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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다시 찾은 대성당 [도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by 최승윤 에디터
2026.08.0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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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내가 카버의 소설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힘겹게 책장을 넘겼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독자의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등장하는 인물, 그리고 사물과 상황들 속의 상징이나 의미를 고려해 보지 않고 그저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카버의 소설을 반도 읽었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건의 발생, 이야기의 시작과 끝맺음 역시 중요하지만 그의 서술 방식에서는 인물 간의 행동과 묘사를 중점적으로 바라보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가는 쪽에 재미를 두는 것이 좋다. 또한 이것을 통해 인물들의 상황과 삶을 짐작하고 이후에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거듭 예상해 볼 수도 있었다.

 

카버의 소설에는 독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기서 독자의 역할은 주어진 정보값, 묘사들이 어떤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어떤 메시지로 가 닿는가, 사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품이 많이 들었다. 과거의 독서 경험이 실패한 이유는 이러한 사유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문장을 읽기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카버의 소설 첫 문장에서는 등장하는 인물, 그 인물이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무엇을 행위하는지 필요한 정보가 압축적으로 들어있다. 첫 문장에서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근거리의 문단 안에서 어떤 인물과 에피소드에 집중하면 좋을지 알 수 있다. 때문에 허투루 읽을 문장이 없었고, 그 어떤 문장이라도 이유가 존재했다. 그 이유들을 나의 시선으로 해석해 보면서 읽어 나가고 그 의미가 점차 증폭되어 가는 재미가 있었다. 나에게는 소설보다 시가 늘 더 친숙했고 소설을 읽을 때는 나열되는 이야기가 총체적으로 어떻게 한 주제로 모아지게 될까에 초점을 맞추어 읽다 보니 카버의 소설이 어렵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등장하는 모든 문장과 사물에서 상징과 의미를 찾고 짐작해 보며 글을 읽다보니 비로소 소설의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의심이 들었다. 내가 오늘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과연 그 행위에 충족될 만한 감각들이었을까. 어쩌면 한 기능을 상실한 사람이야말로 그 기능의 전문가가 아닐까 싶다. 대성당 속의 맹인은 우리가 맹인하면 떠올렸을 법한 이미지 속의 안경을 끼고 있지도 않고, 나이프와 칼을 능숙하게 다루고, 컬러텔레비전과 흑백티브이를 소리만으로 구분할 줄 안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로버트’라는 그의 이름 대신 ‘맹인’이라는 지칭은 그가 시각을 잃은 사람임을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준다고 느꼈다.) 그리고 맹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나’는 주변에 맹인인 사람이 없어 대우에 미숙하고, 때문에 무례하게 굴기도 한다. 이러한 둘의 만남은 인상적인 대화를 낳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머릿속에 기억을 저장하는 일은 일종의 배움이 아닐까생각한다. 설명을 듣고 그 설명을 따라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 넣어 저장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보고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과 달리 맹인은 볼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잘 볼 수 있고, 그 볼 수 있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개인적인 경험을 투입시키자면 과거의 나는 약 이 년간 후각 기능의 이상을 겪었다. 그리고 여전히 완벽히 후각이 돌아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원인을 알 수 없어 그저 몇 년에 걸쳐 호전되는 증상을 몸소 체감하며 (감각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감각을 상실해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난생처음 느껴졌던 이상한 냄새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바나나의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 바나나의 맛을 설명하려고 어려운 것처럼, 대성당을 설명하기 위해 대성당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기본적인 대성당에 대한 지식 없이는 설명하기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러면 이쯤에서 나는 그 기능을 진실로 행위한 적이 있는가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내가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분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성당을 짓는데 한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 역시 이 소설에서 관통하고 있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언가 인생을 바쳐 몰두하지만 결국 그 결실은 보지 못하고 삶을 끝맺는 이야기로 그 공감대를 이야기할 수 있고, 맹인에게는 이것이 먼저 떠나버린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카버의 단편집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띄었던 것은 ‘부부’라는 존재의 등장과 이들 사이의 갈등, 이것에서 느낄 수 있는 공허한 정서다. 기본적으로 이들 사이는 그렇게 살가운 편이 아닌데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하는 ‘깃털들’에서 특히 두 부부 간의 차이를 느끼며 글을 읽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사실 '깃털들'을 인상적으로 꼽은 이유는 재미와 메시지다. 비록 버드의 구박을 받지만 공작은 올라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리고 올라의 못생긴 치형은 과거로부터 계속변화의 상징이며 이후 올라의 아기가 얼마나 충격적으로 못생겼을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재미 요소를 준다.

 

프랜에게 있어서 놀라운 변화는 절대로 자르지 않을 것 같았던 머리카락(외적인 미)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이 부부의 관계가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이런 시기를 거치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결국 변화의 과정을 말하고 나는 거기서 위로를 얻었다. 내가 얼마나 못생긴 마음을 가지고 고통스러워하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새로운 해는 또 뜨기 마련이다. 언제 뽑혔는지도 모르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그리고 또 새롭게 자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깃털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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