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죽은 아빠로부터 열세 살 생일 선물이 도착했다. 꽤 무거운 상자 겉면에 '삶의 의미'라고 적혀있고, 열쇠 네 개가 있어야 상자를 열 수 있다. 열세 살 생일을 앞둔 소년 제레미 핑크는 열쇠를 찾기 위해 동네를 수소문한다. 바로 옆집에 사는 단짝 친구이자 말괄량이 소녀 리즈와 함께. 혼자서 지하철 한 번 타보지 못했던 제레미는 열쇠를 찾겠다는 신념 하나로 집을 나선다. 마을을 벗어나 새로운 동네에 발을 들인다. 벼룩시장에서 열쇠를 파는 이들과 흥정도 하며 상자를 열기 위해 애쓴다.

웬디매스 작가의 소설 '제레미 핑크, 비밀의 상자를 열어라!' 는 448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으로, 상당한 두께감을 자랑한다. 살아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 분투하는 소년 제레미와,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있는 소녀 리즈. 이제 막 10대의 세계에 접어든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두꺼운 책이 마치 얇은 여행 지도처럼 느껴진다.
"리지 아빠가 연장들을 좀 갖고 있으니까 만약에 네 생일 전까지 상자를 못 열면 리지 아빠더러 톱으로 잘라 달라고 할 수도 있어."
나는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탁자에서 상자를 얼른 집어서 가슴에 꼭 안았다.
(...)
아빠가 이 상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들었는데 톱으로 두 동강을 내게 둘 수는 없었다. 아빠는 내게 5년 뒤 열세 살 생일에 이 상자를 열라는 단 한 가지 지시를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나는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다.
제레미의 엄마는 상자를 부수는 방법도 있다고 얘기하지만, 열쇠를 향한 제레미의 집념은 변치 않는다.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빠가 들려주고 싶었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상자를 열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생일 전까지 열쇠를 구할 수 없을까봐 불안해진 제레미는, 리즈와 함께 갖가지 계획을 세운다. 상자를 냉장고에 넣어본다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려본다거나. 열쇠를 찾기 위해 중고 장터를 돌아다닌다거나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수확이 없다. 그러자, 리즈가 위험하고도 솔깃한 제안을 한다. 아빠의 부탁을 받아 상자를 맡아주었던 헤럴드 아저씨네 사무소에 몰래 침입하여, 단서를 찾아보자는 이야기였다!
무사히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경비 아저씨한테 꼼짝없이 붙잡힌 두 사람은 무단 침입을 한 벌로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 전당포를 운영하는 오스윌드 할아버지를 돕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오스윌드 할아버지는 전당포를 정리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나기로 했다며, 제레미와 리즈에게 물건 주인을 찾아주라고 부탁한다.
<곰돌이 푸> 동화책과 오색찬란한 랜턴, 천체 망원경까지. 제레미와 리즈는 수십 년 전 물건을 맡긴 주인을 만나러 간다. 물건 주인들은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물건을 향한 애정만큼은 여전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전한다.
분명 보람된 일이지만, 생일이 가까워질수록 제레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다간 열쇠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제레미는 삶의 의미라도 알고 싶다는 마음에, 만나는 사람마다 삶의 의미를 묻는다.
"너도 램프나, 의자, 꽃과 마찬가지야. 네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정한 네가 되는 거야. 정말로 네가 누구인지를,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아내도록 해. 그러면 네 목적을 찾게 될 거야. 그러면 그와 더불어 삶의 의미도 찾게 될 거야."
내가 여기 있냐고?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난 모른다. 당연히 그걸 알고 있어야 했나?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나? 내가 잘못된 건가? 내가 문제가 있다는 건 늘 알고 있었다.
어른들의 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은 더욱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을 베풀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절대 잊지 마라. 우주가 너무 광대해서 다 알 수 없지만 제레미 핑크도 딱 한 사람, 리지 멀던도 딱 한 사람이라는 걸. 물론 에이모스 그래디도 유일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우리 각자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단다.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 거냐고? 내 생각으론 우리가 진화 복권에 당첨됐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야."
천체 망원경을 돌려주러 갔다가 만난 그래디 박사로부터, 제레미는 마음에 드는 답변을 듣는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이 여기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라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빅뱅이 시작되었고, 세포가 분열했으며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자 인류라는 것이 생겨났을 뿐이다. 또한 '인간'과 같은 종이 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변수를 거쳐야 하므로, 드넓은 우주에 인간과 똑같이 생긴 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은 아주 낮다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문득 나 역시 제레미처럼 '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밤을 새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비단 청소년기 아이들만이 떠안는 고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년을 넘어선 이들도, 세상을 살 만큼 살았다는 노인들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힘겨워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특히나 제레미는 아빠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삶에 의미를 부여할 때마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제레미와 리즈의 성장에 독자로서 동참하면서, 인간이 존재하는 데에는 그렇게 거대한 이유라거나 보편적인 가치가 없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디 박사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진화 복권에 당첨되었고, 우주에서 발 딛고 살 곳이 지구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아빠를 살리고 싶다거나, 혹은 투명 인간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제레미의 기상천외한 바램들도 그래디 박사의 말 앞에서 잠잠해지는 듯했다. 변수가 생기는 걸 싫어해서 늘 가던 곳만 가고, 같이 노는 친구하고만 어울리던 제레미. 그런 제레미는 열쇠를 찾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에게 용기를 내어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웃집 아이들과도 자연스레 친해지게 된다.
"(...) 우리 자신도 사랑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몽유병 환자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완벽하게 삶을 즐기십시오. 죽지 않고는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제레미와 리즈는 우연히 들어가게 된 교회에서 다 같이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곳에서 제레미는 소속감을 느끼고, 목사의 말을 귀담아듣는다. 살아있는 한 깨어 있어야 하며, 몽유병 환자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서 당장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이야기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제레미에게는 이 설교가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정언 명령처럼 들렸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제레미는 네 개의 열쇠를 모두 얻게 된다. 고생 끝에 얻은 것이 더 값져 보인다고 했던가? 제레미는 열쇠가 모두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상자를 열려니까 두렵다. 실망하게 될까 봐, 혹은 봐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을까 봐. 겁이 난 제레미는 리즈더러 상자를 강물 속에 빠뜨리자고 말한다. 리즈는 기겁하며 상자를 열라고 밀어붙이고, 제레미는 떨리는 마음으로 열쇠를 돌린다. 그 안에는 아빠가 미리 쓴 편지와 20개의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나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죽음이고, 끝나는 시점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삶을 꼭 껴안도록 자극받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틀린 생각이었어. 삶에 의미를 주는 건 죽음이 아니야. '삶' 자체가 삶에 의미를 주는 거야.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그 질문 안에 숨겨져 있단다. 중요한 건 그 띠를 꽉 붙잡아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 목표가 크지 않으니 어쩌니, 우리의 관심이 바보 같으니 어쩌니 하며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야.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견해만 조심해야 하는 건 아니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최악의 비평가가 되는 경향이 있어. 랠프 윌도 에머슨은 이렇게 썼지. "삶의 그림자는 대부분 우리가 자신의 태양을 등지고 서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다."라고 (...) 지혜란 우리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게 된단다. 그러니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너 자신의 태양을 가리지 말고 커다란 만족으로 충만하길 바란다. (...)"

돌멩이는 아버지가 20여 년 모은 것이었고, 특별한 날과 장소를 기념하는 상징이었다. 제레미와 리즈는 편지를 읽으며 흐느낀다. 제레미의 아버지는 본인이 열세 살이던 해, 해변가에서 우연히 점집에 방문했었다. 그곳에서 '마흔 살이면 죽는다'는 께름칙한 예언을 듣고 수십 년간 자신이 일찍 죽을 운명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제레미는 열쇠를 찾으러 다니면서 오래전 아빠가 들렀다는 점집까지 가고, 그곳에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당신은 마흔이면 죽을 거다'라는 말을 들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 제레미는 아빠가 죽은 건 그저 단순한 교통사고였을 뿐이고, 운명이나 예언 같은 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이후, 제레미는 아버지처럼 돌을 줍고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내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날, 13세.
제레미가 찾은 삶의 의미는 상자 속에 갇혀있지 않았다. 상자를 부수어서 여는 쉬운 방법도 있었을 텐데, 제레미는 기어코 열쇠를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정체불명의 상자를 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제레미는 친구 리즈와 함께 힘을 합치며 의기투합하는 법을 배웠고, 새로운 이들과 어울리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살아가는 의미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 태어난 환경과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바라고 꿈꾸는 이상이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살아가는 의미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제레미와 리즈가 만난 어른들이 각자 삶의 의미에 대해 다르게 얘기한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일 테다.
그러니 삶은 그저 삶일 뿐이다. 무수히 많은 변수 속에서 선택받아 태어난 나. 변수의 변수를 뚫고 만난 나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소중하고 뜻깊은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앞으로도 세상을 살다 보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불쑥 찾아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상자를 열기 위해서 나만의 열쇠를 찾으려고 한다. 생각보다 나의 행운을 바라는 이들이 많고, 나를 돕는 이들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