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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환상과 피난처 -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도서]

나를 지켜줄 예쁜 돌은 없지만

by 장유진 에디터
2026.05.02 17:47

 

 

*

이 글은 도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상 밖이었다. 책 제목만 보면 꽤 묵직한 장편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제로 마주한 책은 뜻밖에도 얇고 작았다. 다루는 주제나 제목이 풍기는 무게가 가볍지 않아서, 이 작품 역시 많은 페이지 속에 깊이 잠겨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다. 거의 한숨에 읽었다.


그 얇은 책이 품고 있는 이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는 프랑스 혁명기 공포정치 속에서 실제로 처형된 콩피에뉴 가르멜 수녀들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그 사건은 독일 작가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의 소설 『단두대의 최후 여인』을 거쳐, 다시 베르나노스의 언어로 옮겨졌다.


베르나노스는 이 소설의 영화화를 위한 대사 집필을 맡았지만, 육필 원고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고, 사후에 그 원고는 연극 대본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로 정리되어 세상에 나왔다. 이후 이 작품은 프랑시스 풀랑크의 오페라로도 이어지며 또 다른 무대의 언어를 얻었다. 그러니까 내가 손에 쥔 것은 작고 얇은 책이었지만, 그 안에는 실제 사건과 소설, 영화와 연극, 오페라의 시간이 겹겹이 접혀 있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공포 속에서 태어나고, 공포 속에서 살아온 귀족 여성 블랑슈 들라포르스가 있다. 블랑슈는 세상의 두려움을 피해 수도원에 들어가지만, 혁명의 폭력은 그곳까지 밀려든다. 결국 그녀는 순교 서원을 뒤로하고 도망치지만, 동료 수녀들이 단두대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 군중 속에서 다시 나타나 죽음의 자리로 걸어간다.


책은 대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나만의 상상을 깊이 끼워 넣기보다 그들이 이렇게 움직였겠구나, 이렇게 말했겠구나,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었다. 감정이 길게 설명되지 않아서 오히려 말과 말 사이의 빈칸이 또렷했다. 누군가의 공포가 설명으로 부풀려지지 않고, 대사 한 줄과 정적 하나에 담겨 그대로 놓여 있는 느낌이었다.


다만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나올 때면 잠시 길을 찾아야 했다. 무신론자인 내가, 내 세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그들의 믿음 앞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래 헤맬 일은 아니었다. 그들의 신념과 내가 맞닿아 있지 않아도,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분명히 있었고, 내가 눈을 맞출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블랑슈였다.


내가 종이 위에서 마주한 블랑슈는 흔히 말하는 주인공답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자리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신앙 안에 단단히 놓인 사람도 아니었고, 도망쳤다고 해서 세속의 삶으로 완전히 돌아간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늘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반대편으로 도망치고, 살아남기 위해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도망친다.


블랑슈의 도망은 이상하게 내게도 익숙했다. 나 역시 자주 버티겠다고 말해놓고, 조금만 흔들리면 내가 설 자리를 의심한다. 더 노력하면 될 테지만, 이미 모난 구석은 여전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무능한 인간인 것인가. 하루를 멀다 하고 도태되고 있는 것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자주 그렇게 느꼈다.

 

페이지가 비어 있을 때에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점들이 길게 나열된 모습을 볼 때에는 한동안 멍하니 머물렀고, 조금이라도 다시 읽히는 구절에는 페이지 끝자락을 색종이 접기하듯 접었다. 대화를 더 나눠보고 싶었다. 꾹꾹.

 

 

앞표지.jpg

 

 

 

진짜 꿈, 그럴듯한 환상



 

원장 우리가 짚어보아야 할 것 중 제일 위험한 것은 우리가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블랑슈 제가 환상을 품고 있을 수 있겠지요. 제발 누군가가 제게서 이 환상을 없애주면 좋겠습니다.

 

 

수도원은 블랑슈에게 믿음의 자리이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공포를 피해 잠시 몸을 숨긴 곳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대화는 믿음에 관한 문답이면서도, 블랑슈가 자신이 무엇을 피해 이곳까지 왔는지를 처음으로 돌아보는 장면처럼 읽혔다.


그런 마음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나 역시 꿈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 어느 순간 피난처처럼 느껴지고, 간절했던 마음마저 슬쩍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다. 이상이 허상으로 보이고, 며칠을 웃게 한 환희마저 허황되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땐 결국, 아 어젯밤에 참 늦게 잤구나, 정신 건강에는 체력이 가장 중요하구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닿는다. 그러다 문득 묻게 된다. 나는 왜 진짜 꿈을 꾸지 못할까. 불안정함을 끼고 살아보겠다고 스스로 호언장담해놓고도, 왜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 지레 짐작할까.

 

첫날에는 뭐든 할 수 있다 여기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면 이뤄내지 못한 채 말없이 서 있는 장면을 나 홀로 상상하며 가라앉는다. 애초에 꿈이라 부르던 것이 진실로 그곳에 있었던가. 사실은 그럴듯한 환상을 꿈이라 부르며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연초에 어려운 약속을 하나 했다. 2026년에는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하고 나니, 되레 불행해졌다. 내 염원은 내 자리에 있지 않고 저 가로등 아래에서나 반짝이니, 어떤 즐거움이 있어도 저곳에 미치지 못해 불행했다.


모든 게 바람처럼 이뤄지지 않은 채 멈춘 듯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4월 말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계획대로 무언가 이뤄지지 않으면 조용히 짜증을 내는 나 자신이 그 불행의 화근이었다는 것도, 그즈음에 알았다.

 

그래서 블랑슈의 환상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녀가 수도원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 신앙인지, 안전인지, 아니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이었는지 끝내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구분이 흐려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꿈이라고 불러야 겨우 붙들 수 있는 마음, 환상이라고 인정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블랑슈의 수도원은 나에게도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내가 자꾸 숨으려는 마음의 모양으로 읽혔다. 꿈과 환상과 피난처가 서로의 이름을 빌려 입을 때,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책은 그 질문을 대답으로 풀어주지 않고, 블랑슈의 흔들리는 목소리 안에 가만히 놓아두었다.

 

 

 

예쁜 돌 하나



 

블랑슈 사실 제겐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원장 우리 수도회 ‘규칙’은 피난처가 아닙니다. 내 딸이여, ‘수도회 규칙’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원장의 말은 수도원을 피난처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블랑슈가 들어간 곳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오히려 자기 두려움을 더 선명하게 마주해야 하는 자리였다. 바깥의 폭력으로부터 잠시 몸을 숨길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은 블랑슈를 보호하는 벽이 아니라, 더 이상 무엇 뒤에도 숨을 수 없게 만드는 방이었다.


그 문장을 읽고 나서야 나 역시 자꾸만 어떤 이름 있는 장소를 피난처처럼 상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맞다. 맞는 것 같다. 어디서든 혼자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기대지 않겠다 말은 해도,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어떻게든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 딱 내 주변 사람들보다 뒤처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거의 휩쓸려 있는 것 같다.


반 발자국만 뒤에 있어도 괴롭다. 딱 맞거나, 내가 조금 더 앞에 있어야 한다. 다 부질없다고, 아무도 관심 없다고 말해도, 결국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에 살다 보면 내 앞가림에 대한 생각을 피해 갈 수가 없다.

 

안정감이 뭐라고. 완전함이 뭐라고. 내 표면이 매끄러워진다고 주변이 뒤바뀌는 것도 아닌데, 주머니 속에 예쁜 돌 하나를 넣어둔다고 내가 완벽해지는 것도 아닌데. 나를 보호해낼 매끄러운 코팅지, 혹은 끝내 나를 지켜줄 예쁜 돌 하나를 평생토록 찾아다니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블랑슈에게 수도원이 피난처가 아니었듯, 내가 상상하는 안정감 역시 나를 대신 살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이름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덜 흔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흔들리는 몸으로도 그 규칙을 지키거나, 그 자리에 남거나, 적어도 내가 무엇 뒤에 숨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의 수도원은 더 이상 아름다운 은신처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블랑슈에게도, 내게도, 숨을 곳이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자리였다. 피난처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나를 대신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 어쩌면 이 책은 바로 그 잔인하고도 다정한 사실 앞에 사람을 세워두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움


 


기사 공포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닐까. 그 공포도 결국은 다른 공포보다 명예로울 게 없다. 죽음을 무릅쓰듯 공포도 무릅쓸 줄 알아야 한다. 참된 용기는 그렇게 무릅쓰는 데 있는 것이야.

 

 

용기는 두려움을 없애지 않는다. 블랑슈가 마지막에 죽음의 자리로 향한다고 해서, 그녀가 갑자기 담대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공포를 벗어던진 사람이 아니라, 공포가 남아 있는 몸으로 한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다.


공포를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앞을 지나가는 일. 그래서 이 문장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두려운 게 많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조금만 관점을 바꿔도 이게 무서워할 일이 아니라, 몰라서 불안해하는 것임을 나도 안다. 한 발짝 내딛는 일에도 신경이 예민해지고, 괜스레 뒷목이 뻐근해진다. 괜찮다, 괜찮다 생각은 해도 떨리는 목소리나 잔뜩 굳어버린 미간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피한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뒤로 도망치면 도망친 대로 무너진다.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고 스스로 거짓말도 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죄책감이 될 때도 있다. 나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는 일보다,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더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그래서 블랑슈가 더 선명해졌다. 그녀는 내게 용감한 사람이라기보다, 두려움을 가진 사람에 가까웠다. 도망치고, 떨고,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그러면서도 끝내 어느 순간에는 자기 발로 다시 나타나는 사람. 나는 그 모습 앞에서 조금 안도했다. 두려움을 가진 채로도 사람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블랑슈를 쉽게 숭고한 인물로 올려놓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끝까지 흔들리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좋았다. 공포를 이긴 사람이 아니라, 공포를 안은 채로도 사라지지 않은 사람.

 

 

 

겸손



 

마리아 수녀 교만을 낮추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뿐입니다, 내 따님. 그러나 덩치 큰 고양이가 쥐구멍에 억지로 들어가려고 할 때처럼 몸을 구겨 박는 것이 겸손해지는 법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우선 품위와 평정에 있습니다.


마리아 수녀는 지나가며 약간 구부정해진 블랑슈의 허리를 가만히 붙잡아준다.


꿋꿋이 펴시오.

 

 

마리아 수녀는 블랑슈에게 자신을 낮추지 말고 허리를 펴라고 말했다. 겸손은 몸을 구기는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의 겸손은 작아지는 자세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몸을 바로 세우는 태도에 가까웠다.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일과, 품위를 잃지 않은 채 낮아지는 일은 전혀 다른 것일 텐데, 나는 자주 그 둘을 착각한다. 작아지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고, 먼저 나를 낮추면 아무도 나를 더 아프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약점을 보이지 말라 했는데, 굳이 앞서 말을 꺼낼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일에 가장 관심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잠깐의 정적을 못 참고 스스로를 놀려대며, 남을 치켜세우는 말을 꺼내버리는 때면, 그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가 작아진다.


처음에는 나만 했다가, 점점 초등학생만 해졌다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러다 오른손만큼, 그리고 작은 손톱 위에 앉을 수 있을 만큼 쪼그라든다.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며칠 있으면 까먹을 걸 나도 잘 알지만, 그 말을 겪어내야 하는 상황 안에서의 나는 내 작은 입 하나에서 나온 말 하나에 몸부림을 친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겸손이라는 이름 안에서 언제까지 나를 작게 만들 것인가.


그래서 “꿋꿋이 펴시오”라는 말은 단순한 자세 교정처럼 읽히지 않았다. 그 말은 블랑슈에게도, 내게도, 두려움을 없애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떨고 있어도 허리를 접지는 말라는 말. 작아지는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하지 말라는 말. 부끄러움 속에서도 자기 몸의 크기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말라는 말이었다.


블랑슈가 수도원 안에서도 완전히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말은 더 오래 남았다. 이미 올곧은 사람에게 허리를 펴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겁먹은 사람, 숨고 싶은 사람, 자꾸만 자기 몸을 구겨 넣으려는 사람에게 “꿋꿋이 펴시오”라고 말하는 일은 다르다. 그 말은 블랑슈를 꾸짖는 대신, 그녀가 아직 포기하지 않은 자기 자신의 크기를 기억하게 만든다.

 

 

 

가장 솔직한 말



 

마리아 수녀 내 딸이여, 범죄만이 끔찍한 것입니다. 무죄한 자들의 생명 희생으로 그 끔찍함은 지워지고, 범죄조차 거룩한 자비라는 질서 안에서 그를 통해 회복되는 것입니다.


블랑슈는 발을 동동 구른다.


블랑슈 저는 그분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아요! 저도 죽고 싶지 않아요!

 

 

거룩함이나 희생이나 순교보다 앞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블랑슈가 마지막에 죽음의 자리로 걸어갔다고 해서, 그녀가 두려움을 완전히 이긴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두려움이 남아 있는데도 끝내 자기 안에서 가장 솔직하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외면하지 못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


내가 블랑슈와 눈을 맞출 수 있던 것도 죽음을 향해 가는 장면이라서가 아니라, 두려운 사람이 끝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념보다 몸이 먼저 떨리고, 기도보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사람이라서. 성스러운 인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라서.


나는 어떤가?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여름이 오려나. 여름이 오겠구나. 어떻게 될까. 어떻게든 되겠지. 또 다른 꿈을 찾아볼까. 그저 머물러볼까.

 

대답을 찾으려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 말들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사실 나는 꿈을 오래 믿는 일이 무섭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그냥 잘 모르겠다. 진짜 꿈과 그럴듯한 환상과 피난처처럼 생긴 마음을 아직 잘 구분하지 못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이상하게 말보다 정적이 오래 남았다. 대사와 대사 사이, 누군가의 대답이 멈춘 자리, 두려움이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순간들이 오래 남았다. 어쩌면 그래서인지, 요샌 음악도 잘 안 들린다. 그래서 지금은 안 들리는 대로 두고 있다.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닐 테니까. 멍한 채로도 남아 있을 수는 있을 테니까.


다만 이 상태를 너무 오래 피난처처럼 여기고 싶지는 않다. 모른다는 말 뒤에 숨어 있으면 잠깐은 편할지 몰라도, 그 편안함이 나를 아주 멀리 데려다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자꾸 어디에 숨고 싶어 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정도면 지금은 됐다. 음악이 다시 잘 들리게 될 때까지, 마음이 조금 더 분명해질 때까지, 우선은 모르는 채로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모르는 채로 멈춰 있지는 않기. 겁이 나면 겁이 나는 대로, 조금씩만 다시 움직여보기.

 

블랑슈가 마지막에 두려움을 벗은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두려운 채로 다시 나타난 사람이라면, 나 역시 지금은 그 정도의 움직임만 믿어도 될 것 같다. 완전한 확신도, 안전한 피난처도, 나를 대신 지켜줄 예쁜 돌 하나도 아직은 없지만.


멍한 채로도, 이제는 조금씩 피난처를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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