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속고 속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 연극 '목선'

글 입력 2022.09.10 13:4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목선포스터(출력용).jpg

 

 

제9회 벽산희곡상을 수상 후 2021년 무대에 올랐던 연극 <목선>이 입체낭독극으로 다시 돌아왔다. 공연은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 극장에서 진행되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2FA9B28C-F817-4941-ABE6-FCF0924D4F7B.jpeg

 


망한 소련에서 탱크를 팔아먹었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온 ‘채씨’에게 소원이 있으니, 바로 젊을 적 처자식을 두고 온 고향, 북한에 가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 신청에도 떨어지고, 어렵게 접선했던 브로커도 잡혀가서 갈 방법이 요원하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아마존 오지에서도 라면을 끓여 먹는 세상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부조리한 국가를 비난한다. 채씨는 더 이상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법이나 사회제도에 기댈 수 없는 개인은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개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채씨 역시 편법을 써서라도 자신을 북에 보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헤맨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이들은 '추리닝청년', '목씨', '마씨'이다. 판타지였다면 이들이 국가로부터 소외된 채씨를 돕는 전개가 되겠지만, <목선>은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의 소시민을 그린다. 따라서 연극 속 소시민들은 부조리한 세상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이를 이용해 부를 쌓는 쪽과, 적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쪽으로 나뉜다.


‘추리닝청년’과 ‘목씨’는 자기 살길도 찾기 힘든 무기력한 인물에 가깝다. 추리닝청년은 좋은 대학을 나와 온갖 자격증을 섭렵했지만 사회성이 없어 취직하지 못하고 매일 길가에 앉아 퇴근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게 낙이다.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다는 그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를 대변한다. ‘목씨’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다. 전 재산을 잃은 그는 아내의 구박을 받으며 위축되어 생활한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고향에 가기를 원하는 채씨의 고충은 살아갈 날이 막막한 이들 앞에서 오히려 작게 느껴질 정도다.


한편, 황금부동산을 운영하는 ‘마씨’는 추리닝청년과 목씨를 꾀어 사기극을 꾸미려는 인물로, 평생 사기를 치며 살아왔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이며 기회이다. 그런 그의 직업이 부동산 중개업자라는 사실은 집 역시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부를 증식하기 위한 도구가 된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시민들의 블랙코미디


 

FBFBA528-DE14-4EF7-99C2-BD153A96E84E.jpeg

 


연극의 전체적인 틀은 마씨를 필두로 추리닝청년과 목씨가 함께 채씨를 속여 한탕 해 먹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연극은 철두철미한 사기극이 아니라 조금씩 모자란 이들이 펼치는 허술하고 어설픈 사기극을 그린다. 또한 극이 진행되며 드러나는 인물 각각의 면모는 일종의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채씨가 홀로 등장해 과거를 그리워하며 진지한 장면을 만들어내면, 다음 장면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조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아들의 교육비를 대느라 집과 과수원을 판 추리닝청년의 부모는 요즘 가장 얼굴이 밝은 친구가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아 빚이 없는 친구라며 농을 던진다. 학원차를 운전하는 추리닝청년의 어머니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데, 그 이유는 학원 측에서 영어에 능통한 운전기사가 차를 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공부를 출세의 도구로 삼으려다 실패한 추리닝청년네 가족이지만, 그런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 역시 사교육 시장이라는 역설적인 현실은 오늘날 도구로 전락해버린 학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공연은 입체낭독극으로 진행되었기에 인물들의 대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특히 추리닝청년과 마씨의 대화, 목씨와 목씨 아내의 대화에서 그 장점이 잘 드러난다. 이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왜 취업을 못했냐는 질문과 사회성이 없어서 그랬다는 대화, 보이스피싱 범죄자에게 음식과 술, 담배까지 대접한 목씨와 그를 구박하는 아내의 대화가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된다. 해결책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차라리 한탄에 가까운 모양새로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채씨를 속이는 이들 셋은 일상 어디에서나 마주칠 듯한 소시민이다. 이들의 사기 행각도 대단할 게 없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추리닝청년이 사람들을 꾀어내면 배 만드는 재주가 있는 목씨가 목선을 만들고, 마씨는 모든 과정을 지휘하며 이들의 돈을 갈취해 나눈다. 목선 하나로 북에 갈 수 있다는 말 자체는 누가 보기에도 허황되지만 어떻게든 북에 갈 방법만을 찾아 헤매는 이들은 쉽게 속아 넘어간다. 속는 이들의 간절함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허술한 사기 수법은 상황을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속고 속이는 디스토피아


 

86FE66CA-8655-41A1-934B-632114302516.jpeg

 


<목선> 전체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기만’일 것이다. 마씨는 평생 남한테 사기를 치며 살아왔고, 목씨는 보이스피싱에 속아 전 재산을 잃었다. 추리닝청년네 가족은 공부만 잘하면 인생이 잘 풀릴 거라는 세상의 거짓말에 속았다. 속이는 쪽보다 속는 쪽이었던 추리닝청년과 목씨는 처음에는 채씨에게 사기를 치자는 마씨의 제안에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며 거절한다. 그랬던 이들이 결국 마씨에게 협력한 까닭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목씨는 아내가 수박밭에서 수박을 나르다 넘어져 일을 쉬게 되자 당장 생계가 어려워졌다. 추리닝청년네 부모는 학원 차량을 운전했지만 아이를 차에 방치했다는 오해를 받아 일이 끊긴다. 속던 사람들은 당장 먹고사는 일 앞에서 속이는 사람이 된다. 첫 번째 피해자인 채씨를 속일 때만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이들은 극 말미에서는 ‘전문가’가 되어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속는 쪽에서 속이는 쪽이 되자 이들은 비로소 능력 있는 아들과 남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들이 속이는 것은 북으로 가기를 원하는 실향민들만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속이는 상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를 테면 채씨를 목선에 실어 보내면서도 작은 모터를 달아 두었으니 운이 좋으면 북에 도착했을 거라고 믿는 식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실향민에게 사기를 치면서도 어차피 나이가 많아 곧 죽을 거,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줄 수 있으니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기는 사기지만 '완전히 나쁜 사기'는 아니라며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만은 또 다른 기만을 불러오고, 어느덧 이 사회의 새로운 법칙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기만은 지속될 수 없는 임시방편이라는 것이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뉴스 앵커가 최근 동해안에서 목선이 자주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노인들의 시체가 들어 있다는 뉴스를 보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속이며 애써 외면해왔던 진실은 바로 자신들이 힘없는 노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들의 돈을 갈취해왔다는 것이다. 연극은 진실을 마주한 목씨의 모습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진실 앞에서 이들은 또 다시 눈을 감고 한 번 더 스스로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속이는 길을 택할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선택을 찾아낼까. 관객은 이들이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라겠지만 그 방법이 무엇일지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연극 바깥 역시 누군가에게 속거나 누군가를 속이지 않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세상이기에.

 

 

[김소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