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새로운 문화 공간이 문을 열었다. 지난 6월 4일 개관한 퐁피두센터 한화(Centre Pompidou Hanwha)는 프랑스 퐁피두센터와 한화문화재단의 협력을 통해 탄생한 국내 최초의 퐁피두센터 분관이다. 퐁피두센터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이자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끌어 왔다. 현재 파리 본관이 리노베이션을 진행 중인 가운데,서울은 퐁피두 컬렉션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대중에게는 지난 5월 26일 샤넬 공방 컬렉션 쇼의 런웨이로도 먼저 공개되었다.
로비에 들어서면 가로로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이 시선을 끈다. 일행을 기다릴 수 있는 라운지 공간과 푸드 스트리트, 감각적인 편집숍이 입점한 1층 공간이 관람 전후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전시관으로 이동하면 양옆으로 배치된 에스컬레이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개관전은 퐁피두센터 한화의 첫 전시라는 상징성을 반영해, 로비 조각 작품을 포함, 전시실 1·2 등 미술관 전 공간을 활용한 대규모 단일 전시로 개최된다. 그렇기에 관람객들은 에스컬레이터와 내부 계단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동선이 구성되어있다. 건물의 구조와 설비를 외부로 드러낸 하이테크 건축의 상징, 파리 퐁피두센터처럼 퐁피두센터 한화 역시 건축 자체가 하나의 경험으로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전시 공간으로 가는 길목에 조성된 외부 정원은 내외부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2층과 3층에 걸쳐 배치된 두 개의 메인 전시실은 각각 다른 성격을 지닌다. 특히 층고 7m 규모의 더블 하이트 공간은 작품의 규모와 존재감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다. 회화뿐만 아니라 설치미술, 멀티미디어, 조각 등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면모를 앞으로의 기획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채광 역시 인상적이다. 프랑스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가 설계한 '빛의 상자(Box of Light)'라는 콘셉트답게 자연광이 깊숙이 스며들며, 기존 63빌딩의 이미지와 달라진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황금빛 외관으로 기억되던 랜드마크는 밝은 화이트 톤의 공간을 더하며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입었다.
개관전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은 퐁피두센터 한화의 시작을 알리는 전시다. 큐비즘의 탄생과 확산 과정을 따라가며 20세기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조망한다.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후안 그리스, 페르낭 레제 등 큐비즘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전시장이 북적였다.
메르퀴르 발레 무대 막 Stage Curtain for Soiré e de Paris (known as the “Mercure Curtain”) 1924, 캔버스에 아교 물감, 392 × 501 cm Collection Centre Pompidou, Paris © Centre Pompidou, MNAMCCI/JeanFrançois Tomasian/Dist. GrandPalaisRmn ⓒ 2026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단연 파블로 피카소의 1924년작 <메르퀴르 발레 무대막(Stage Curtain for Soirée de Paris)> 앞이었다. 가로 약 5m에 달하는 대형 작품은 회화라기보다 하나의 건축적 존재에 가까웠다. 이번 작품들은 국내 최초 공개라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크지만, 무엇보다 피카소가 생전 확장했던 실험 정신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레스타크의 고가교 The Viaduct at L’Estaque 1908 초, 캔버스에 유채, 72.5 × 59 cm Collection Centre Pompidou, Paris © Centre Pompidou, MNAMCCI/Georges Meguerditchian/Dist. GrandPalaisRmn ⓒ Georges Braque / ADAGP, Paris - SACK, Seoul, 2026
조르주 브라크의 <레스타크의 고가교> 역시 눈길을 끌었다. 산과 건축물을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한 화면은 큐비즘이 탄생하던 순간의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 익숙한 풍경이 낯선 구조로 재해석되는 장면은 이번 전시가 말하는 '새로운 시각'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거장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큐비즘이라는 운동이 어떻게 현대미술의 문을 열었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이후 예술사 전반으로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한국과 프랑스 공동 큐레이터십으로 기획된 전시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또한 4년간 퐁피두 소장품 기반 기획전을 연 2회, 자체 기획전을 연 2~3회 예정하고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30년 재개관을 목표로 전면 리노베이션을 진행 중인 파리 퐁피두 본관의 주요 컬렉션을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 역시 이번 개관의 의미를 더한다.
또한 3층에 위치한 한국 작가들의 전시도 인상깊다. 식민지 근대 예술가들이 제국주의 안에서 촘촘히 살아온 얘술의 시간을 소리로 말한다. 그들의 기록과 언어는 음성으로 되풀이 되며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에 새롭게 얹어진다. 여러 명의 목소리가 함께 울리며 흩어지지만 그 앞에서 관객은 그 목소리를 개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한 역사의 시간을 지나온 이들의 것으로 흡수하게 된다. 물론 소장품 기반으로 한 전시 또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지만 한국 작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 《한성, 경성, 서울의 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전시와 함께 공개된 연간 멤버십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Solo(1인) 10만 원, Duo(2인) 15만 원, Family(4인) 30만 원으로 구성되며, 회원은 1년간 횟수 제한 없이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전시 프리뷰 초청과 회원 전용 프로그램, 뮤지엄숍 및 카페 할인 혜택도 제공된다. 성인 관람권이 2만 8천 원인 점을 고려하면 연 4회 이상 방문하는 관람객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지다. 단순히 전시를 소비하는 공간을 넘어 반복적으로 찾게 되는 문화 플랫폼을 지향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퐁피두센터 한화의 개관은 새로운 미술관의 등장이면서도, 63빌딩이 문화예술과 라이프스타일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 관람을 마친 뒤 카페와 정원,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은 미술관이 일상 속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 랜드마크였던 63빌딩은 이제 전망과 관광을 넘어 문화와 예술의 거점으로 변화를 선언했다. 여의도에 도착한 퐁피두는 단순한 분관이 아니라, 서울의 문화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는 하나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