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는지 모른다. 어떤 상징물이 숨겨져 있다던가 어느 시대의 풍인지라던가 하는 쪽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관객이 없는 작품은 가치를 잃어버린다는 것과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게 결국은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해서 오롯이 작품으로만 세상과 붙어 보려는 사람을 보면 그 태도와 긍지를 매우 존경하면서도 아직 세상을 모르는 미숙한 아이 같다는 마음을 함께 품는다. 현실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지독하리만치 냉정한 평등을 안겨준다.
세상 모든 게 자본이다. 주목 자본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다만 이 또한 자본의 수천 수백가지 별명 중중에 하니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자본이 없는 사람은 그 자본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휘둘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시스템 위에서 응용 프로그램처럼 움직이는 게 개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이다.
이게 미술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진과 다름없는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세상에 이런 게 존재할까 싶은 신비로운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도, 누구라도 할 수 있을 법한 조악한 것들을 모아 조야한 것을 만드는 사람도 주목을 끌지 못하면 그들의 작품은 죽어버린다. 간혹 보이는 순수 미술과 대중미술의 급을 나눠 대중을 얕잡아 보는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만 바라보는 나르시시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그들의 작품조차 그 순수 미술에 기꺼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 사망한다. 대상이 다를 뿐 모든 예술은 관심을 갈구한다.
미술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직후 그림값은 최대 8배 가까이 치솟았고, 부를 과시하려는 신흥 상인과 죽은 이를 추모하려는 수요가 시장을 만들었다. 주문을 받아 만들던 '선주문 후제작'이 먼저 만들어 파는 '선제작 후판매'로 넘어가면서, 미술품은 비로소 상품이 되었다.
이 구조는 이후 700년 동안 정교해진다. 18세기 런던에서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문을 열고, 프랑스 혁명으로 쏟아져 나온 귀족의 재산이 영국으로 흘러들며 경매는 산업이 되었다. 세잔의 작품 150여 점을 싹쓸이해 잊힌 화가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세운 딜러 볼라르, 마음에 드는 그림을 몇 달씩 거실에 걸어두고 확신이 서야 사들인 컬렉터 코톨드, 마티스와 세잔을 나란히 걸어두었던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까지. 작품의 운명을 바꾼 것은 언제나 '작품 밖의 사람들'이었다.
에둘러 말하지 않아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투와 사용하는 단어에는 상대를 배려하는 교양이 배어있었다. 그러면서도 전달하고픈 말을 빙 둘러말하지 않는 책임감 있는 어른의 태도를 견지했다. 순수한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미술 따위는 세상에 없는 게 현실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이런 게 어른이 해야 할 일이라 믿는다.
자라날 새싹들에게 저 풀숲 뒤에는 사나운 짐승이 너의 목을 노리며 숨죽인 채 숨어 있다는 사실은 애써 가리면서 아름다운 풍경 한 번 보라는 말만 뱉는 이들은 무책임한. 언제까지고, 어떤 때라도 보호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대비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춰주지 않는, 선량한 자기 모습에 취한 나르시시스트들이다.
차라리 이렇게 차가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해주는 사람이 좋다.
자화상이 곧 포트폴리오였던 것이죠. 고객의 필요에 대응한, 화가의 맞춤형 작업이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술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꼭 봤으면 한다. 낭만은 필요하지만, 낭만에만 취해있으면 오만이다. 오염된 낭만은 눈을 멀게 하고 조막만 한 자아를 옭아맨다. 현실에 얻어맞아 깨지고 다시 붙기를 반복하며 거대해진 자아로 세상을 담아내는 사람이 시선을 끌고 살아남는다.
나는 그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러니 무참히 깨졌으면 한다. 부서지고 또 부서져 더 큰 그릇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