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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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는 산 속 오두막 같은 귀여운 산장 하나.

 

한가운데에는 조그마한 화물용 컨베이어벨트 같은 엘리베이터가 있고, 그 안에서 하나둘씩 인물들이 등장한다.

 

각국의 정상 자격으로 정상 회담이 열리는 산장으로 입장하는 이들은, 높은 산을 오를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새다. 스카우트 같은 복장에 각자의 취향을 담은 소지품과 배낭을 매고 모두가 도착했다. 참석 인원이 전부 모이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각자에게 나눠진 책을 펼친 후 전혀 이해할 수도, 맥락을 파악할 수도 없는 '소리'를 낸다.

 

그것은 말도, 언어도 아니다. 그저 언어의 조각조각을 모은, 어떠한 의미도 만들어질 수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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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언어 사용의 아이러니: 정치적 정상 회담에서 언어의 해체로


 

극의 제목인 '정상 회담(Le Sommet)'은 이 연극 전체를 관통하는 첫번째 아이러니다. 이 단어는 '지리적 정상(산 꼭대기)'과 '고위급 정치 회의'라는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의한다. 산 꼭대기에 모여 미래를 논의하고자 한 각국의 정상들은 가장 기본적인 공동의 목표인 '효과적인 소통'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유럽의 주요 언어들(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스코틀랜드어)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뒤섞어 사용한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다언어의 구사는 조화로운 다성음악과 문화적 풍요로움이라는 유럽의 이상을 상징해야 한다. 그러나 마르탈러(연출가)는 이를 영원한 불협화음으로 변질시키고, 세태를 비판한다. 대화는 오직 끝없는 오해와 이해 부족의 연쇄 반응만을 낳는다. 즉, 상황은 갈수록 악화될 뿐이다. 사회 공학을 위한 정밀한 도구로서 고안된 언어는 오히려 사회 발전의 장벽이 되고, 실존적인 좌절의 근원이 된다.

 

이것은 매우 날카로운 정치 풍자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고도의 담론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국의 정상들은 근본적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준다. 이는 유럽 연합이 현대의 도전 앞에서 얼마나 이념적으로 취약한지를 폭로한다. 극 중 언어는 '청각적 질감'으로 기능하며, 의미의 파괴를 통해 실존적 위기를 드러낸다. 이들이 뱉는 단어는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 채 다만 쌓여만 가고, 마치 언어의 잔해처럼 공중에 흩어진다. 이로써 소통의 실패가 곧 시스템의 실패이며, 진정한 화합에 도달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는 증거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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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언어: 개념적 해석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이 언어적 혼돈은 언어 자체의 해체를 야기하며 개념적인 제스처로 이어짐을 발견한다. 연극 속에서 언어는 기본 기능인 논리성을 상실한다. 단어들은 더 이상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서로 충돌할 뿐 연결되지 않는 단순한 소리 객체에 그친다.

 

논리적인 소통이 멈출 때 남는 것은 오직 단어의 순수한 소리다. 이 지점에서, 단어를 고립시켜 그 의미에 질문을 던지는 개념미술의 선구자 조셉 코수스의 작업이 떠오른다. 코수스는 '예술은 정의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언어가 이미지나 실제 사물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적 구조임을 제시했다. 마르탈러는 본 극을 통해 그와 같은 맥락의 메시지를 청각적 차원으로 구현해낸다.

 

마르탈러는 코수스가 단어를 '사물'에서 분리했듯이, 연극에서 말을 행동에서 분리시킨다. 인물들이 사용하는 세련된 전문 용어와 고급 어휘는 마치 사전의 정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맥락 없이 맴돈다. 즉, 언어는 메시지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형태를 지닌 조각이 된다. 의미는 그저 문장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공백 속에 존재할 뿐이다.

 

결국,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언어 능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깊은 소통의 문맹을 겪는다. 그들은 문법과 전문용어는 숙달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거나 서로 진정한 연결을 이루는 데는 실패한다. 이는 실제적인 참여의 부재를 숨기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현대사회의 지성주의를 비판하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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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리듬: 생존을 위한 플랜비


 

등장인물들은 소통의 부재로 인한 좌절감과 고립감을 겪고, 이를 대체할 만한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다. 외국인으로서 언어 장벽에 직면했던 개인적인 경험은 이 간절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논리적인 언어가 무너질 때, 인간은 가장 보편적인 예술적 대안, 즉 음악과 움직임을 피난처로 삼는다.

 

극중 인물들은 불안을 해소하고 침묵을 깨기 위해 갑자기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순간들은 그들의 상황이 가진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진정한 형태의 수행 의식이다. 그들 사이에 깨지기 쉬운 얄팍한 응집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공동의 리듬이다. 언어적 혼돈 속에서 인물들이 갑자기 합창을 하고, 춤을 추는 것은, 이 리듬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실존적 불안에 맞서고 공존할 수 있는 영토를 창조하려는 무의식적인 생존 전략이 되는 것이다.

 

한편, 그들의 우울한 유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과 연결을 유지하려는 애처로운 시도다. 마르탈러는 말(언어)이 없더라도 인간은 항상 공존을 위해 공유된 리듬을 찾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즉, 실패한 담론을 신체가 이어받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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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혼돈'과 '언어 해체'라는 두 축을 통해 본 극은, 통일된 담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방향을 찾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유럽의 모습을 우습고도 감동적인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보여준다.

 

마르탈러는 이 작품을 통해, 말의 풍요로움과 다국어 구사 능력이 결코 진정한 공감과 이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경고를 던진다. 그는 정치적 정상 회담의 수사가 얼마나 공허해질 수 있는지 폭로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절망하지 않도록 보편적인 언어(음악, 리듬, 신체)를 통한 생존 전략을 제시한다.

 

결국 이 연극은 우리에게 단순한 정치적 비판을 넘어선 인간적인 초대를 건넨다. 단어 너머에 있는 절망의 음악성과 몸의 언어에 귀기울여, 더욱 깊고 근본적인 인간적 연결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정상 회담'의 꼭대기에서, 마르탈러는 우리 시대의 고립된 인간상을 비추는 거울을 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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