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 있어,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나의 '무가치함'이다. 뒤처지는 게 무서웠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몇 년 전부터 SNS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MBTI, 퍼스널 컬러, 체형 분석, 에겐 테토 테스트….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찾기 위한 각종 테스트를 전부 다 해봤다. Chat GPT에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석해 줘.'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한 적도 있다. 남들은 내가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며, 세상에 없어선 안 될 귀한 존재라고 얘기한다. 그 말을 듣는 한순간은 잠시나마 인생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만, 이내 무기력해진다. 한순간의 기분이 또 나를 속였구나, 역시 나는 무가치하구나, 생각하면서.
누군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세상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한창인데, 주변에선 주식 이야기만 할 때. 일터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를 상처 준 사람이 아무런 벌을 받지 않은 채 살아갈 때.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분명 터지고 마는 시한폭탄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심정. 결국 내가 가진 파워는 단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삶의 이유와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
그렇게 시체처럼 살아가던 요즘,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로 큰 사랑을 받은 박해영 작가가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내 처지를 대변하고 있는 제목에 호기심이 들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모르고 단숨에 10화까지 보았다.
찌질하고 자격지심에 찌든 주인공이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왠지, 나 같아서.
1.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땐,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

주인공 '황동만'은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한 번도 데뷔하지 못했다. 대학교 친구들은 전부 성공했는데, 자신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동만을 치욕스럽게 한다. 문예 창작 입시 학원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고, 출장 뷔페에서 아르바이트한다. 나이 마흔에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고, 변변치 않은 살림을 꾸려나가는 동만. 주변에선 그런 동만을 한심해한다. 20년 했는데도 안 된 거면 포기하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동만은 포기하지 않고 '날씨를 만들어드립니다'라는 원고를 끝까지 붙든다.
동만은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를 욕하고, 지인들이 잘되면 배 아파한다. 지인의 영화에 1점짜리 리뷰를 남길 정도로 찌질하고 못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우리 모두가 동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이 나보다 먼저 성공하면 괜히 기죽고, 시원하게 축하해주지 못하고. 나는 왜 안 되지,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자책하고. 상대방의 성과를 트집잡는 열등감, 질투, 자격지심 같은 것들.
동만은 오밤중 차도를 뛰어간다. 과속 방지 알림판에는 동만의 속도가 뜬다.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땐,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
세상의 속도에서 늘 뒤처지는 것만 같은 동만.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하기 위해 악을 쓰며 달린다 고꾸라진다. 자학에 가까운 동만의 태도를 보며 문득 나의 고교 시절이 떠올랐다. 잘나서 인정받지 못할 땐, 차라리 나의 못난 모습을 꺼내 보이면서 관심받자고 생각하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운동하는 것도. 배가 불러도 음식을 꾸역꾸역 먹다가 토를 하는 것도. 과로하는 것도, 전부 자해라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를 해치는 방식으로, 존재 가치를 증명해 오던 게 아닐까? 동만처럼 말이다.
2. 내 인생이 왜 네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

동만은 부족한 살림에 돈을 보태고자 생체 데이터 수집을 위한 임상시험에 참여한다. 그 때문에 항시 '감정 워치'라는 것을 착용하고 있다. 감정 워치는 특정 상황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려주는 시계이다. 가령, 직업을 '영화감독'이라고 말했다가 백수인 게 들통날 위기에 처했을 땐 '극한 수치'라는 알람이 뜬다거나. 순간순간의 기분을 시계로 알려주는 거다.
동만과 같은 실험에 참여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32세 여성, 변은아. 영화 기획사 '최 필름'에서 일하며 시나리오를 엄선하는 PD이다. 대표는 그녀가 하는 일에 훈수를 두고, 인격 모독을 한다. 은아는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마음이 없어진 사람인 것처럼 군다. 인상을 찌푸리지도, 크게 한숨을 쉬지도 않는다.
그런 은아의 앞에, 동만이 나타난다. 쉬지 않고 떠드는 동만의 특이함에 끌린 은아는 그의 시나리오를 읽어봐 주겠다고 한다. 최 대표는 은아가 동만의 시나리오를 읽었다는 걸 알게 되고, 동만을 회사로 부른다. 최 대표의 호출에 내심 기대하는 동만에게, 대표는 쓴소리를 늘어놓는다. 자신이 총대 메고 말하는 거라고, 그만두라고.
내가 동만이었다면, 그 상황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상상했다. 사실, 나도 22살 때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자기가 총대 메고 말해주는 거라며 훈계하던 사장의 얼굴이 똑똑히 기억난다. 그는 내가 마스크를 쓰고 일했는데도, 실수하고 나서 표정이 굳는다는 이유로 사회생활 안 해본 티가 난다며 면박을 줬다. 손님의 음료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는데, 그 머리카락이 내 것이라고 단정 지으면서 내게 '손해 배상 청구는 하지 않을게요'라고 인심 쓰듯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억울했지만, 위압감에 눌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어쩌면 사장의 말이 맞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를 아주아주 작은, 한낱 미물로 만들어버리는 '갑'의 말에, 나는 언제나 '을'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만은 결코 을이 되지 않았다.
"내 인생이 왜 네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
동만의 말에 최 대표의 눈이 동그래진다.
화가 풀리지 않은 동만은, 최 대표를 다시 찾아가 말한다.
"(...) 나는 어마어마하게 더, 더, 더 무가치해질 거고 더, 더, 더 쓰잘데기 없어질 거고 더, 더, 더! 그래서 니들을 더, 더, 더 빡치게 할 거거든? 기대해라. 아마 백기 들 거다. 그리고 나는 그 무가치함의 끝에서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 거야. 나의 빛나는 스토리를, 기대해라."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 앞에서 절대 납작해지지 않는 동만의 당돌함이. 20년간 영화 한 편 찍지 못했지만, 그런데도 자신의 빛나는 앞날을 기대하는 동만의 믿음이, 눈부셨다. 어쩌면 그는 '황동만'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미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무시를 당해도, 상대방이 자신을 오해해도 늘 피해 가기만 했던 변은아. 은아는 동만의 솔직함과 광기에 끌린다. 모두가 혀를 끌끌 차며 못났다고 손가락질하는 동만을, 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3. 불안하지 않은 거, 나는 그거면 돼.

동만의 형 진만은 습작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시인이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를 쓰지 않고 용접공으로 살아간다. 그에겐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처에 의해 입양 보내진 딸이 있다. 그는 딸을 잃은 허탈함과 죄의식을 술로 달랜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돈이야? 성공이야?"
"누가 성공이래. 불안하지 않은 거…. 난 그거면 돼."
동만은 술만 먹는 형이 걱정돼 항상 밥을 차린다. 동만과 겸상한 진만이 삶의 목적을 묻자, 동만은 성공이 아닌 '불안하지 않은 삶'을 바란다고 답한다.
동만의 주변에는 성공해도 불안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고도, 시나리오가 안 써진다면서 불안해하고. 작품이 잘 안됐다는 이유로 스트레스받는다. 어쩌면 '불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신체 일부 같은 게 아닐까.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불안을 야기하는 것 같다.

동만은 은아를 만나며 점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로써 그의 삶이 전보다 더 가볍고, 쾌활해진다. 그는 은아네 집 앞에 있는 가로등을 부러워할 만큼, 은아에게 깊이 빠져든다. 작중 은아가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은아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버려졌고, 혼자 학교에 가고 혼자 도시락을 챙겨야 했다. 이후 믿었던 남자 친구 '마재영'한테도 버려진다. 그는 은아의 지분이 큰 시나리오로 영화감독 데뷔를 앞두게 되면서 은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은아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은아를 미워한다. 은아는 그의 폭언을 들으면서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데, 동만이 그 미친 오빠의 역을 톡톡히 해낸다. 동만은 자신이 변은아의 오빠라도 된 양 마재영에게 일침을 가하고, 은아를 걱정한다.
삶의 궁지에 몰려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황동만과 변은아. 그들은 서로의 흔들림을 알아보았다.
4. 무가치함과 싸울 파워는 어디에서 올까?
흔들린다는 건 뭘까. '흔들리다'라는 단어만 들으면 왠지 나약하고 부질없는 존재가 떠오른다. 동시에 '생명'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줄기가 길게 뻗을수록 더욱 흔들리는 꽃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도 전부 살아있다. 어떤 흔들림을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동력이 된다. 지진이 날 때를 대비해서 일부러 약간 흔들리게끔 내진 설계한 건물처럼. 불안, 초조, 두려움, 공포. 그로 인한 마음의 멀미는 어쩌면 난관을 유연하게 헤쳐 나가기 위한 본능적인 감정일 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비단 황동만과 변은아의 연대만을 다루진 않는다. 동만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성장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떠드는 동안, 동만이 반드시 건져 올릴 것이라고 다짐했던 '빛나는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진실이 '살아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만은 드라마 속 가장 살아있는 인물이다.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가장 동물적인 감정 '허기'를 느낀다. 그는 살기 위해 먹는다. 반려묘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사채를 써서라도 수술을 시켜줄 만큼, 저보다 약한 존재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풀어놓고, 쉴 새 없이 떠드는 걸 즐긴다. 산에 올라가 미친 듯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악을 쓰고, 뛴다.

동만은 살아있기 때문에 흔들리고, 흔들리기 때문에 살아있다.
살아있기에 꿈이 있고, 꿈이 있기에 살아있다.
12부작 드라마를 10화까지 봤으니, 앞으로 2화만 남겨둔 상황이다. 과연 동만은 영화감독으로서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줄기차게 상상하고 외우던 수상소감을, 무대에 올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불안하지 않은 삶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기 직전까지 계속 두려워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어릴 땐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께 혼날까 봐 거짓말을 하고. 어른이 되고선 경쟁에 떠밀려 도태될까 봐, '무가치해질까 봐' 불안해한다. 이 불안함이 마냥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아로새겨진 문양 같은 거랄까.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불안해질 수밖에.
중요한 건, 무가치함과 싸우는 존재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매일같이 깨닫는 일이다. 모두 각자의 쓸모없음과 분투를 벌인다. 그러니까,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서…. 변은아와 황동만이 그러했듯 서로 텅 빈 가치를 채워준다면 어떨까? 불안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닌, 생존에 필요할 만큼의 불안만 남겨두면서.
박해영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 건, 혼자 잘난 사람은 결코 없다는 사실이다. 혼자서만 잘날 수 없다는 것. 알게 모르게 서로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한다는 것이다. 나의 못난 모습을 부끄러워 하기보단 인정하고, 솔직해지고. 나의 못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이의 손을 잡고 끌어안는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나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이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하루 더 싸울 '파워'를 얻는다. 내가 얻은 파워를 나눠줄 방법에 대해 궁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