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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우리 같이 좁은 수조를 벗어나 숨 쉬자 [공연]

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 <물질> 공연 후기

by 김예화 에디터
2026.10.2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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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둑해진 아비뇽 밤하늘 아래 펼쳐진 야외 공연장으로 들어서니 검은 무대 위에 사람 한 명 겨우 들어갈 듯 좁은 수조 네 개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수조 뒤 작게 마련된 객석도 채워지고,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인의 차림새를 한 그들 덕분에 프랑스임에도 마치 한국의 어느 길거리에 서 있는 듯한 생경함이 스쳐 지나간다.

       

      필라테스 복장에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꽁꽁 싸맨 20대 여성, 이제 막 사회 초년생이 된 친구들을 떠올리게 하는 20대 남성, 방금 장을 보고 나온 듯한 30대 임산부, 그리고 체크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전형적인 30대 한국 남성까지. 반가움도 잠시, 이들은 곧바로 각자의 자리를 찾듯 좁은 수조 속으로 들어가고, 한국과 프랑스를 잇는 듯한 양국 사회자의 진행과 함께 공연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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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은 가공되지 않은 음향으로 객석을 채운다. 무대를 울리는 제주 해녀의 숨비소리는 어떠한 음악적 장치나 설명 없이 오직 생존의 호흡음 자체로 존재한다. 숨을 참았다가 수면 밖으로 터뜨리는 이 날것의 소리는 해녀라는 문화적 맥락을 넘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인간 본연의 생체적 행위를 직관적으로 증명한다. 한국인인 나에게 익숙한 숨비소리와 함께 배우들은 하나둘 수조 속으로 잠수하고, 어떤 언어도 없이 오직 표정과 신체 행위만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수조 속에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이들의 움직임은 외견상 매끄러워 보이지만,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일상적인 행동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숨 막히는' 행위로 다가온다. 임산부는 부른 배를 힘겹게 가누며, 장바구니에 넣으면 빠져나가고 손으로 집으면 놓쳐버리는 물건들을 계속해서 좇는다. 유난히 커다란 양복을 입은 왜소한 남성은 목을 죄던 넥타이를 겨우 풀어내고 맞지 않는 옷을 끝끝내 벗어던진다. 운동복으로 무장했던 여성이 모자와 마스크를 벗자, 기괴한 화장이 드러나고, 가방 속 모든 물건을 꺼내 보형물 삼아 끝없이 옷 속으로 밀어 넣는다. 섬뜩하도록 무표정인 남자는 가방에서 끝없이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이내 그 비닐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버린다.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취업이라는 문턱 앞에서 자신을 지워가는 사회 초년생의 현실, 극에 달한 외모지상주의에 찌들어버린 세태, 그리고 일상화된 과부화 상태의 직장인까지. 타국에서 한국인을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 무대 위 수조들은 나를 다시 한국 사회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며 숨을 턱 턱 막혀오게 만든다.

       

      각 배우의 서사를 짐작하게 하던 행위들이 끝나자 무대 위에는 묵직한 정적만이 감돈다. 인물의 감정선이나 서사적 전개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강렬한 리듬의 사운드와 각 인물을 홀연히 비추는 핀 조명만으로 극이 이어진다. 관객은 특정 인물의 서사에 감정 이입하기보다, 수조라는 물리적 공간이 주는 정적과 압박감 그 자체를 관찰하게 된다. 잠시 고요해진 찰나, 문득 궁금해진다. '내 옆에 앉은 외국인 관객들도 나와 같은 숨막힘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자극적이고 극적인 연출로만 받아들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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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후반, 무대 뒤편의 객석에도 조명이 비추고 유리 수조는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수조를 사이에 두고 배우와 나, 그리고 그 뒤편의 또 다른 관객들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연결된다. 이 감각적인 미장센은 무대 위 인물들이 보여준 고립과 파국이 비단 극 중 인물만의 것이 아니라, 객석에 앉은 우리가 속한 현실의 단면이자 관객 자신의 모습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공연은 나를 그 숨막히는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고립과 압박의 내러티브가 신체로 모두 표현된 후, 무대 위 조명이 환하게 켜지며 다시 사회자가 등장한다. 사회자는 객석을 향해 직접 '숨비소리'를 내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한다. 마치 체조나 율동을 따라 하듯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게 숨비소리를 따라 하는 외국인 관객들의 모습은 팽팽하던 무대의 긴장감을 단번에 무너뜨리며 유쾌한 온기를 불러일으킨다.

       

      율동의 마지막 동작에 이르러 관객들은 다 함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 순간, 무대의 모든 조명이 꺼진다. 암전된 아비뇽의 야외 극장 위로 까만 밤하늘과 쏟아질 듯 빼곡한 별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참았던 숨을 '숨비소리'로 마침내 내뱉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 밤하늘의 별. 자유롭게 호흡을 되찾은 뒤에야 마주한 밤하늘은 아름답고 강렬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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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배우들은 객석으로 내려가 관객들의 손을 잡고 무대 위로 이끈다. 지켜보던 관객들은 흔쾌히 무대로 올라가, 배우들과 함께 그 좁은 수조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물에 젖은 것을 개의치 않고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수조를 들고 가고, 파트너가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정성껏 몸을 받쳐주는 모습. 언어도, 국적도 다른 이들이 좁고 차가운 수조라는 공간 안에서 체온을 나누며 서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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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은 동시대의 고립과 불안을 차갑고 날카롭게 비추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결코 외로운 채로 관객을 돌려보내지 않는다. 4개의 좁은 수조 속에서 시작된 숨막힘은, 다 함께 터뜨린 숨비소리와 아비뇽의 별빛, 그리고 서로의 몸을 받쳐주던 온기를 거치며 거대한 연대와 치유로 완성된다.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좁은 수조 속에 함께 발을 담그며 서로의 숨통을 트여주는 것. 그것이 이 어둡고 좁은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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