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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너의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영영 알 수 없는데도* [도서]

* 김이강 - 「상자들」 中

by 양예지 에디터
2026.11.0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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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판도라의 상자와 그 안의 말들

       


      열리지 않는 상자들끼리……


      약속한다. 몸을 바꾸기로

      너의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영영 알 수 없는데도, 나는 네 것이요 너는 내 것이라 선언한다. 꼭 두 개의 상자가 된 것처럼

      가진 것이 불어서 기쁜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는 공정거래를 원하는 상자가 아니라

      진실한 상자.


      한번쯤 근사한 상자를 원했던

      근사한 상자로 살아 보고도 싶던


      근사한 상자를 사랑한 상자.

      너는 참 근사했던 상자. 근사하기에 그것으로 다했던 상자.

      이제는 말해 주고 싶어. 네가 갖고 있는 그것들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니든 아무것도 없

      든 전부 무시해도 되었다고. 너는 어차피 널 열어볼 수 없으니까. 열 줄 모르잖아.


      영영 열리지 않을 듯한 상자들끼리…………


      모여서 진실게임을 한다. 돌아가면서 가진 것을 말하자고 한다. 그런 건 재미없어, 일생일대에 걸쳐 해왔고 앞으로도 할 거니까. 이 자리에서 하나씩 꺼내 보면 어때? 제안하는 천박한 내가

      당신들을 조롱하기 원하지 않고

      텅 빈 상자도 진심으로 욕망한다는 진실을 믿어 주길 바라기에

      쓴다.


      호주머니를 까뒤집어 

      무어라도 꺼내 주었지

      열리지 않는 상자들

      받지 못하고

      마주 열지 못하고

      바라보던 상자들

      빈곤해 가는 남의 내부를

      바라만 보던 상자들

      저 상자를 조심하라

      수사하리만치 값싸군

      그들의 생각마저도

      메아리치는 여기는 

      얼마나 비어 가는가

      이제 잘 열리지 않을 듯이

      녹슬어 보이는가

      나의 주인이여

      진실하게 말해 주게

      이 아귀가 틀어지기 전에

      날 열고 속에 남은 것을 하나하나 꺼내

      진열해 보게

      미움 미움 미움

      사랑 사랑……

      갑갑함 

      갑갑……


      - 김이강, 「상자들」 전문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면, 주인공들이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른다. 상대를 자신의 이름으로 호명하고, 상대의 이름에 자신이 응답하며 자신이 아니라 상대로 환원되는 순간을 만끽한다. 낭만적인 장면이지만, 이 시는 사랑의 그런 낭만을 전적으로 조소하고 있다. 화자는 선언한다. “나는 공정거래를 원하는 상자가 아니라/진실한 상자.” 그가 선언했듯 시 속의 화자는 지나치게 진실하다. 조소하듯 내려놓는 말. 너는 어차피 널 열어볼 수 없다고 단언하는 잔인한 말들. ‘너’의 텅 비었음을 폭로하는 화자의 태도는 어딘지 너무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들이 초라한 것을 내려놓는다고, 사실 그 안에 든 게 아무것도 없다 해서 비웃고 싶지 않다는 것. 사실 그 텅 빈 상자도 진심으로 사랑했고 욕망했음을 믿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언어로만 이해한다고 내뱉는 것들. 포장지와 상자로 둘러 포장하며 값어치를 매기는 눈빛과 사람들. 그런 것을 제치고 화자는 진실해지고 싶다. 그 상자 안에, 바닥에 든 것들은 미움 미움 미움, 사랑 사랑 사랑…… 갑갑함. 그리고 갑갑이다. 「상자들」의 내가 끝끝내 보여주고 싶었던 초라함.

       

      인스타그램이 주 SNS로 떠오르면서 사람들의 성취 추구나 전시 욕구가 점점 강해진다고 느낀다. 필터로 예쁘게 가공된 일상들, 보정이 잘 되었냐고 물어보는 친구들, 인스타그램 매거진에서 “느좋○○”이라며 큐레이션하는 영화, 책, 음식들. 개인적으로 이런 것에 피로함을 느낀다. 실재하는 순간이나 물성이 아니라 보여줌을 위해 수집하는 것에 의미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가공은 단지 취향뿐만 아니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와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 그 앞에서 도덕적으로 고결하거나, 매력적인 상대이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상태’를 연기하게 될 때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그래서 네가, 내가 텅 비었든 남루하든 정말 너를 사랑했다고,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다 내보이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 시가 무척이나 소중해진다. 

       

      김이강 시인은 『트램을 타고』(문학과지성사, 2024), 『타이피스트』(민음사, 2018),『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문학동네, 2012) 등의 저서를 냈다. 

       

       

       

      2. 기어코 열어보는 것들


       


      왜 모든 행위가 끝나야 알게 되는 걸까 

      적극적으로 망가지는 쪽을 향할 땐 이런 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더는 손쓸 수 없는 지경이네요 

      이런 말을 들을 때쯤 찾아오는 통증이나 

      폐를 가득 채운 오염된 세포들처럼


      이 건물은 방으로 가득차 있다


      그 사람은 나갔다 완전히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에서 연기가 퍼지고 줄 은 창문을 열자 방충망과 창틀 사이에 죽은 나방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체모, 알코올, 숨, 이산화탄소, 가래, 체액, 신음 혹은 괴성 

      나방이 빛에 다가가는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건물은 지금 사람이 뱉은 숨으로 가득차 있어


      인간들은 맞기를 원하고 취하기를 원하고 비틀거리기를 원하고 잊기를 원하고 헐떡이기를 원하고 울기를 원하고 기절하기를 원하는 것 같아


      나방은 대부분의 종이 야행성이므로 주행의 방향을 달빛에 의존하여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빛을 등지기

      나방의 규칙


      어쩌면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닌지도 몰라

      너무 밝은 빛은 구원이 아니라 공해의 형태를 하고


      그러니까 위아래를 구분할 수가 없는 거잖아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거나 어깨를 맞대고 번화가를 하염없이 걷다가 어딘가로 가지 않을래 이런 물음을 기다린다거나 처음 보는 문신을 쓰다 돕는다거나 머리카락 사이에서 일그러지는 미간을 발견한다거나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나는 원한 적이 없었던 건지도 몰라


      전방위로 밀려오는 인공의 빛은 차라리 탁하지 

      나방이 백열등을 사랑하는 게 아닌 것처럼 

      불로 투신하기

      그거 말이야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처럼


      인간들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고 조각나기를 원하지 않고 아프기를 원하지 않고 떠나기를 원하지 않고 잊히기를 원하지 않고 찢어지거나 타오르기를 원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 같아


      창틀과 잘 맞지 않는 창문을 억지로 단자 나방들의 몸통이 부서지고 으스러진 날개가 방충망에 끼어 바스락거린다


      빛을 등지기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한 무의미로 남기


      그러니까 나는 그냥 살고 싶었던 것 같아


      원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에게 흔적을 남긴다 담배 님. 좋 독, 청춘, 금전적 이익, 가족, 생명, 현기증, 환희, 목을 조른 자국 영원한 꿈, 미래, 인유두종바이러스

       

      - 유선혜, 「모텔과 나방」 전문

       


      유선혜의 「모텔과 나방」은, 상자를 이미 열어본 직후의 시라고 볼 수 있겠다.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때쯤 찾아오는 통증처럼, 폐를 가득 채운 오염된 세포들처럼”. 이미 모든 행위가 끝난 후에야 알게 된다. 층층의 방으로 가득 찬 모텔에서, 관계 후 ‘나’는 모텔의 너저분한 풍경을 응시한다. 방충망과 창틀 사이 죽은 나방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여기서 ‘나방’은 ‘나’와 ‘방’으로 나눌 수 있음을 생각하면 재밌다. 

       

      흔히들 원하는 것을 향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을 불나방이라 칭한다. 불이 좋고 빛이 밝아 저도 모르게 뛰어들어 타죽는 나방. 체념과 멸시 섞인 호칭이지만, 사실 모두가 그 굴레에서 피해 갈 수 없다. 빛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구원을 원하고, 차라리 자기자신을 불사르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단순히 ‘나’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나방이 백열등을 사랑하는 게 아닌 것처럼, 불로 투신하는 것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처럼.” 고통을 향해 뛰어들고 그 속에서 방황하고 헐떡이는 인간들이 사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가기를 원했을” 뿐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욕망도, 간절히 소망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고. 그저 흔적을 남기며 인간 틈새로 사라져간다. 

       

      유선혜 시인은 2024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 『사랑과 멸망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을 출간하였다.

       

       

       

      3. 내가 때리는 내 안에


         


      샌드백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 

      가장 미워할 얼굴을 찾아다녔다


      샌드백이니까 모래가 들어 있는 가방 

      내 무게 추를 흔드는 것은 

      손끝에 닿은 무당벌레를 무심코 터뜨리듯 

      짓누르고 마는 설명들


      주먹을 너무 세게 쥐면 안 돼요

      아프면서 아프게 할 만큼 사활을 건 싸움이라면 

      정말 좋아했다는 뜻이라니까요?


      나의 권투 선생님이 왜 만년 삼등이었는지 

      그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낭만은 전력을 다하게 만들기도 

      흐릿하게 비웃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나의 샌드백은 아픈 곳 없이 건강하고 

      매달리는 일로써 성실하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것이 

      연습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샌드백을 가르면 이름 모를 콩이나 팥 주머니 

      어떤 자투리도 되지 못한 옷감


      좋아해서 아껴 부르던 이름

      밤낮으로 휘청이던 제자리걸음이 쏟아진다


      흔들려야 볼 수 있었어 

      중심이 내리려고 붙잡아둔 중심을


      부엌 가스레인지에 올려둔 주전자가 

      미풍 선풍기와 동생의 낮잠이 

      내 안쪽에 채워진 나무랄 데 없는 줄거리가


      사랑했던 것을 떠올려봐 

      샌드백이 팽팽하게 부풀어오른다 

      내가 수습해온 온갖 불행들과 

      맞서 겨루고 싶어한다

       

      - 서윤후, 「기초 샌드백」 전문

       


      서윤후의 「기초 샌드백」은 무척이나 경쾌하고 상냥한 시이다. 초반의 화자는 어쩐지 잔뜩 화난 듯 보인다. 권투용 샌드백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싶다는 말은, 어쩐지 천진해 보이지만 샌드백이 뜯어질 정도로 때리고 싶다는 것 아닌가. 첫 연의 이 말은 반어법에 가까워 보이는데, 2연에서 화자가 “샌드백이니까 모래가 들어 있는 가방”이라며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단언했기 때문이다. 샌드백을 가장 미운 얼굴 삼아 때리고 싶어, 권투 선생님의 설명 역시 흘려듣는데, 막상 권투 선생님은 주먹을 너무 세게 쥐지 말라 당부한다. 내가 상처 입어가면서도 상처 입히고 싶은 것은 그만큼 좋아했다는 것이라며. 권투 선생님은 권투로서 대단한 명예는 갖지 못했어도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화자에게 이제 샌드백은 달리 보인다. 가장 미운 얼굴이 아니라, “아픈 곳 없이 건강하고/ 매달리는 일로써 성실한” ‘나’의 샌드백. 미웠던 그것을 ‘나의 것’으로 치환함으로, 화자는 폭력이나 아픔을 휘두르고 싶은 게 아니라 강해지고 싶었음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샌드백 속에 든 것들은 이름 모를 콩, 팥 주머니, 자투리도 못 되는 옷감. 그런 가련하고 이름 없는 소소한 것들. 나를 채우는 것 역시 일상 속의 소중한 것들.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것들이다.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고 단련할수록 화자는 강해지고, 사랑해왔던 모든 것들은 나의 불행으로부터 나를 지켜낸다. 

       

      서윤후 시인은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 『소소소』(현대문학 핀 시리즈, 2020),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문학동네, 2021), 『휴가저택』(아침달, 2018),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민음사, 2016) 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4.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에게


       


      계속해서 반복되는 장면들이 있어 그것을 상영한다고 말할 수도 있어 그것이 상영된다고 말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아무도 동전을 넣지 않는 뽑기 기계 아무도 끌지 않는 쇼핑 카트 쓸모를 잃은 사물들은 쓸모없이 그 자리에


      성씨를 모르겠는 이름들

      미정 민지 수민 은수 철수 민규 수현 영희 지민 민수 은지 현지 영호 지훈이 현우 은화 희선 민주 예은 하은 돌림자 성우 민재 명희 영순 숙자 옥순 순옥 귓바퀴를 맴도는


      비명에 가까운 이명


      아이야,


      언젠가는 풀꽃과 들꽃을 구분하게 될지도 모른다

      토끼풀을 엮어 반지를 만들며 하던 말

      얘들아


      부르면 뒤돌아볼 수많은 얼굴이


      무서워


      하루는 새벽에 담배를 피우러 나갔는데 쓰레기통 뒤에 숨어 먼지를 뱉어냈는데 경비 아저씨가 대형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봉투 하나를 주워 가는 걸 봤는데 머리가 

      헤집히는 기분이었는데


      있지

      나는 모든 일에 좌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름을 훔쳐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행방불명된 아이에 관한 이야기 

      방치된 정거장에 전단지를 붙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밤이면 사라진 아이의 얼굴 집요하게 천장을 떠다니고


      아이는 커서 강아지 뒷목을 함부로 헤집는 

      백자 같은 얼굴이 되었구나


      웃자라 부러지는 기린의 목같이 

      가지 끝을 무너뜨리며 날아가는 새


      텅 빈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사람은 무엇을 잃으려고 하는지

      끝내 알 수 없는 도용된 마음과 

      불 꺼진 건물 밖을 밤새 서성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이 음소거의 영상이라고


      끝도 없이


      백 년의 시간

      한 세기의 뜻 모를 밤이면


      허수아비를 사람이라 오해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 구윤재, 「다녀왔어」 전문
       

       

      어디로부터 다녀온 것일까? 구윤재가 천착하는 상실의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머릿속에서 영영 반복되는 장면들. 내 의지로 기억하는 동시에 의지를 떠나 떠오르는 장면들. 쓸쓸한 풍경이다. 아무도 동전을 넣지 않는 뽑기 기계와 쇼핑카트, 쓸모를 잃은 사물들. 시 속의 이야기나 정황을 따라가기보다는, 꿈처럼 모호하지만 머물게 되는 장면과 사물이 주는 그리움의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다섯 살배기 아이는 하루에 약 200개 정도의 단어를 새로 익힌다고 한다. 호명으로 나와 대상의 관계를 명명하고, 세계는 점점 구체화된다. 원근법을 이해하듯이 대상과 나의 거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어쩐지 이 시를 읽으며 시를 쓰는 것도 비슷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풀꽃과 들꽃을 구분하게 되는 일. 이름을 훔쳐가는 사람에 대해, 행방불명된 아이에 관해, 방치된 정거장에 전단지를 붙이는 사람에 대해 쓰는 것. 활자로써 박제하는 것. 무언가 모자라고 결핍된 것들에 대해 토로하는 것. 그것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 세월이 지나다 보면, 언젠가 그 속에서 삶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2025년 등단한 구윤재 시인은 202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미래 아이 뜀틀』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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