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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신의 육화와 인간의 성화 - 욕망하는 중세 [도서/문학]

프로토 르네상스의 종교미술에 나타난 신성과 인간성의 변화

by 김한비 에디터
2026.09.1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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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기, "욕망하는 중세", 사회평론, 2013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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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신을 중심에 두는 중세 미술과 인간을 중심에 두는 르네상스 미술은 꽤 선명하게 대비된다. 우선 중세 미술에서의 핵심은 신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하느냐보다, 그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이런 목적 하에 그려진 그림 속 인물들의 몸에는 양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인물의 크기는 현실적인 비례보다 중요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상징적인 표현들 아래에서 반복되는 자세가 나타나고, 배경에는 우리가 실제로 발을 딛고 서 있는 듯한 공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르네상스에 이르면 그림 속 인간은 조금씩 달라진다. 인체에는 무게와 부피가 생기고, 인물들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배경에는 깊이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고, 옷주름은 몸의 움직임을 따라 흐른다. 얼굴에는 감정이 나타나고, 인간은 더 이상 상징을 전달하기 위한 평면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표현된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전환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 놓인 13-14세기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르네상스의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 말의 종교 미술 안에서 이미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욕망하는 중세』는 미술사에서 흔히 프로토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13-14세기를 통해, 중세의 종교 미술이 어떻게 조금씩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처럼 보이지만 이 차이들이 모이면 결국 하나의 커다란 변화가 된다. 신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던 그림이 조금씩 인간의 몸과 감정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심판자 예수에서 고통받는 인간 예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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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십자형 패널>, 1200-1230년경 / (우) 준타 피사노, <십자형 패널>, 1230-1250년경

       

       

      예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13세기 초의 십자가 그림을 보면 조금 다르다. 좌측의 도판을 참고하면, 당시의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마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은 크게 뜨고 있고, 얼굴에는 극심한 고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당하는 인간이라기보다 죽음마저 초월한 승리자이자 심판자에 가깝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예수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측 준타 피사노의 십자형 패널을 보면 예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고,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전보다 신체의 양감이 강조되고, 배와 가슴 등의 표현에서도 해부학적인 관심이 조금씩 나타난다. 옷주름도 더 실제적인 형태를 갖기 시작한다.

       

      또한 이전의 십자형 패널에서는 예수의 팔 양쪽 아래에 수난과 부활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통해 교리와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점차 이런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대각선 무늬가 그 자리 대체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도상 중에서 마리아와 요한만이 양팔 끝에 남아있는 모습이다. 이는 예수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몸 자체를 더 강조하고 있다.

       

      즉,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그림에서 그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느끼게 하는 그림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변화에는 당시 사회와 종교의 변화가 함께 작용했다. 상공업의 발달과 코무네 정치체제의 성장으로 현실적인 사고방식이 확산되었고, 무엇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탁발수도회의 등장은 종교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다.

       

      성 프란체스코는 중세 말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종교개혁자이다. 예수상을 기도에 사용하고, 그 형상에서 예수의 고통을 공감하려 했다. 그의 태도는 십자형 채색 패널의 '심판자 예수' 형상이 '고통받은 예수'로 변화하는 데 일조했다.


       
       

      성 프란체스코, ‘제2의 예수’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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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체스코와 평생도, 13세기 전반

       

       

      이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인물이 성 프란체스코다. 이탈리아 미술에서 르네상스의 초석을 마련한 중세 말의 인물로 흔히 성 프란체스코, 단테, 조토를 함께 이야기한다. 성 프란체스코는 종교를 좀 더 현실적인 삶의 영역으로 가져온 인물이다.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의 속어로 설교하고,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한 삶을 직접 실천했다. 그를 따르는 탁발수도회의 운동도 이탈리아를 비롯해 널리 퍼졌다.

       

      흥미로운 것은 사후에 그의 초상은 그를 성인화하고자 했던 교단의 목적에 따라 성스러운 이미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성장하면서 그의 이미지는 교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의 실제 모습을 재현하기보다는 ‘성인 프란체스코’라는 이상적인 도상으로 고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생애를 다룬 그림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다. 초기의 제단화에서는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관한 여러 일화가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장면들은 줄어들고, 그가 진정한 성인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적들이 선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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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조토, <성 프란체스코 제단화> (오상의 기적), 1300년경 / (우) 조토, <새에게의 설교>, 1290-1300년경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오상의 기적이다. 프란체스코가 기도하던 중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입은 상처가 자신의 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매우 강렬하다. 예수의 상처가 인간 프란체스코의 몸으로 옮겨온다. 신의 고통을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유명한 장면이 ‘새에게의 설교’다. 프란체스코가 새들에게 설교하자 새들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는 기적이다. 그런데 책에서 소개하는 이 장면의 변화가 재미있다. 초기 기록에서는 까마귀, 독수리, 까치처럼 다양한 새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인간들에게 설교하기보다 동물들에게 설교하겠다는 분노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토의 그림에서는 새들이 평화로운 비둘기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조금씩 순화되고, 분노와 갈등의 이야기가 평화로운 전교의 이야기로 변한다. 성 프란체스코의 실제 모습과 삶은 이렇게 교단의 목적에 맞는 성인의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성 프란체스코가 미술의 방향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예수의 형상에서 실제 예수를 느끼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물질과 현상을 낮게 보고 정신과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중세의 미적 태도에 균열을 낸다. 신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인간의 몸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선의 변화가 회화에도 들어온다.

       

       

       

      승리자를 낳은 사람에서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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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에스트로 디 트레사, <눈이 큰 성모>, 13세기 초

       

       

      마리아의 변화 역시 흥미롭다. 초기 마리아 도상에서 그녀는 독립적인 한 인간이라기보다 예수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임을 보여주는 장치 역할을 했다. 비잔티움에서 유래한 ‘신을 낳은 사람’ 유형의 성모자상에서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정면을 바라본다. 아기 예수는 실제 아기라기보다 성인의 축소판처럼 보이고, 마리아의 옷주름은 규칙적인 선으로 표현된다. 공간감이나 인체의 양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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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멜론 마돈나>, 13세기 / (중) 두초 디 부온인세냐, <루첼라이 마돈나>, 1285 / (우) 조토, <모든 성인의 마돈나>, 1310

       

       

      그런데 13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마리아는 점차 달라진다. 두초의 <루첼라이 마돈나>에서는 마리아의 자세가 조금 더 자연스러워지고, 아기 예수 역시 이전의 ‘작은 어른’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 실제 어린아이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조토의 <모든 성인의 마돈나>에 이르면 변화는 훨씬 뚜렷해진다. 마리아의 몸에는 양감이 생기고, 옷은 단순한 평면의 무늬가 아니라 몸의 덩어리를 따라 흐르는 천처럼 표현된다. 옥좌 주변에 서 있는 성인들도 모두 같은 평면 위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위치에 따라 서로 가려진다.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림 속 인간도 이제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를 가진 몸이 된다. 이것이 훗날 르네상스 회화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사실성과 공간감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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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로 디 세냐, <자비로운 마리아>, 1331-1345년경

       
       
      한편,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에서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 되고, 마리아의 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리아는 점점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바닥에 앉아 있는 '겸손한 마리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젖먹이는 마리아', 그의 망토 아래 사람들을 감싸는 '자비로운 마리아' 같은 도상이 등장한다.
       
      특히 자비로운 마리아는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구원자의 모습을 제공한다. 엄격하고 멀리 있는 신 대신, 인간의 사정을 이해하고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를 원하는 것이다. 결국 마리아는 더 이상 단순히 예수를 설명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과 신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가 된다.
       

      이 역시 당시 사회의 인간 중심적인 요구와 관련되어 있다고 책은 설명한다.




      르네상스의 등장


       

      그래서 르네상스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예수, 프란체스코, 마리아 등을 그린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르네상스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진다. 우리는 르네상스를 흔히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발견한 시대’라고 배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그 사이에 잠재적인 변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신성한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 신성한 존재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몸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보고 싶어 했다. 화가들은 인물의 몸에 양감을 부여하고, 공간에 깊이를 만들고, 얼굴과 몸짓에 감정을 넣었다. 르네상스는 이미 중세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책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욕망하는 중세』.

       

      중세 말의 사람들이 욕망한 것은 단순히 더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신성한 존재를 더 가까이 느끼고 싶었다. 고통받는 예수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신의 삶을 인간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싶었으며, 멀리 있는 성모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마리아를 원했다. 그리고 그 욕망이 그림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술의 역사는 새로운 양식이 낡은 양식을 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 했는지가 끊임없이 바뀌어온 역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미술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 왜 하필 지금 이 사람이 이것을 그렸을까? 왜 지금 우리는 이 모습의 인간을 보고 싶어 하는가? 지금의 예술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뒤에는 어떤 욕망이 숨어 있을까?

       

      이제는 그림을 볼 때, '무엇'을 그렸는지만큼이나 '왜' 그것을 그리고 싶었는가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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