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전공하며 서울에 산 지 어느덧 3년차. 누군가 내게 일 년 중 가장 설레고 즐거운 때가 언제인가 묻는다면, 1등은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며, 2등으로 9월 첫째 주 서울 아트 위크의 ‘Kiaf & Frieze Seoul (이하 키아프리즈)’이라고 답할 것이다.

세계 2대 아트 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가 2022년 서울에 진출하여,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아트 페어, 키아프 서울(2002~)과 함께 열린 지 올해로 5주년을 맞았다. 나 역시 2024년부터 매년 키아프리즈를 방문한지 어느덧 3년의 시간이 쌓였다. 언제나 아트 위크 기간은 내게 미술에 대한 무수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를 직접 와닿게 하고 시장의 동향을 어깨너머로 눈대중할 수 있는, 동시대 미술 산업의 살아 숨쉬는 현장 그 자체였다.

<서도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키아프리즈 뿐인가. 이와 같은 대규모 아트 페어는 물론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을 필두로 하는 동시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들만 방문해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해가 갈수록 그 열기가 더해지는 것을 몸소 체감하게 된다. 다만 각종 전시를 보고 있자면 동시에 이러한 의문들도 함께 피어난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트 페어를 찾을까? 왜 다들 이 작가를 좋아할까? 이 작품은 왜 팔렸으며, 왜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을까?
여기 그 질문들에 아주 포괄적으로, 솔직하고 알기 쉽게 풀어낸 책이 있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이지윤 지음)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쌤앤파커스)는 영국박물관 한국관 설립 업무를 맡았던 저명한 큐레이터이자 글로벌 아트 디렉터인 저자 이지윤이 전 세계 유수의 전시와 프로젝트 등을 이끌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써 내려간 ‘미술 생태계 Art Ecology’ 이야기이다.
책은 제목부터 미술에 대한 강렬한 명제를 던지며 시작한다. 읽기 전 막연히 생각했다. 저자가 정의하는 순수성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소위 미술의 순수함이라는 것을 믿어보고 싶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술술 넘어가던 책장을 덮은 뒤 깨닫게 되었다. 저자가 제시한 명제에 담긴 내밀한 진심은 미술 작품과 작가에 대한 염세적 시선이 아닌, 외려 보여지는 수치와 숫자 너머 저자가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체득했던 예술을 둘러싼 모든 ‘불순한’ 것들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고찰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치 잘 짜여진 강의처럼 책은 6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미술사 속에서 미술 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해왔는지, 오늘날 동시대 미술계는 어떻게 바뀌고 있으며 어떤 논의점들이 있는지 다양한 층위에서 분석하고 소개한다. 동시대와 호흡하는 미술사 연구자, 학예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이자 미술의 열렬한 애호가로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도, 거시적으로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따라 미술 생태계를 들여다보다

[Opinion] 둥글고 단단한 품 속에 존재하는 유연함을 찾아서 [문화 전반]
지난 해, 영국 박물관의 한국관에 방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백자 대호, 즉 달 항아리에 대한 오피니언을 작성한 바 있다. 저자가 그 한국관의 설립 업무를 맡았던 큐레이터 였다는 뜻깊은 우연에, 나는 한 층 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영국 런던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던 이지윤 큐레이터는 주로 영국 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사례로 가져와서 어떻게 미술이 당대 사회를 반영하고 가치를 드러내 왔는지 설명했는데, 실제로 해당 그림들을 본 입장에서 책의 내용들이 더욱 와닿기도 했다.

<비, 증기,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내셔널 갤러리)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그림은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 자연과 인간의 경외로운 순간을 담아낸 풍경화의 정수이다. 제목처럼 비와 증기, 속도가 공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이 작품을 실제로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산업의 발전과 함께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과 환경에, 터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고 추상적인 붓질로서 포착해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뛰어난 현대미술가에게 수여되는 영국의 ‘터너상’이 제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이다.
터너와 산업혁명처럼, 책의 흐름에 따라 르네상스 시기의 조토에서부터 영국 창조산업이 장악했던 현대 미술계까지 예술가의 위대한 미술과 그 모든 과정에 영향을 주었던 사회적 상황, 시대 정신, 권력, 정치, 돈의 배경을 짚어가다 보니, ‘예술가는 당대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익숙한 격언이 떠올랐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얀 반 에이크, 내셔널 갤러리>
그러니까 이 말은 필연적으로 예술이 사회, 즉 무균실과 같은 아틀리에 너머의 맥락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영국에서도 활발히 논의되었던 신미술사학과 궤를 함께 하는 동시에, 시대적 예술은 문화 정책, 미술 시장, 컬렉터 등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진다는 명료한 통찰을 아우른다.
미술은 진공 상태 속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분석 대상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 담론이 어지러이 섞인 세계와 영향력을 주고받는 일종의 ‘생태계’ 속에 존재한다. ‘순수함’이라는 가치 마저도 만들어낼 수 있는 고도화된 산업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미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해당 도서는 이러한 생태계 속 시장 경제 구조에도 주목한다.
영국의 창조산업, 그리고 K-미술 시장을 말하다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최근 전공 수업을 통해 ‘문화예술 산업’의 개념을 공부하며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영국이 ‘창조 산업 Creative Industry’이라는 효시적 명칭 아래 문화 정책을 추진해 당시 국가 경제의 10%에 달하는 효과를 보았던 사실이었다. 이 책에서도 역시 세계 최초의 국립 공공 박물관 설립, YBA 등의 순수미술 Fine Art 작가들의 발굴과 육성, 오늘날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가 된 정부의 예술 지원 방침인 ‘팔길이 원칙’ 등을 말하며 영국의 창조 산업과 그 국제화를 이야기한다. 하물며 세계 미술품 경매 시장의 양대 산맥이라고 불리는 소더비 Sotheby’s와 크리스티 Christie’s가 탄생한 곳 역시 영국이니 말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시 전경.
특히 미술에 대해 그럭저럭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후반부의 미술 시장, 미술품 경매, 그리고 미술의 자산화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미술 생태계를 움직이는 컬렉터들은 어떤 사람일까? 아트 마케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미술 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며 자산이 되는가. 저자는 이처럼 궁금했던 지점들을 실제 동시대 미술사 속 주요 사례들을 바탕으로 명쾌히 논한다. 미술 작품을 시장 논리에서 벗어난 오직 미학적인 대상, 혹은 투자의 수단이란 평면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장 경제 속 주목할 만한 ‘가치’ 자본으로 치환해 바라보는 지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서도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책의 말미는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의제, ‘한국 미술’로 귀결된다. 앞 전 언급했던 키아프리즈를 비롯해 COVID-19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있는 아시아 미술 시장의 움직임은 물론, 우리 미술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유례 없이 우리 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반짝 유행이 아닌, 미술사의 새로운 페이지로 쓰일 한국 미술로 거듭나려면 우리는 우리 미술에서 어떤 가치와 방향성을 읽어내야 할까.
저자는 표면적인 질문 던지기로 끝나지 않고 한번 더 강조한다. 실제 우리 미술 산업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있고, 어떤 미술이 주목 받는지 등 동시대의 빠르게 쌓여가는 통계와 경험에 기반한 맥락, 즉 ‘미술 생태계의 흐름’ 속을 들여다보자고 말이다.
미술을 애호하는 이들에게 교양서로도, 미술계 진로를 꿈꾸는 모든 미술학도들에게도 현재의 지평을 파악하기 위한 준비서로도 추천하고 싶은 시의적절한 책이다.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명쾌한 선언 아래, 그동안 알지 못했던 미술의 진짜 생태계를 보게 하는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모든 사진 자료는 에디터가 직접 촬영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