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아닌 '우리'를 위한 투쟁
우리는 일을 하고 그에 대한 임금을 받으며, 정해진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보장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가 처음부터 당연하게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권리의 뒤에는 자신의 삶과 생계를 걸고 싸웠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시간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남과 북』은 바로 그 노동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1854년부터 1855년까지 찰스 디킨스가 편집한 잡지 『Household Words』에 연재된 이 소설은 185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작품의 무대인 가상의 산업도시 밀턴을 배경으로 공장주와 노동자,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남부와 북부’의 지리적 차이가 아니다. 남부의 목가적인 생활과 북부의 산업도시가 대비되고, 그와 함께 서로 다른 계층과 가치관이 충돌한다. 주인공 마거릿 헤일은 아버지를 따라 남부의 헬스톤에서 산업도시 밀턴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북부의 공장주 존 손턴과 노동자 니컬러스 히긴스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 마거릿은 손턴을 오만하고 냉정한 자본가로 바라보고,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밀턴의 모습에도 낯섦과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노동자와 자본가를 직접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니컬러스 히긴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노동조합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해 파업에 참여한다. 당시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스스로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히긴스의 가족은 그 대가를 고스란히 감당한다. 첫 파업 당시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소면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딸 베시는 보풀 먼지를 마시며 폐병에 걸린다.
“어머, 아빠!” 베시가 말했다. “파업해서 얻은 게 뭐가 있어요? 첫 파업 때 엄마가 돌아가셨던 걸 생각해보세요. 우리 모두가 얼마나 쫄쫄 굶어야 했는지. 아빠가 제일 고생했죠. 그렇지만 많은 인부가 예전 임금을 받으며 매주 일터로 돌아갔고, 결국은 일이 있는 데로 다들 돌아갔잖아요.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그 뒤 구걸하는 신세가 됐죠.”
"엄마 돌아가시고 바로 소면실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폐에 쌓이는 보풀 때문에 폐병에 걸려버렸죠. (…) 소면 작업할 때 면화에서 날리는 아주 작은 건데, 온통 뽀얀 먼지처럼 사방에 가득 차요. 그게 폐 주위를 싸고 돌면서 폐를 조여버린대요. 어쨌든 많은 사람이 소면실에서 작업하다가 기침하고 각혈하면서 말라가요. 보풀 때문에 폐병에 걸려버린 거죠."
이 장면에서 파업은 이상적인 투쟁의 모습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권리를 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장 오늘 먹을 빵을 잃을 수도 있다. 노동자의 투쟁은 언제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히긴스가 파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번 파업이 나 혼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오? (…) 난 이웃 때문에, 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아내와 아무도 일할 나이가 안 된 여덟 아이가 있는 존 바우처 때문에 이러는 거요. (…) 꼭 그자 때문만은 아니고, 정의를 생각해서요. 물어봅시다. 어째서 이제 우리가 2년 전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 거요?”
히긴스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가 아니라 ‘우리’다. 그는 자신의 임금을 위해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병든 아내와 어린아이를 둔 존 바우처와 같은 동료 노동자를 위해 싸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의와 공정한 경기’를 이야기한다. 노동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의 싸움을 확장하는 것이다.
결국 『남과 북』이 보여주는 것은 ‘노동자는 옳고 자본가는 틀렸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개스켈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갈등이 얼마나 커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서로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관계가 달라질 가능성도 보여준다. 손턴은 히긴스와의 솔직한 소통을 통해 노동자들을 단순한 생산수단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공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개스켈이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폭력적인 계급투쟁보다는 서로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대화하는 데 가까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히긴스가 자신의 삶이 위험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왜 싸우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그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싸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19세기 영국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노동자의 외침
1995년 발표된 신경숙의 『외딴방』은 1970-80년대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업화 시대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다. 열여섯 살의 ‘나’는 고향을 떠나 공장에 취직하고,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며 일과 학업을 병행한다. 공장과 학교 사이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은 산업화라는 거대한 변화가 실제로 누구의 몸과 시간 위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외딴방』 속 노동자들은 단순히 공장에서 일하는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환경을 문제 삼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유채옥도 생산과장과 똑같은 어투로 외친다. 우리가 기계인가? 왜 우리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가? 닷새 동안 계속 이어지는 잔업에 코피가 터져 집으로 돌아간 미스 최에게 사직서를 쓰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유채옥은 계속 외친다. “우리의 권익을 위해 노동법에 따라 결성한 노조다. 회사에서 아무리 방해를 해도 우리는 결성식을 갖겠다.”
『남과 북』에 이어서 『외딴방』에서도 반복되는 질문은 “우리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노동자가 단순히 생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감정, 삶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외침이다. 시대도, 국가도, 노동환경도 다르지만 두 작품의 노동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오늘까지도 지속되는 노동운동
땅 위에 발 디딜 틈이 없어 하늘로 올라가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때, 노동자들은 크레인과 굴뚝, 송전탑과 같은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고공농성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시위를 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요구가 외면당한 사람들이 자신의 몸 자체를 하나의 목소리로 만드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례는 2011년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이어간 김진숙의 투쟁이다. 임흥순의 <위로공단>(2015)에 담긴 인터뷰에서 김진숙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는 내 삶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어요. (…) 사람들이 ‘크레인에 내려가면 뭐가 제일 하고 싶어서 이래’ 묻는데, 목욕을 한번 하고 싶고 그 다음에는 그냥 내가 선택해서 한번 살고 싶어.”
이 말은 노동자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정확하게 보여준다. 노동자가 원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은 돈이 아닐 수 있다. 해고되지 않을 권리, 안전하게 일할 권리,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고용승계를 요구하거나,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가 제대로 시행되기를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뉴스 한 줄 뒤에는 수개월, 때로는 수백 일 동안 자신의 삶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 존재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자의 권리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 세대의 노동자들이 일궈낸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기억했으면 한다. 여전히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목소리를 내도 쉽게 들리지 않는 사람들,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지만 우리의 관심에서는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과거의 노동자들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연대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누군가는 하늘 위에 있다.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