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개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을 건네 받은 적이 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 받고 천재라는 이명을 얻는 경우도 있다면, 늦깎이 예술가로 뒤늦게 발견되어 그 성숙한 깊이감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반 고흐처럼 평생 무명의 삶을 살다가 사후에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되는 케이스도 있다. 언제 개화의 시기가 올지 모르니 묵묵히 결심한 길을 걷는 수밖에 없다는, 나름의 위로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이 말의 어폐가 있다고 느껴왔다. 예술가들은 본인에게 예술가라는 이름을 허락한 후부터 언제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개화의 상태를 유지한다. 다만 누구에게 언제 발견되느냐가 항상 문제이다. 운명적인 발견의 순간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어떻게, 언제, 누구에게 발견되느냐에 따라서도 예술가의 삶의 궤도가 바뀐다. 곤란한 건 이 발견의 랑데부가 반드시 예술가 개인 창조력에만 달려있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제는 발견당하기 위한 모든 노력과 꼼수마저 예술가의 역량으로 떠오른 시대이다. 다만 본인은 그것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패배감에, 그 과정에 지쳐 예술가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떼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해온 시간이 길다.
그러다 이 사유에 여러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을 만났다.
여기, 젊은 시절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 '에드 색스버그'가 있다. 해당 시집이 그렇다 할 명성을 가져다주진 못했는지 그는 이후 시로부터 천천히 멀어졌고 노년이 된 지금은 우체국에서 우편물 분류 작업을 하는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간다. 일이 끝나면 오랜 지인들이 모인 펍에서 당구 한 판을 하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시덥잖은 얘기들을 나누는 그 반복적인 삶에는 어떤 특별한 시어도, 시상도 끼어들지 못할 만큼 지독한 평범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늦깎이 시인의 삶에 다시 불을 지피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 무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고풍스러운 옷차림의 신사, '마이어스'는 에드의 집까지 찾아와 그의 팬을 자처한다. 자신이 속한 예술가 모임에서 그의 시집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를 경계하던 에드도 뒤늦게 피어오른 가능성에 마음을 뺏기고 그들 모임 '열의의 사회'의 일원이 된다.
이삼십대의 젊은 예술가들로 구성된 '열의의 사회'는 그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가치관을 공유한다. 그들은 기술 발달을 혐오하고 예술가의 대중성 추구를 비겁한 타협이라 여기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고전 문학가들에게 깊이 탐독한 듯 보이고, 현대 예술가들의 게으름과 나이브함을 비웃으며 일종의 예술혁명을 꿈꾸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에드의 시를 찬양하며 과거 그가 활동했던 때의 이야기를 궁금해 한다. 자신에게 마이크를 쥐여주는, 자신을 금세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이 젊은이들에게 에드는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다. 이후 그들이 주최하는 낭독회에서 신작을 발표하자는 제안에 동의하게 된다.
뒤늦게 자신의 꽃을 발견해준 이들의 등장에 들떠 있으면서도, 에드는 자꾸만 위화감을 느낀다. 열의의 사회 멤버들은 서로 어떤 생업에 종사 중인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과거를 갖고 있는지는 알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공통된 가치가 중요하다 여기면서도 이 무형의 가치는 모두가 함께 올라서기에는 너무 가변적이고 유약해 보인다. 대중성을 쫓는 것을 비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대중의 존재를 고파하기도 한다. 내 꽃을 발견해줄 사람, 발견해줄 타이밍을 사실은 너무나 바라면서도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쉽게 빠져버린다.
그 일례로 나온 에피소드 중, 에드가 마이어스의 소개로 출판사를 찾아간 씬이 있다. 해당 미팅에서 에드는 이들이 자신이 쓴 시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고, 그의 삶과 배경을 입맛에 맞게 재해석해 대중적으로 어필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젊은 대표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면 대필 작가를 붙여주겠다며, 사실 이곳은 출판사보다도 인플루언서들을 다루는 회사임을 밝힌다.
에드가 시인으로 활동하던 때와 다르게 이제는 억지로라도 발견당하기 위해 예술가라는 캐릭터를 창조하고 조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발견당하기 위한 무자비한 수단들을 얼마나 잘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역량이 예술가의 필수 소양으로 꼽히는 시대. 에드는 자신이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조작되고 재해석될 비참한 예술가의 표상으로서 불려온 것임을 깨닫는다.
동시에 시의 세계로부터 너무 멀어져버린 에드는 단 한 자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발견당함'에 들떠 날 알아봐주는 이들의 존재만 있다면 창조력이 샘솟을 거라고 믿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발견당한 순간부터 그와 조응하지 못하는 깊게 뿌리내린 자기 의심, 그리고 부담감에 더 이상 창조하지 못하는 예술가들도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작은 반전이 드러난다. 모임에서 가장 어린 멤버이자 시인으로서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 중인 윈은 에드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진짜 시인'인 에드의 솔직한 의견이 해답이 되어줄 거라 굳게 믿는 듯 하다. 에드가 '진짜 내 시를 읽어보긴 했냐'고 묻자, 윈은 당황하며 마이어스가 멤버들에게 끝까지 에드의 시집을 넘겨주지 않았다며 읽어볼 기회조차 없었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한다. '당신이 내 시를 읽지 않았으니, 나도 읽지 않겠다'는 말로 돌아선 에드의 얼굴에는 절망감보다도 예상한 것이 들어 맞았을 때의 허무함이 자리하고 있다. '발견당했다'는 기쁨은 허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허무함만을 개탄하며 끝나지는 않는다. 에드가 열의의 사회에 더 큰 애정을 갖게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글로리아'이다. 유일한 여성 멤버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하고, 매력적인 외모에 항상 연극적인 대사와 행동으로 사람을 홀려 놓는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 글로리아의 집을 찾아간 에드는 분장도 대사도 박탈당한 현실의 인간 글로리아를 마주한다. 그러나 마지막 낭독회에서 보여준 글로리아의 무대와 자신의 가치를 넓히기 위해 새로운 기회를 잡는 그의 결말을 보며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목도하게 된다.
누군가는 글로리아를 스스로를 속이고 거짓된 삶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허풍쟁이라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반대로 구질구질한 현실의 삶에 갇혀 굴복하지 않고 예술과 자기 표현이라는 영역으로 자신을 확장한 인물이다. 다른 열의의 사회 멤버들처럼 어설픈 연기를 하는 대신, 자신마저 믿게 할 완벽한 연기를 해낸 진정한 배우이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에게 맨얼굴을 들키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예술가적 정체성을 지켜가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간다. 누군가에게 발견당하는 예술가이자 누군가를 발견하는 예술가의 뮤즈로 살아가겠다는 듯. 타인에게 발견당하기 전에 자신의 안에 도사린, 아주 작고 볼품없는 사적인 예술가를 발견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야 타인의 발견당함 속에서도 묵묵히 견뎌나갈 수 있다. 글로리아처럼 말이다.
무려 마틴 스콜세이지가 총괄 제작에 참여했고, 세계적 영화 비평지에서 평론가로 활동하며 영화적 지평을 넓혀온 켄트 존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9월 23일부터 상영된다. 가을과 꼭 어울리는 영화인 만큼 극장에서 그 진수를 느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