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로 서울 시민의 삶을 1년 더 연장했다. 살고 있는 원룸의 재계약을 마쳤다는 뜻이다.
경기도 변두리에서 나고 자란 내게 서울은 꼭 다른 세계 같았다. 서울에 놀러 가는 날이면 눈이 참 바빴다. 높고 반짝이는 건물과 그 사이를 가득 채운 채 바삐 거니는 사람들. 해가 진 뒤에도 좀처럼 잠들지 않는 도시. 가끔은 환히 켜져 있는 빌딩 속 불빛을 보며 내 자리도 꼭 저기 있기를 바라던 때가 있었다.
서울에 산다는 건 내게 단순히 주소를 옮기는 일 이상의 의미였다. 늘 동경하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일. 이제 더 이상 서울을 목적지로 삼아 집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곳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서울의 저녁, 오렌지색 물감 (NCT127, 2024)
빌딩 속 사이로 골인
Shoot 저 태양을 쏴
해가 저물어
한강 위로 띄워
오렌지색 물감
내가 사랑한 밤 Seoul City
그 오렌지색 밤
막연한 동경을 품은 채 친구들과 놀러 가곤 했던 한강의 모습을 기억한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 나처럼 소풍을 즐기러 온 사람, 여유롭게 러닝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옆으로 자전거가 지나갔고, 이곳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해 질 녘을 보내고 있었다. 집 앞 공원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어쩐지 '서울'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낭만이 있었다.
"그때 여기 말고 서울에 집을 샀어야 하는데." 서울 집값이 치솟을 때마다 지난날의 선택을 아쉬워하던 엄마의 푸념을 뒤로한 채, 나는 매일 서울로 향했다. 학교로, 직장으로... 그렇게 서울을 오가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나도 이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첫 자취 계약을 마치고 이삿날을 기다리니 마음만은 벌써 서울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나도 드디어 서울 시민이 되는구나.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짧아질 출퇴근 시간이었다. 지겹게 마주하던 지하철 인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래 묵은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한강 너머로 펼쳐진 넓은 풍경을 상상하며, 눈앞의 세상이 전부 내 것인 양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서울의 새벽,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10CM, 2021)
아침을 기다리는 게 차라리 나을 걸요
이곳의 밤은 유난히 느리게 흘러가요
새벽은 깊어질수록 더 반짝여
이 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차갑고 주눅 들게 하는데
어떻게든 우린 서로 안아줘야 해
서울에서의 첫날밤. 서울 시민이 되었다는 부푼 마음과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지친 마음이 반반 섞여 있었다. 내 이름으로 처음 계약한 집,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나의 공간. 작고 낡았더라도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참 들떴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내가 꿈꾸던 서울 생활은 조금 달랐다. 우선 답답했다. 집 창문을 열면 맞은편 건물의 외벽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나름 고층임에도 맞은편 건물에 가려서 하늘을 보려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한껏 돌려야만 겨우 보였다. 그마저도 밤이 되면 집 안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신경이 쓰여 블라인드를 후다닥 내리곤 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방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번호 키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면 책상부터 침대까지, 전부 한눈에 보이는 온기 없는 방과 항상 뻘쭘하게 대면했다. 머리 위 백색 등마저 끄고 나면, 낮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선명해졌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초라한 나를 안고 이불을 덮을 때면, 꽤 서글펐다.
서울의 화려한 불빛 사이에는 저마다의 외로움을 감춘 작은 방들이 있었음을, 나 역시 그 안에서 긴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서울의 낮, Youth (기현, 2022)
난 요즘에 하늘이 아름다워
잘 알던 서울이 새삼스러워
비가 오면 그대로 다 맞고 싶어
애쓰지 않더라도 행복하고 싶어
시간이라는 약의 효능은 정말 굉장했다. 처음에는 낯설고 버겁기만 했던 날들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무뎌진다. 어느새 혼자 보내는 밤에 익숙해졌고, 좁은 방에서도 나름의 동선이 생겼다. 처음에는 견뎌야 했던 일들도 어느덧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됐다. 매일 보는 서울의 풍경에 가슴 떨리는 일도 잘 없다.
그럼에도, 익숙해진 서울의 모습 앞에서 가끔 걸음을 멈춘다. 퇴근길에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이라던가, 건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또렷이 보일 때, 버스 창가에 기대어 바람에 흩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볼 때나, 비가 그친 뒤 걷는 근처의 산책길이 평소와 제법 다르게 느껴질 때도 있다. 예전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순간들이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이곳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서울에서 살아가는 지금은 그 안에 숨어 있는 모습에 자주 눈길이 간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특별한 목적 없이 걷는 이 동네가 새삼스러워지는 순간들. 서울살이는 여전히 만만치 않지만, 새삼스러운 이 순간들을 꼭 붙잡고 싶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할 나의 서울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