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나은 오늘로 나아가기 위하여: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

글 입력 2023.01.3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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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잘 보지도 않는데, 한참 무기력에 절어 있을 때 이 작품을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그렇다. 꼭 가장 깊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필요했던 무엇을 툭 발 밑에 던져준다. 그럼 나는 그걸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다. <나의 해방일지>가 그러했다. 나에게 필요한게 무엇인지도 몰랐으면서, ‘그래,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야.’하고 생각하게 했다.

 

그놈의 ‘추앙한다’가 뭔가 했더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진 뜨거운 말이었다. 추앙. 보통 신이나 영웅을 향해 쓸 법한, 그래서인지 거의 숨 죽어가던 단어가 아닌가. 그런 단어가 이 묘한 드라마에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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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은 해방되고 싶어한다. 평범하고 존재감 없는 본인의 삶, 그리고 어쩌면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그런 미정에게서 자꾸만 나를 보았다. 어쩌면 딱히 불행할 이유가 없어보이기도 하는 그의 삶이 조용한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마음을 자꾸만 저릿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나는 자꾸만 그 이유를 찾아 헤매었기 때문이다.

 

평범하다는 건 다들 좋은 거라던데 나는 왜 이 평범한 평범 속에서 자꾸만 자꾸만 우울하고, 슬플까? ‘나’는 대체 뭐길래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다시 우울하고 슬퍼져야 하지? 이유를 생각할 수록 이유가 없다는 것만 알게되어서 마음이 자꾸만 갈라지던 밤들.

 

미정은 그런 이유에는 골몰하지 않는다. 자신의 불행을 정당하게, 정면으로 마주보고 대한다. 부끄러움 없이. 나는 그래서 드라마 초반부의 미정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차분히 전개되면서 결국 나와 비슷하거나 똑닮은 선택을 하며 나아가는 미정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위안과 감동을 받았다.

 

그래, 나 잘 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누군가 나를 안아주는 것처럼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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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는 어느모로 보나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K-드라마 1화에서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무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밭 일 하는 남자 주인공이라니. 꽤나 파격적이긴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16화까지 놓지 않고 보게 되기도 했다. 멋내고, 뽐내고, 드러내고, 울고 불고 난리치고, 떼쓰고, 악쓰고, 용쓰는 이야기에 너무 지쳐있었다는 걸 문득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구씨는 어려운 사람이다. 현실에서 만난다면, 아니 현실에서 마주치지 말아야 하는 인물에 가깝다. 불과 방금 말했던 ‘난리치고, 악쓰고, 용쓰는’ 것이 삶의 전부인 사람이다. 그의 주변엔 야욕에 눈이 먼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래서 이유없이 분노로 가득한 사람도 많다. 그의 일터엔 방향 없이 뻗쳐나가는 시커먼 갈증과 고성이 꾹꾹 눌러 차 있다. 그의 삶은 그렇게 추하게 쌓이고 쌓인 타인의 욕망들로 가득해서, 되려 그 자신은 자꾸만 소진된다. 그 역시 미정처럼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머릿속엔 자꾸만 이 사람 저 사람이 앞다투어 들어와 자신을 괴롭힌다.

 

그래서 구씨는 온종일 술만 마신다. 내내. 자꾸만 술잔을 비우면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소진하다 고요히 죽어가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신다. 미정은 자신과 같은 구씨를 알아보았고, 서로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길 바랐다. 그러니 이들에게 ‘추앙’은 사랑이면서 사랑이 아니다. 사랑보다 더한 어떤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다 말할 수 없으니 신의 언어로 번역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들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자꾸만 내 발목을 잡아 당기는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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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은 강한 사람이다. 요즘 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여러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행복한 시지프'의 삶. 나는 그런 삶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절망에 부딪히고, 깨지는 삶을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이 과연 강해질 수 있을까? 마음으로라도 끝없이 치열하게 싸우고, 비를 맞아가며 살면 다치지 않을까,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나는 ‘잘’ 살기 위해 적당한 모른 척을 선택하며 살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넘어가지 않으면, 그곳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아서. 적당히 합의하고, 적당히 모른 체 하면 정말 없던 일처럼 넘어가지기도 하고, 그럼 상처 하나 없이 어제 같은 오늘을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로 내가 그런 삶을 완전히 지향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걸 의식 너머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애써서 모른 척을 ‘선택’해야 하는 게 나에게 일종의 노동이었던 것이다.

 

미정은 말한다.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다’라고. 미정은 그래서 강한 사람이다.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고, 쟁취하고,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 모른 척 덮어두지 않는다. 말없는 그녀에게서 더 없는 생명력을 느끼게 되는 건 그래서다. 그녀는 삶의 의지로 가득 차 있고, 그 의지에는 어떠한 거짓된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삶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장 정석의 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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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는 겁이 많다. 하루에도 백만번 이랬다 저랬다 한다. 쉽게 추앙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 것 같지만, 미정의 추앙에 끝내 녹아드는 것을 보며 미정의 말대로 투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구씨는 매 순간 가책을 느끼며 스스로를 벌 주는 삶을 산다. 그 괴로움이 너무나도 날카롭고 선명하게 와닿아서 내 이가 시릴 정도로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런 자신의 바닥을 미정에게 쉽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아 결국 미정을 떠나지만, 여느 인간과 다름없이 한번 녹았던 자신의 모서리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그 뭉툭한 모서리를. 그래서 하루 백만번씩 미정에게 향하는 걸음을 물리다가도 끝내 그녀 앞에 서있길 택한다.

 

어렵지만 걸음을 옮기는 구씨는 나선형의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방 한칸을 가득 채울만큼 많은 양의 술을 마시고, 한번 쯤 용기 내어 그것들을 깨끗하게 지워냈다가도 다시 가책을 쌓아간다. 그러는 사이 화냈다가, 미소 짓다가, 망설였다가, 선택한다.

 

변할 수 있을거란 희망이 보이는 찰나마다 그의 말마따나 ‘인생이 뒤통수 치는’ 일이 벌어지곤 하지만 저벅저벅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비슷한 지점으로 돌아온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이미 미정의 추앙을 받기로 마음 먹은 순간부터 구씨는 그 이전의 구씨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빙글빙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아니다. 천천히, 수채화처럼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

 

미정은 ‘해방클럽’ 회원들과 함께 자신의 해방을 도모하며 그 스스로가 사랑스러워보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스스로가 사랑스러워보인다는 건 어떤 걸까요?’ 묻던 향기의 자문이 내게도 스며든다. 한때는 스스로를 사랑스럽게 볼 수 있다는 문장 자체에 의문을 품었는데, 이제 그 단계는 조금 벗어난 모양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보니 언젠가 창희가 했던 말처럼 '잡힐 듯 말 듯한, 아직은 내 것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감이 돋았나보다.

 

추앙. 어떤 이유도, 이름도, 과거도 묻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응원하는 일. 미정을 보며 추앙을 받는 것보다도 구씨를 추앙하며 생겨나는 생기가 인상적이었다. 구씨 역시 자신에게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기로 마음 먹은 후, 욕설을 퍼붓던 지옥 같은 날들을 뒤로 할 수 있었다. 추앙을 받는 것보다 추앙 하는 것, 성벽을 쌓아 올리기 보다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열쇠라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추앙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를 해방시키는,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에 대한 기꺼운 추앙. 껍데기를 하나 둘 벗어던지고 진짜 내 모습으로 세상과 조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해방을 응원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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