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이기심에서 시작해 이타심으로 끝난다.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들의 지도층은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며 죄 없는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잔인하도록 이기적인 행태다. 권력 다툼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들의 목숨은 안전하고, 전쟁터에 나가거나 폭력을 피해 살아남아야 하는 힘 없는 개인들은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공포에 떨어야 한다.
전쟁이 일상이 되는 순간 약자들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이타심을 발휘하는 이들 덕분에 인류애는 고귀하게 빛난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건다. 끔찍한 전쟁의 역사는 반복됐지만,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택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기에 인류는 끈질기게 생존할 수 있었다. 이기심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이타심이 결국 인간을 살려낸 것이다.
뮤지컬 <남벌>이 10월 23일 서울 티켓링크 1975 씨어터에서 개막했다. 11월 14일까지 공연되는 작품은, 이현세 작가의 메가 히트작인 <남벌>을 원작으로 했다. 1993년 7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만화 <남벌>은 단행본 누적 판매 100만 부 돌파를 기록한 메가 히트작이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 상징인 만화 <남벌>은 중동발 에너지 위기와 자원 전쟁, 교전국 국민의 강제 수용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뤘다. 동시에 전쟁을 돌파하는 개인의 서사를 몰입감 있게 전개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국 만화 대중화를 주도한 거장 이현세 작가의 만화 <남벌>은 작가 측의 제안으로 2022년부터 뮤지컬화가 논의됐다. 4년의 개발 과정을 거쳐 2026년 ‘대형 뮤지컬 시범공연 지원사업’에 선정된 이종훈 극작·연출 뮤지컬 <남벌>은, 9권에 걸친 방대한 서사를 160분 분량의 무대로 펼쳐냈다.
1막은 수용소에서 고통받는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과 주인공 오혜성·엄지·카오루의 서사를 전개한다. 2막은 한일 전쟁 상황에서 엇갈린 오혜성과 엄지의 끈질긴 생존 의지, 카오루의 뒤틀린 집착, 갈등의 봉합과 재회를 보여주며 전쟁과 인간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태어나 처음’, ‘그림자’, ‘두려워하라’, ‘나침반’ 등 드라마틱한 선율과 록 밴드 사운드로 채운 25곡의 넘버는 뮤지컬의 본질인 음악성을 풍성하게 구현했다. 또한 이현세 작가의 딸이자 연극 <두 교황>,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사랑의 불시착> 등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해 온 이엄지의 무대 디자인, 고동욱 영상 디자이너가 탄생시킨 무대 미장센은 만화에선 종이와 흑백으로 펼쳐졌던 세계를 입체와 움직임, 색채, 빛으로 재구성했다.
6개월의 스터디와 조사를 거친 후 4개월 간의 집필 과정 끝에 탄생한 뮤지컬 <남벌>은 이처럼 최고의 제작진들이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수많은 이들의 진심과 노력이 투입된 게 느껴지는 작품의 세계관과 서사는 방대하다. 대규모 탈출과 첩보 작전, 국가 간의 전쟁, 왜곡된 역사관 바로잡기 등 극 안에서 다루는 소재와 담론도 거대하다.
하지만 원작을 접하지 못한 경우, 뮤지컬에서 설명이 이뤄지지 않고 전개되는 부분의 개연성까지 완벽하게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음향에 대사가 묻힌다거나, 극 이해에 필수적인 요소들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곳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창작자는 작품 바깥 세계(전사)까지도 속속들이 이해하고 연구하며 작품을 만들지만, 관객은 극에서 드러난 정보만을 기반으로 상황을 이해하며 내용을 따라가야 한다.
그럼에도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는 보편적이고 직관적이기에, 인물들의 생각과 마음에 집중하면 <남벌> 세계관에 푹 빠져들 수 있다. 부당한 일에 저항하며,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굳건한 마음을 지닌 인물들이 극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 혜성·엄지·카오루의 감정선과 캐릭터성 또한 매우 선명해 극의 큰 흐름을 따라가는 덴 무리가 없다.
작품은 인물의 감정들뿐 아니라 극 전반을 지배하는 애국심에서도 보편성을 확보했다. <남벌>은 반일 정서가 강한 작품이다. 한국인들은 교전국 국민 보호라는 명목 아래 끌려간 수용소에서 일본 측으로부터 지옥 같은 탄압을 받고, 자위대 핵심 인물인 카오루는 개인적 증오까지 담아 혜성과 엄지에게 집착한다. 극 중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번지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다.
작품 제목이자 수용소에 갇힌 한국 국민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 이름 ‘남벌(南伐)’은 남쪽을 정벌한다는 뜻이다. 효종의 북벌(병자호란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한 청나라 정벌 계획)을 기리려는 뜻에서 탄생한 ‘남벌’은 전쟁 의지를 집약한 작전명이기도 하다. 작품은 일본에 위안부 문제 공식 사과 요구, 독도와 동해의 소유권을 강력히 주장하는 직접적인 대사들을 후반부에 삽입하기도 했다.
원작 집필 시기와 현재를 비교하면, 일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역사의 비극은 민족의 아픔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한류 열풍 이후 문화 콘텐츠 시장에서 일본인들을 목표로 한 마케팅이 오랫동안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공연계도 마찬가지다. 객석을 채우는 외국인 관객 중 일본 관객의 비중은 여전히 크다.
그 와중 뮤지컬 <남벌>은 신념 있는 선택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민족의 고통을 잊지 말자는 선명한 주제 의식을 내세웠다. 시대가 변하고 글로벌 관객이 많아질수록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원작자 이현세 작가는 ‘세상에 쉽게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들, 상처받고 넘어져도 자신이 지키려는 것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을 그려왔다’라며 ‘이번 작품에도 창작진과 배우들이 생각하는 오늘의 이야기가 담기길 바란다’라고 뮤지컬 <남벌> 프로그램 북 인터뷰에서 뜻을 밝힌 바 있다. 그의 말처럼 <남벌>은 원작이 탄생한 지 30여 년이 지난 2026년, 무대에 올라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그 생명력의 이름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성과 이타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