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작게는 사소한 거짓말, 선한 사람인 척 굴며 속으론 미움과 추한 마음을 품고 사는 일. 아주 크게는 살인, 살인 미수, 폭행, 사기, 절도와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는 것. 후자는 법과 제도의 심판을 받지만, 전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도 있다.
혼자만 아는 생각과 마음은 얼마든지 숨기거나 꾸며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취 나는 속내를 근사하게 포장할 수 있는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연기와 화술에 능하고, 운까지 좋아 자신만 아는 죄를 잘 숨기고 살더라도 추한 나를 견딜 수 있는 건 다른 문제다. 이중적인 자신을 거울로 마주할 때 치미는 구역감의 또 다른 이름은 ‘양심’이다.
알베르 카뮈 소설 <전락> 주인공이자 화자인 클라망스는 파리의 유능한 변호사였다. 선행을 즐기고, 타인을 내려다보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연출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시각 장애인의 보행을 도운 후, 앞을 못 보는 그를 향해 배우처럼 멋지게 인사하며 뿌듯해하는 인간이었다. 클라망스의 삶은 쭉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밤, 센 강에 스스로 뛰어드는 한 여자의 자살을 방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알베르 카뮈 소설을 원작으로 한 1인극 <전락>이 10월 25일 서울 대학로 TOM 2관에서 개막했다. 12월 6일에 막을 내리는 작품은, 2022년 초연·2023년 재연에 이어 2025년 국립극단 기획초청 시리즈 Pick크닉에 선정돼 명동예술극장에서도 공연됐다. 단 15명의 관객만 두고 진행된 2022년 초연 이후 시즌들에선 프로시니엄 무대로 공간을 바꿨다.
연극 <전락>은 배우이자 연출가인 손상규가 각색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지난 시즌들엔 클라망스를 연기했었던 손상규는 이번엔 각색과 연출로만 참여한다.
손상규는 <전락> 프로그램 북 인터뷰에서 ‘처음엔 커피숍이나 바에서 열리는 공연이면 어떨지 생각했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초연은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고, 클라망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구성했었다’라고 당시 연출 의도를 밝혔다. 작품 생명력을 위해 프로시니엄 무대를 택했다는 그는, 이번 시즌이 공연되는 TOM 2관에 대해 맨 뒷줄 관객도 무대와 거리가 멀지 않고 객석이 반원 형태라 극과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손상규는 <전락> 소설을 처음 봤을 때 낯선 전개에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으며,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나를 이상하게 위로해 준 작품’이라며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클라망스를 연기하는 윤나무와 이동휘에 대해 관객과의 호흡, 리듬감, 유머 감각까지 뛰어난 배우들이라 극찬했다. 두 배우가 연극 <타인의 삶>에 이어 <전락>에서도 같은 역할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연기한다고 말한 손상규는, 작품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를 강조했다.
손상규의 말처럼 연극 <전락>은 낯설고 불편하지만, 묘한 위로로도 기억될 작품이다. 우리는 클라망스의 고백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위선을 발견한다. 그의 심연은 우리 모두의 감추고 싶은 이면이자,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짊어진 끔찍한 숙명이기도 하다.
센 강에서의 자살을 목격한 후 클라망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파리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변호사에서 ‘고해 판사’로,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살던 일상에서 술에 취해 사는 하루하루로. 평소엔 시각 장애인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약자를 일부러 찾아다니며 호의와 힘을 과시하던 그였다. 그럼에도 가장 결정적 순간인 타인의 자살은 외면한 것이다.
작품의 교묘한 설계는 여기서 드러난다. 클라망스는 여자가 강물에 뛰어드는 소리를 50m 떨어진 거리에서 들었을 뿐이었다. 작품은 이처럼 클라망스의 방관에 일부 면죄부를 부여하면서도, 그를 온전히 사면하진 않는다. 클라망스는 뒤돌아보지도, 달려가지도 않았다. 늦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굳건하게 믿어온 ‘나는 좋은 사람’이란 자아상은 산산조각 난다.
그날 이후 정체 모를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 클라망스는, 죄를 고해하고 자신을 판사처럼 심판한다. 연극 <전락>의 관객이자 청자는 5일간 클라망스의 고해를 들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고해는 신자가 신에게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받기 위한 행위다. 작품 안팎 모두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그는 결말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한다. 고해의 굴레에 갇힌 그는 스스로를 영원히 벌할 것이다.
2026년 연극 <전락>은 의상과 무대 소품의 변화를 선보였다. 눈에 띄는 건 소품 변화다. 의자 1개와 사다리를 놓고 공연했던 2025년과는 달리 2026년엔 계단 2개와 긴 의자, 벽에 걸린 클라망스의 옷이 추가됐다.
무대 좌측과 우측에 배치된 계단을 오르내리는 연출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클라망스의 오만과 그날 이후의 추락을 함께 암시한다. 계단과 의자는 계속 활용되지만, 벽에 걸린 옷은 소품으로만 기능한다. 무대에 이유 없이 배치된 소품은 없다. 모든 대사와 행동에 의미가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벽에 걸린 옷은 클라망스가 과거에 입었던 옷, 혹은 앞으로 다신 입지 못할 옷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옷의 이름은 ‘좋은 사람’이란 외피일 것이다.
자신을 야누스(고대 로마 두 얼굴의 신)에 빗댄 클라망스는 스스로를 ‘믿지 말라, 배우, 사람들 앞에서 늘 연기하는 인간’이라 평한다. 변호사든, 고해 판사든 말과 논리로 살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는 사람이 아닌 연기자로 규정했다.
그의 관객엔 선인 역을 연기한 걸 본 사람들, 자기 자신, 그날 밤 강물에 뛰어든 여자까지 포함된다. 강물로 추락한 그녀는 클라망스의 내면을 거울로 비추며 그 또한 전락시켰다. 알베르 카뮈 대표작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칼날에 비친 태양 빛 때문에 살인했다고 주장한다. <이방인>의 칼날에 반사된 빛과 <전락>의 여자가 강물로 뛰어드는 소리는 닮았다. 그로 인해 뫼르소도, 클라망스도 이전의 삶을 잃고 자기 내면을 죽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막지 못했지만 클라망스는 온전한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결코 온전한 선인도 될 수 없다. 그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처벌 판결을 내리는 판사이자 자신의 죄를 변론하는 변호사다. 허구의 인물이면서도 주위에 있을 법한 현실적인 인간 유형이기도 하다. 타인이라 믿고 싶지만, 나 자신이기도 한 그를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할까. 비난과 거리 두기, 동정과 연민 사이에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모두 이중성과 모순으로 넘실거리는 강물 안에 잠겨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