가? 울적한 기분을 앞세우기보다 고개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릴 줄 아는 자의 성숙한 미소가 온온하게 자리했다.
그러다 번뜩!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끝도 없이 가지를 자라게 하는 나무를 뻗쳐 내며, 울창한 잎사귀와 함께 끝을 냈다. 아- 그야말로 드보르자크. 드보르자크다.
앙코르 - 드보르자크, 슬라브 무곡 제8번 g단조 Op.46-8
정말- 8일의 축제의 종결을 알리는 완벽한 이별송이겠다. 연주가들에겐 신나는 퇴근송이기도 하겠지? 앙코르에서 만나는 곡에선 은근한 마지막의 흥이 곁들여져 있어 듣는 이들도 마냥 즐길 수 있어 좋다.
그래서 나도 그냥! 즐겼다. 화려한 대미를! 아, 그리고 또 들었다! 뒤편의 ‘브라보’를! 이번 교향악 축제는 어째 브라보가 아닌 날이 없다.
오후 9시 40분
로비로 향하는 문으로 터덜- 터덜- 계단을 올랐다. 다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파가니니로 저 성층권까지 비행을 했다가 드보르자크로 수평선을 누볐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시 만난 동행의 얼굴에도 기 빨린 기색이 역력했다. “흐흐..” 할 말이 없으니 그냥 또다시 웃어버리면서 푸념했다. “후기 대신 써주세요. 안 햇!”
공연이 끝나고, 오늘의 바이올린에게 단골 질문은 여쭤보았다. “오늘 어떤 악장이 가장 마음에 드셨나요?” 이 질문은 늘 상투적인 것 같으면서도, 당장 그 순간을 가장 크게 살아내는 연주자 본인의 생각이 이상하리만큼 자주 궁금해졌다.
그의 대답은 ‘3악장’이었고, 나는 그 대답에 완전히 긍정하진 못했다. 내 마음은 1, 2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예습했던 버전보다, 머릿속으로 ‘이렇지 않을까?’ 하는 기대치보다 정말 많은 감정이, 하얀 마음보단 꾹-꾹- 내재된 감정 뭉치가 그 두 악장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파가니니를 이렇게까지 묘사할 수 있구나. 내가 그의 연주를 들으면 글이 길어지는 데에는 다 이곳에 이유가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의도되지 않은 곳이 없다. 이유 없이 쉬어 가지 않는다.
남부터미널역으로 향하는 길, 춥지도 덥지도 않았던 그 밤. 니스칠한 나무 서랍, 앉는 면이 많이 갈라진 선홍색 가죽 소파, 주황과 노란빛이 적절히 섞여 든 향이 났다. 다시 한번 머리를 도리-도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