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와 비슷한 또래의 음악가들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삶이나 생각에 대해 이따금 숙고해보곤 한다. 예술만큼 평가받기 어렵고 억울한 장르가 또 있을까? 아름다움의 기준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 정해 둔 것 아닌가. 그래서일까, 차라리 공부가 더 쉽다는 말이 가끔은 이해가 된다. (물론, 여전히 어렵지만)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 ‘음악’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소리쳐야 한다는 건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일이다. 거짓 없이 녹아 있는 형체. 그 안에는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이브한 마음이 두근거리며 살아 있다. 그런 것을 감히 평가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의 잣대로 그것이 바라보아진다면, 그 평이 어떤 방향이든 내 앞에 ‘쿵’ 떨어지는 순간—꽤 부끄럽고, 소름이 돋을 것 같다. (우다다—후기를 써내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 2025년 5월 26일
1. 들어가며 – Little thing? little?
ⓒ 장유진
“이까짓? 이까짓 것??”
아마 본격적으로 공명하기 시작한 게, 이 대사 부근이었던 것 같다. 20일, 연극 <삼매경>의 막이 오르고 무대 양옆 티비로 배우들의 대사 타이밍에 맞춰 외국인 관객을 위한 영어 자막이 동시 출력되고 있었다.
나는 이 대사를 토해내던 지춘성 배우의 포효 섞인 아우성을 기억한다. 어딘가 모르게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저 말 자체를 실제로 들었던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성마른 시선과 몇 마디 말씨에서 느낄 수 있다. 아, 그것들은 모두 ‘이까짓’이었다. 무슨 뜻인가? 겨우 이만한 정도의 값어치다.
34년 전 연극에서의 실패를 잊지 못한 주인공이, 망상과 저승, 과거를 헤매는 시선 속에서 ‘연극’이라는 것이 ‘이까짓’으로 평해진다면, 그걸 어떻게 참아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내 글쓰기도 누군가의 “에게?” 같은 반응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을까.
삼매경은 1991년 연극 동승에서 도념을 연기했던 배우가, 34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실패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연극이 뒤섞인 무대 위에서, 그는 다시 자신과 마주한다. 젊은 시절의 자신이 나타나 죽음을 건네지만, 그는 끝내 과거로 회귀하고, 기억과 환영, 무대와 자아가 뒤얽힌 삼매경 속에서 완전히 하나 되지 못한 역할과 삶을 다시 껴안는다.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기 존재를 되묻는 깊고 고통스러운 내면극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대상이나 관심사에 ‘진심’이었던 사람은 안다. 무언가를 아끼기 시작하면,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물음의 밑바탕에는, 대개 자연스러운 기대가 따라온다.
“내 마음을 존중해 줘. 내가 사랑하는 이걸, 너도 기쁘게 바라봐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은 넓고, 타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내게 관심이 없다. 사람 자체에도 흥미가 없는 이들인데, 그 내밀한 취향이 어디 눈짓 하나라도 받을 수 있을까. 어떤 다짐으로 마음을 드러낸다 해도, 듣는 이에게는 그저 안 궁금한 사람이 내뱉은 안 궁금한 말 몇 마디일 뿐이다.
그 정도의 대접이니, 속 시원히 털어놓는 순간 얼마나 큰 상처를 입을까.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그저 꽤 순수한 형태의 대답을 듣고 싶었겠지. 진심으로 건네는, 아주 작은 존중 같은.
사실,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이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나와 전혀 다른 타인에게, 내가 바라보는 것을 나만큼 품어달라는 건—이미 선을 넘은 기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입을 다물게 된다. 스몰 토크로 흘리기도 싫다. 괜히 입에 올렸다가, 다치는 건 늘 나니까.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언성의 방향을 앞에서 뒤로 되돌린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가? 목에 말문이 턱 걸린 내가 번듯이 서 있다.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기 시작한다.
너는 이걸 왜 좋아하는가? 어떤 이유에 끌렸는가? 너는 누구길래, 이걸 여기까지 끌고 와서 매일 사유하는가?
그 반복의 되새김 속에서 돌아오는 것은 기쁨도 있지만, 고통도 있다. 그 고통의 기반에는 무엇이 자리하는가? 해결되지 못한 고독감과 불확실성일 것이다. 왜?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는데도 불필요한 잡념이 스치는가? 어쩌겠나. 우둔하여 잊지 못하였다. '이까짓'을 들어버린 처지 아니던가.
사람들이 선플 오천 개가 달려도 악플 하나에 마음이 좌초되는 것처럼, 내가 애정을 듬뿍 주고 바라보던 것에 대한 ‘겨우 이만한 것’ 취급의 상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딱지가 금세 차오르지 않는 것이다. 왜?
놓지 못하는 것이다. 놓을 수 없다는 느낌이 뭔지 아는가? 훗날 언젠가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을 수는 있겠지만, 오늘의 나는 당장 목이 터지라 갈구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생활과 환경은 제쳐두더라도, 그것을 매일 반복하지 않으면, 삶의 근처에 두지 않으면 온몸이 가려워 살갗을 찢어버리고 싶어진다.
그 ‘무언가’ 때문에, 매일같이 아이러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있다.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이 연극의 주인공 지춘성이고, 고용선, 곽성은, 김신효, 서유덕, 심완준, 윤슬기, 이강민, 정주호, 정홍구, 조성윤, 조영규, 조의진, 홍지인이다.
왜 모든 배우의 이름을 나열했는가?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극을 이끌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찌나 빛이 나던지, 어찌나 번뜩이던지. 배우는 늘 앞을 응시한다. 그 시야의 끝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새카만 허공일까? 누군가의 얼굴일까?
2. 진심 투성이 – I feel it. I see it.
ⓒ 장유진
그들은 관객 앞에서 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다. 내뱉는 대사, 마주한 시선, 희번득한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강렬한 빛을 내는 유성이 그들의 왼쪽 눈동자에 박혀 있다. 왜 하필 왼편의 눈인가? 모르겠다. 적어도 내 시야에서는 그 안에서 유성이 번뜩였다.
보통 나는 클래식 연주자의 무대를 감상할 때, 그들에게서 ‘빛’을 찾는다. 악기 위에서, 몸짓에서, 눈빛에서, 표정에서, 그리고 소리에서—그날의 연주자와 시선을 마주하곤 했다. 그렇다면 연극의 배우들은 어떠했는가? 그런 상념을 끼워 넣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감히, 캐릭터의 이면에 있는 ‘개인’을 마주할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무대 오르기 전, 그들은 자신의 모든 걸 ‘버려둔 채’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완전히 ‘빙의’해 있었다.
몰입이 아니었다. 그들은 몇 자의 한글로 내려쳐진 대사 몇 줄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어디서 그토록 선명하게 느껴졌을까? 그들은 2시간의 어둠의 장막과 빛의 언저리에서 어떤 자세로 서 있었던가.
단 한 명도 포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단 한 명도. 이 연극 위에 오른 자 중에 숨죽인 이는 없었다. 그 모습이 오래 각인됐다. 클래식을 좋아하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사람이 등장하는 극보다는 악기의 소리가 중심이 되는 공연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의 배우들은 내게 ‘너도 사람이야.’를 몸소 일깨워냈다. 감히? 네가? 인간인 주제에?
극 곳곳에는 관객의 재미를 위한 환기성 농담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한두 번의 피식거림을 제외하곤, 내게 웃음이 나던 장면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웃을 수가 없었다. 그 몇 주의 ‘삼매경’을 위해 뛰어든 사람들의 마음이 곳곳에 처절하게 서려 있어서,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얼마나 진심이었을까? 얼마나 값진 순간이었을까? 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그 값어치를 아는 사람들이 피워낸 연기는, 눈빛부터 관객을 마주하는 태도까지, 때깔이 다르다. 나는 이 연극이 오늘 일회성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을 이렇게 쓰는가?)
분명 공연이 끝나고 나면 배우 전체가 목이 단단히 쉬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20일 ‘예술가와의 대화’ 시간에서 마주한 그들은 아까의 기세와는 달리 수줍고, 기가 연극에 단단히 빨려 있었을지언정 목청은 또렷했다. (이것이 프로인가?)
무대가 막을 내리고, 관객석의 어둠이 걷히고,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프로그램 종이의 흰 볼드체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내 막이 오르면. 너와 내가 마주하며 연극은 시작되지.”
지춘성 배우가 노란빛 조명 아래에서 독백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왼손을 동그랗게 말아 배우를 나의 작은 동그라미 안에 가두어 놓았다. 한 사람이 내 포커스 가운데에 놓여져 있었다. 지춘성 배우와 내가 눈을 마주친 순간, 알았다. 여기서 ‘너’는 나구나.
그의 시선 끝에는, 끝내 완벽히 해내지 못한 그날의 ‘도념’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눈앞에 나를 세워 두었다. 그래. 그는 도념을 바라보고, 나는 그 움츠러든 어깨의 주인공을 보며, 어떻게 이 삼매경을 헤매어 돌았던가? 나열해보자.
ⓒ 장유진
시작부터 이 연극은 다른 연극들과 차별성을 두겠다는 의도를 뚜렷이 드러냈다. 일행과 공연장에 도착한 건 공연 10분 전이었는데, 이미 연극은 시작되고 있었다. 무대 위엔 배우들이 있었다. 새카맣고 얼룩진 무대 위에서, 나뭇가지를 닮은 채도 낮은 나무기둥, 잔바람, 흙의 색과 닮은 의상을 입고 각기 다른 자연물을 묘사하며 프롤로그를 진행하고 있었다.
풍경이 있었고, 토끼, 새, 나무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몰랐다. …55분쯤에 살짝 후회했다. 더 일찍 들어올걸! 그때 프롤로그에서 기억에 남는 건, 맨 앞에서 뱀을 묘사하듯 혀를 날름거리던 배우의 연기였다. 어찌나 프로페셔널하게 연기하시던지, 입장하자마자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크게 당황했다. (메롱메롱)
약속한 시간인 3시가 되었다. 곧장 관객석과 무대가 동시에 암전되었다. 다시 앞의 문장을 되새겨보시라. 무대까지 암전된다. 보통 무대는 조명이 켜지지, 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연극은 온 세상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리고는 사람과 바람의 목소리로 공간을 압도한다.
동시에 밀려드는 입체감에, 롯데월드 놀이기구 ‘혜성특급’이 출발하기 직전의 5초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왜 위에서 아래로 쏠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까? 청각적으로 강한 하향의 대각선 흐름이 내 발끝까지 끌어내리는 듯했다.
이 연극은 무대의 미적 디자인, 조명의 활용, 헤이즈 머신의 등장까지—모두가 극적이었다.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는가? 사실 무엇 하나만 뽑아서 고른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이 연극은 실제 공연장에서 그 색감을 마주해야 한다. 새카만 장막 안에서, 탁—흰 조명이 떠오르는 타이밍. 어머니가 무대 위에 등장하는 순간의 안개. 핏빛 조명. 시냇물에 뚝뚝 떨어지던 빛가루를 닮은 물방울. 과거의 대사와 오늘의 대사가 맞붙고, '과거'의 도념과 떠나지 못한 '오늘'의 배우가 대사를 이어받고, 되풀이하는 장면. 재가 되어 사라지는 순간의 불꽃. 찻잔을 손에 얹은 채, 그림자를 드리우는 얼굴.
그리고—지춘성이 어린 도념을 저버리는 순간. 조성윤 배우의 작고 어리숙한 까만 뒷모습과, 지춘성 배우의 거대하고 새카만 그림자가 떠오른다.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도념의 옷자락이 기억에 남는다. 연기자들은 그림자로도, 의상으로도 서사를 이끌어낸다.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사. 분위기 전환, 그리고 전개의 속도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매 순간이 프레스토(presto, 매우 빠르게)였다. 숨을 멈출지언정, 정지 버튼이 눌린 적은 한 순간도 없다. 관객에게 지루할 틈 자체를 주지 않는다. 배드민턴 공의 끊임없는 랠리 같았다.
딕션은 어찌나 정확하고 뚜렷했는지 모른다. 에어컨 세기(시원함이 삼도천 급)도, 연기의 강도도 하나도 빠짐없이 포르티시모(fortissimo, 매우 강하게)였다. 그런데도 관객에게 부담스럽거나 과하게 치닫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어도, 적어도 흐름을 놓치거나 이야기의 리듬에서 밀려난 이는 내 시야에선 단 한 명도 없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터져 나온 우레와 같은 박수, 벌떡 일어나던 관객들만 있었을 뿐이다.
발성. 목소리. 외침. 아우성. 통제할 수 없는 강한 외부적 자극에 정말 기절할 뻔했다. 순간 내가 뮤지컬을 보러 온 줄 착각할 정도였다. 어찌나, 얼마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지 모르겠다. 인간 자체의 목소리였다. 유달리 다듬었다는 느낌이 없는, 날것의 울림을 그대로 살려냈다.
생각해 보면, 캐릭터마다 서로 다른 헤어스타일이나 체형, 연기 톤을 갖고 있었다. 누구는 폭탄 머리, 누구는 긴 생머리, 단발머리, 마른 체형, 긴 체형. 조화롭게 구성된 것도 좋았지만—어떻게 자신이 맡은 역할에 이토록 진심일 수 있는가? 어떻게?
연출도, 내용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극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제외하면) 솔직히 그동안 내가 연극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건, 내용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극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알고리즘에 이쪽 분야의 소식이 잘 뜨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왠지 연극은 ‘오글거리는 대사의 나열’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이 어리석음을 단번에 깨뜨려 준 것이 바로 이 연극, 아니, 내면극 삼매경이다.
삼매경이란 무엇인가? 잡념(雜念)을 떠나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 오직 ‘그것’에 몰입하는 상태. 그래, 나는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을 그 시간 동안 처절하게 목격하고 온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 시간의 값어치는 충분했다.
지춘성 배우가 왜 연극을 놓지 못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랑하니까.”
그래. 사람이 헤매도는 이유가 이거 말고 뭐가 있겠는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스러울지언정, 이 극이 끝이 날지언정, 공허함만이 제게 주어진다 해도, 이 ‘열망’ 때문에 놓을 수 없다.
3. 끝내며 – Which way are you going?
ⓒ 장유진
나 또한, 이러한 게 왜 없겠는가. 이 글도, 앞으로 써내려갈 글도, 어제의 무의식도—이 모든 것이 내가 뻗어낸 삼매경의 증거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심장이 쿵쿵거리고, 마음이 둥둥 떠다니는 ‘무언가’를 품어낸 사람인가? 혹은, 언젠가 품어낼 사람인가? 그렇다면 이 극을 마주해도 좋겠다.
이미 그려진 상처를 처절히 공명해주고, 앞으로 나아갈 이에게는 평생 해결되지 않을 아이러니를 헤쳐 나갈 작은 손수건이 되어줄 테니까. 생각해보면, 나에겐 그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해준 연극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의 말미를 써내려가다 보니, 극 마지막에 등장했던 모래바람 속 ‘그것’이 떠오른다.
한참을 그것과 눈을 맞췄는데, 이곳에 쌓이기 시작한 내 글과 퍽 닮았다. 나의 아트인사이트 글 기고도 막 시작되지 않았던가. 앞으로 무수히 그것들을 나도 내려놓아야 할 텐데— 어떤 고난이든, 일단 써내려 가라는 누군가의 댄디한 협박 같기도 하고. 뭐, 아무튼 그랬다. 두 문장으로 20일의 <삼매경>을 정리하면 이렇다.
세월은 유수와 같고, 인간은 포효하여,
유성을 빛으로 드리워내, 끊임없이 발광한다.
무대부터 움직임까지,
그리하였고, 그리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