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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무대가 데려가는 환상의 세계 - 연극 ‘꽃의 비밀’ [공연]

그 말은 언제고 우린 다시 해낼 수 있는 거지.

by 이진 에디터
2026.10.0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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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컷 웃다 보면 눈물이 고일 때가 있다. 엉엉 울다가도 갑자기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울다가 웃으면 큰일이 난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웃음도 눈물도 우리 인생의 일부다. 블랙 코미디(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에 대해 잔혹하거나 통렬한 풍자와 반어를 내용으로 하는 희극) 장르 또한 웃음과 울음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 풍자, 즉 부정적인 현실이나 모순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게 아닌 무언가에 빗대어 비웃는 건 순수하게 웃기지만은 않는다. 슬픔이 짙게 밴 페이소스(pathos :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에 가깝다.


      장진 감독의 연극 <꽃의 비밀>이 그렇다. <꽃의 비밀>은 장진이 희곡을 쓰고 연출한 ‘장진식 코미디’ 연극의 대표작이다. 이탈리아 시골 마을 ‘빌라 페로사’에 사는 네 아내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편들 대신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장한 채 신체검사를 받으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코미디극이다.


      2026년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이한 연극 <꽃의 비밀>이 9월 12일 서울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개막했다. 11월 29일까지 공연되는 <꽃의 비밀>은 기존 시즌들과는 달리 네 남성 배우 성지루(소피아 역), 정웅인(자스민 역), 강은빈(모니카 역), 임모윤(지나 역)을 출연진 명단에 올려 캐스팅 발표 때부터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네 아내 역은 초연부터 이번 시즌까지도 여성 배우들이 연기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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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9일 열린 <꽃의 비밀> 기자간담회에서 장진은 ‘2014년에 대본을 쓸 때부터 남자들이 여장한 채 시작하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가장 먼저 대본을 받은 배우가 성지루였단 비하인드를 밝히기도 한 장진은, ‘주변 우려가 커 10년간 남성 배우 캐스팅을 시행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큰 용기를 냈다’라며 ‘무대가 주는 환영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네 아내가 남장하는 걸 남성 배우들이 연기한다면 그 환상이 극대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연극 <꽃의 비밀>은 대본에서부터 아이러니한 요소가 가득한 작품이다. 남자끼리 축구 경기를 보러 떠난다며 아내들에게 자유를 준 남편들은 경기장이 아닌 환락가로 향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맨다. 겉으로 볼 땐 유쾌하기만 한 아내들은 남편들의 폭력, 바람, 무심함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속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대학 시절 미모와 연기력으로 유명했던 모니카는, 아직도 반짝이는 미모와 연기력을 이젠 시골 마을인 빌라 페로사에서밖에 펼칠 수 없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국립 공과대학교인 토린 공대를 수석 졸업한 인재 지나는 젊은 나이에 농부의 아내가 돼 농사를 짓고, 남편의 바람을 목격하곤 자동차 브레이크를 터트려 살인을 시도했다.


      여자들 사이에선 든든한 맏언니이지만 20년 넘게 가정 폭력에 시달려온 소피아는, 남편처럼 남장하고 보험공단 의사·간호사 앞에서 연기하는 상황에도 요리를 칭찬받자 기뻐한다. 유쾌하고 생각 없는 술주정뱅이란 가면을 쓰고 사는 자스민은 남편이 밖에서 데려온 아이가 성장해 결혼할 때까지 양어머니로서 딸을 키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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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 새 없이 웃기는 코미디 작품이지만 네 아내의 삶을 들여다보면 극은 희극이라기보단 희비극에 가깝다. 미친 듯이 웃다가도 관객은 지나의 살인 미수에 ‘나 같아도 저랬겠다’라며 공감할 수밖에 없고, 네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줘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들의 남장 사기극이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라게 되며, 극이 끝난 후에도 이들이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길 응원하게 된다. 이것이 대본 밖의 아이러니이다.


      이번 시즌의 가장 큰 아이러니한 지점은 이런 서사를 가진 네 아내들을 남성 배우들이 연기한단 것이다. 치밀하게 의도된 페미니즘 작품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아이러니한 포인트다. 작품 개연성과 인물 행동 동력에 설득력을 얻기 위해, 네 아내 한정 여성 서사적 요소를 강화한 것이다. 시골 마을에 갇혀 살던 네 아내들이, 결혼 생활 내내 고통을 줬고 끝내 가정을 배신한 남편들 몫의 돈이라도 받아야 한단 작품의 주장에 공감해야 하니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생겨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성 인물과 여성 서사에 대해 더 치밀하게 고민했다면, 외모와 섹슈얼한 농담으로 좋아하는 남자(보험공단 의사 카를로)에게 노골적으로 어필하는 보험공단 간호사 산드라 캐릭터는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작품은 남장한 모니카에게 반하는 카를로가 동성애적 성 정체성을 가졌을지도 모른단 걸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카를로는 산드라의 유혹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 엇갈린 삼각관계에서도 웃음 코드가 심겨 있지만, 작품이 오래됐단 평을 받는 이유는 이 지점에 있다. 오늘날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집 안에 갇혀 살며 고통받는 아내’와 간호사라는 전문적 직업을 가졌음에도 ‘몸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가 공존하는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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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드라는 마을 남자들, 즉 남장한 네 아내들이 자신의 얼굴과 몸을 훑어보지 않는 걸 수상하게 여긴다. 남장 사기극이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아내들은 급하게 남자들을 흉내 내며 산드라에게 추근댄다. 이 장면을 여성 배우들이 연기했을 땐 개그 장면이라 여기고 웃을 수 있다. 남장했어도 누가 봐도 여성인, 아담한 체격의 여배우가 허세를 부리는 남자인 척 연기하는 게 재밌고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 배우들이 같은 장면을 연기했을 땐 마냥 순수하게 웃을 수만은 없다. 젠더 프리를 시도하며 기존 대본과 연출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처럼 작품엔 개연성을 확보하다 탄생한 페미니즘, 오늘날 기준으로 봤을 땐 오래된 연출과 웃음 코드가 공존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시즌의 남성 배우 캐스팅은 큰 의미가 있다. 신선하면서도 여성 분장이 과하지 않으며, 역할당 한 명씩만 남성 배우가 캐스팅돼 배우 간의 호흡이 탄탄하고, 남자의 모습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연기하는 것에서 작품 메시지가 뚜렷해지는 아이러니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다신 이런 날이 올까’라는 대사를 하는 남성 소피아·자스민·모니카·지나의 모습이 더욱 씁쓸한 이유다.


      <꽃의 비밀> 여섯 번째 시즌은 남성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파격적인 도전과 아이러니의 정점에 올랐다. 장진은 남성 배우 캐스팅뿐만 아니라 여성 배우들도 새 얼굴들을 다수 출연시키며 새로운 기분으로 작품을 만들려 했다고 말한 적 있다. 장진은 남성 배우 캐스팅에 대해 ‘좋은 결과가 나오든, 위험하고 쉽지 않은 시도란 결과가 나오든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라고 작품 프로그램 북 인터뷰에서도 연출 의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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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많은 공연에서 젠더 프리 캐스팅은 역사가 오래됐기에 <꽃의 비밀> 젠더 프리 캐스팅 또한 그 연장선인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기획 의도를 10년 만에 되찾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꽃의 비밀> 젠더 프리 캐스팅은 특별하다. 성지루·정웅인·강은빈·임모윤 네 배우는 파격적인 분장으로 무대에 오르면서도 뛰어난 연기력과 짙은 페이소스를 표현하며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작품에도, 장진 감독에게도, 네 배우들에게도 도전임이 분명한 <꽃의 비밀>은 장진식 코미디의 대표작이자 대학로 코미디극 스테디셀러로서 연일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웃기는 것에선 작품은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하지만 정신없이 웃다가도, 공대를 수석 졸업한 젊은 인재 지나가 ‘낮엔 쉬지 않고 농사일하며 밤엔 남편의 욕구까지 받아줘야 한다’라고 슬픔과 고통을 토로하는 장면에선 객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결혼했든 안 했든, 원치 않게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되는 건 많은 여성들의 현실이기에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꽃의 비밀>은 상업 코미디극으로선 이미 확실하게 성공해 왔고 충분한 오락적 가치를 지녔다. 하지만 <꽃의 비밀>엔 숨겨진 무언가가 하나 더 존재한다. 그 ‘무언가’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왔다. 그것은 웃음 속엔 슬픔과 씁쓸함이 자리했단 것이다.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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