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성’, 이 단어에 대해서 잠시 숙고해 보자. 불확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특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자 하는 뚜렷한 기준, 수렵과 채집을 통해 단단한 자존감의 뿌리를 내리고 영토를 확장한다. 확고부동함을 좇는 것이 어쩌면 일종의 진리로 확고히 굳어지게 되었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실체를 마주하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삶에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과반수 이상 자리하고 있음에도,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는 유전의 힘이 미완성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흠결이 있는 사람은 상처를 입고 상처를 준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보다 따르는 것을 결심해 전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것도 불확실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성향에서 비롯된다. 결과에 순종하고 피할 수 없는 과정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안온한 삶인가. 어쩌면 필연적으로 모든 이가 원하는 삶, 체념과 미약하게 남은 공허함만 맴돌 뿐 상처가 곪지 않은 생의 여정이 된다.
AI를 전적으로 따르는 삶도 미완성을 통한 작디작은 상처를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불확실성을 외면하고 미결성을 혐오하는 행위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과학적으로,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각광받도록 날카롭게 꽃피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빼어난 풍모와 미적 조화 그 모든 ‘미’의 이면이 완전함인가? 그토록 많은 예술 작품이 고귀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미학을 축적할 때마다 왜 예술가를 ‘천재’라 부르며 칭송하게 되는 것인가. 그 근반에는 100%의 확신과 필연의 진리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다.
감정으로 인해 수십 번 무너지고, 미완의 상태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절망 속에 갇힘에도 그 켜켜이 쌓인 노고와 ‘완전하지 못함‘은 그 어떤 것도 멋대로 표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그 바보 같은 끈기와 집념을 통한 ‘미성숙한 작품’이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신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글과 예술 작품, 그 모든 언저리에는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노고를 안다. 과거의 영광, 밤의 장막에 갇힌 듯 어두웠던 그들의 삶, 그럼에도 빛나고자 했던 질기고 공포스러웠던 예술을 향한 집착. 그 모든 것이 아우러져 새로운 영광의 시대를 열고 예술은 무궁한 발전을 이루었다.
절대적 지능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정답’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조금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미’는 어딘가 절묘하지 못한 부조화를 이루고 마음 깊은 곳의 공백을 키운다. AI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완전하지 못한 결핍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좀처럼 인지하지도, 알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글 속에 모순이 내재해있어도, 미묘한 불안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오차가 드러나 있어도 불명확한 다섯 손가락이 이루어낸 다채로운 글자가 모인 문장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강력함이다. 가느다란 떨림이 모인 불완전한 궤적은 한 사람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불확실성’ 그 단어는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명확한 생애의 흔적이 된다.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아는가. 완성의 부재로서 ‘결핍’된 존재로 남아있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사진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경탄을 하며 삼삼오오 모여든다. 미성숙한 당신의 글은 완벽한 오점이 아니라, 누구보다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머금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독자적인 미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