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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3월은 명실상부한 시작의 달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아직 쌀쌀해도 교내에는 새 학기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리고, 그 속에 환영이라는 글자가 눈에 익는 시기.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입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설렘이 묻어있는 듯하다.


이들을 보니 괜스레 나까지 추억에 젖어들게 된다. 나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에 못 이겨 품이 큰 교복을 산 탓에 치마 끝단을 자주 매만지던 나. 그런 나에게 교복 치맛단보다도 더 길게 나를 괴롭힌 지상 최대의 고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진로 문제였다.


새 학기, 새 출발, 새 친구들과 함께 밀려온 진로의 고민. 가정통신문과 함께 전달된 종이 위에 적힌 ‘희망 진로’ 란이 어찌나 크게 느껴지던지. 여러 직업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옆 자리 친구의 종이를 곁눈질하기에 이르렀다. 나와 달리 반듯한 글씨로 채워진 칸을 보면서 남모를 위기의식마저 들었다.


단정히 꿈을 정한 친구들 사이에 끼지 못한 나는 늘 이방인 같았다. 고민해도 쉽사리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글을 써볼까? 그러기엔 나보다 잘 쓰는 애들이 너무 많잖아. 나 정도는 수없이 많아. 검열에 검열을 거치고 나니 나의 진로란에 적힐 직업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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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를 기울이면> 스틸컷

 

 

<귀를 기울이면> 속 시즈쿠 역시 마찬가지다. 확고한 자신의 꿈을 향해 앞으로 달려가는 세이지를 보며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다. 세이지는 점점 꿈에 가까워지는구나. 세이지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즈쿠의 어깨가 무거워 보이던 건 내 기분 탓일까.


친한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토로하던 시즈쿠는 대화 도중 간단한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된다. “간단한 거였어. 나도 하면 돼.” 그리고 시즈쿠는 가게에서 만났던 ‘바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 남작 조각상을 주인공으로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처음부터 완벽한 걸 기대하면 안 된다는 가게 할아버지의 응원을 등에 업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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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를 기울이면> 스틸컷

 

 

영화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시즈쿠의 모습과 함께, 시즈쿠가 써 내려가는 소설 속 내용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누구보다 나를 증명하고 싶어 불안해하는 시즈쿠의 모습과 그녀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의 대사가 묘하게 이어진다. 두려워하지 말고 바람을 타보자는 바론 남작의 대사는 시즈쿠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건네는 말인 듯싶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원했다. 확실한 재능만이 나를 성공의 지름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그러면서 재능 앞에선 한없이 작아졌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시간낭비 하는 건 아닐까? 어두운 방 안에서 고민하던 나는 어쩌면 내겐 처음부터 재능 따윈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이고도 손쉬운 포기를 자주 택했다.


해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했다. 고민하는 시간에 그냥 해보는 것이 더 빠르다는 말. 나는 내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재능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라는 나의 가정이 틀렸다는 건 그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였다.

 

살다보니 나에겐 이 세상에 내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킬 만한 기막힌 능력이 있지도 않았고 특출 난 글쓰기 재능도 없었다. 그런 내게도 '그래도 뭐라도 계속한다면' 거창한 성과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뭐라도 쥐어진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몇 있었다.


평생을 작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려보고 싶었는데 전 직장에서는 지겹도록 작가님이라 불리기도 했고, 방구석에서 홀로 머리를 싸매고 썼던 노랫말이 세상에 나오는 귀한 경험도 해봤다. 뭐, 누가 보는지 알 수는 없어도 지금까지 계속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모두 일단 시작부터 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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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를 기울이면> 스틸컷

 

 

숱한 도전과 실패 속에서 좌절의 시간을 겪고 나서야 나는 어렴풋 알게 됐다. 그래도 해봤기 때문에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과 해보지도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감정들. 꼭 결과로 이어지지 않아도 그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다음의 시작이, 그 당시는 몰랐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정말로 있었다. 시즈쿠가 써 보고서야 알았다며 자신의 감정을 할아버지 앞에서 토해낸 것처럼 말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알겠냐는 말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그냥,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보는 것일 뿐이다. 비록 내가 그 분야에는 재능이 없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그때 해볼 걸’이라는 후회는 남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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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를 기울이면> 스틸컷

 

 

”세공할 때 생긴 흠이 빛을 낸대.” 빛을 받으면 유달리 반짝이던 고양이 남작의 눈은 세공 과정에서의 긁힘 때문이라던 영화 속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본다. 그동안 저질러온 나의 실패를 보듬어주는 것만 같아서. 앞으로도 무수히 찾아올 실패 앞에서 조금이라도 덜 쫄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다.


이후 할아버지가 시즈쿠와 국수를 먹는 자리에서, 시즈쿠가 부러워했던 세이지에게도 사실 시즈쿠처럼 고뇌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말해주는 장면 또한 영화가 내게 건넸던 또 하나의 위로 메시지다. 때로는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사실 우리 모두 그래.’라는 말이 큰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3월이다. 나에게 이 영화가 그랬듯, 당신의 ’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응원하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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