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기획업을 하는 나도 AI를 사용하지 않는 날이 없다. 간단하게 필요한 이미지는 대부분 생성형 AI를 활용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AI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만큼 AI는 이미 우리의 일과 일상에서 떼어놓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특히 현재의 AI는 글이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상당한 능력을 보여준다. 누구나 손쉽게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도 AI에 의해 대체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사람은 앞으로 예술을 해도 되는 걸까. 굳이 사람이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AI 시대에 예술을 해도 될까요?’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해 AI 시대의 예술과 창작을 바라본다. 저자 정유진은 오티스예술디자인대학에서 국제입학처 부처장으로 재직하며 매년 수백 건의 포트폴리오를 직접 리뷰하고 있다. 책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예술 산업의 구조를 살펴보고, 다양한 직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AI로 인해 변화하고 있는 산업의 모습과 그 안에서 창작자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한다.
과업의 범위가 바뀐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AI가 특정 직업을 통째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과업 중 일부를 대신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책에서는 주니어 디자이너의 업무를 예로 든다. 과거 주니어 디자이너가 일러스트 파일을 수정하거나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면, 이제는 이러한 작업을 AI가 훨씬 빠르게, 더 많이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니어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주니어 디자이너도 단순 디자인 작업이라는 과업을 넘어, AI가 만든 작업물 중 더 좋고 더 나은 결과물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과업이 필요하다.
실제로 기획 업무를 하면서 나 역시 AI를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행사 컨셉 아이디어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먼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충분히 고민해본다. ‘이번 행사에는 우주와 궤도라는 컨셉을 녹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그다음부터 AI와 대화를 시작한다. 이 컨셉을 키비주얼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프로그램에는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 등을 함께 이야기한다. AI가 여러 가지 답을 제시하면 그다음은 나의 몫이다. 그중 실제 행사에 적합한 것은 무엇이며, 우리 행사만의 특징과 목적에 맞는 것은 무엇인지 판단하고 다시 디벨롭한다.
이 과정에서 AI는 나 대신 기획을 해주는 존재라기보다 여러 선택지를 보여주는 도구에 가깝다. 혼자 생각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아이디어까지 확인할 수 있고, 그중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 다시 나의 언어와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몇 차례 대화를 거치고 나면 처음의 막연한 아이디어가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인 기획으로 발전해 있다.
예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AI를 활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술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결과물에 창작자의 판단이 얼마나 담겨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수많은 결과물 중 무엇을 선택했는지,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선택한 결과물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켰는지.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준과 취향, 경험이 얼마나 녹아 있는지가 결국 하나의 창작물을 다른 결과물과 구분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산업이 변하면 직업도 변한다
책에 수록된 다양한 인터뷰를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예술을 하는 사람’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흔히 예술가라고 하면 화가, 작가, 디자이너처럼 명확한 직업명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산업에서는 꼭 직업의 타이틀에 ‘예술’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책에서도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여러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하나의 직업 안에서 해야 하는 일만 바라보기보다, 내가 속한 산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다른 분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Q. AI 시대에 학생들이 키워야 할 역량을 하나만 꼽자면요?
A. 포용력이요. 예전에는 그래픽 디자이너면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어도비 툴을 깊이 파야 했잖아요. 지금은 달라요. 자동차 메카닉이면서도 그래픽을 그릴 수 있는 시대예요. 특정 툴 하나를 마스터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 더 중요해요.
- 채상민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스트 인터뷰, 본문 79p
생각해보면 AI 역시 특정 직업만을 위한 기술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누군가는 그것을 기존 업무에 적용하고, 누군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의 일과 연결하느냐에 있다.
앞으로는 점점 하나의 직업만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하나의 직업 안에서도 하는 일이 계속 달라지고, 기존에는 서로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세상의 변화를 계속 살펴보고, 다른 분야와 나의 일을 연결해보는 능력 역시 중요해질 것이다.
'무엇을 만드는가'보다 '어떻게 바라보는가'
AI가 빠르게 발전할수록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점점 쉬워지고 있다.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내는 일까지 이제는 누구나 AI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AI 시대에 예술을 해도 될까요?’를 읽고 난 뒤 내가 내린 답은 ‘판단’에 가깝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AI와 경쟁해 더 빠르고 완벽하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 사람인지를 잘 아는 능력과 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계속 관찰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예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이나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일을 조금씩 확장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AI 시대에 예술을 계속해도 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책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관점을 열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