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한 사람인지 일찍 결정되는 순간부터 결말이 예상되고, 진지한 사건 한가운데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코미디도 때로는 어색하게 느껴진다. 주인공이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도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장면에서는 현실감보다 장르의 약속이 먼저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내가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이 이야기에 수많은 사람이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왜 다시 악인이 쓰러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일까.
실패한 제도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
이러한 드라마의 출발점에는 대개 제도의 실패가 있다. 경찰이 증거 부족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거나, 학교와 회사가 문제를 은폐하고, 법의 절차가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권리를 더 세심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바로 그 빈틈에서 등장한다. 그는 정의로운 시민이면서 동시에 법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법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을 어기고, 폭력을 막기 위해 더 강한 폭력을 사용한다.
〈모범택시〉의 무지개 운수는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사적 복수를 수행하고, 〈열혈사제〉의 주인공은 종교인과 수사관의 경계를 넘나들며 범죄 조직에 맞선다. 〈김부장〉에서는 평범한 아버지로 살아가던 인물이 딸을 되찾기 위해 감춰두었던 힘을 꺼낸다. 2026년 방영된 〈김부장〉은 전국 시청률 23.0%를 기록하며 SBS 금토드라마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성적을 거두었고,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에서도 3주 연속 1위에 올랐다. 이미 익숙한 구원자 서사가 여전히 강력한 흥행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단순히 강하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제도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한다. 현실에서는 민원을 넣고, 증거를 모으고,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모든 시간이 압축된다. 주인공은 피해자의 말을 곧바로 믿고, 가해자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며, 잘못에 정확히 비례하는 벌을 돌려준다. 현실에서 거의 경험하기 어려운 신속성과 확실성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쾌감이다.
분노를 가장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
사람들은 일상에서 생각보다 자주 분노한다. 부당한 일을 목격하고도 나서지 못하고, 무례한 사람에게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며, 명백한 잘못이 처벌되지 않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나 현실의 분노는 대개 갈 곳이 없다. 직접 행동하기에는 위험하고, 문제를 제기하려면 시간과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화가 났지만 그 감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
사적 응징 드라마는 이 막막한 감정에 방향을 부여한다. 시청자가 현실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분노를 주인공이 대신 사용한다. 그가 악인을 때리고, 함정을 만들고, 죄를 자백하게 하는 동안 시청자는 아무런 책임 없이 복수의 결과만 경험한다. 주인공의 주먹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오래 미뤄진 판결처럼 느껴진다. 현실의 정의가 복잡한 절차와 불완전한 결과로 이루어진다면, 화면 속 정의는 짧고 선명하다.
마동석이 주연한 〈범죄도시〉 시리즈도 비슷한 만족을 제공한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형사가 악인을 제압할 것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거의 의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누가 이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악인이 무너지는지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범죄도시4〉는 2024년 4월 한 달 동안 501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당시 한국 영화시장의 매출과 관객 수를 크게 끌어올렸다. 승패가 정해진 이야기라도 응징이 실행되는 과정 자체가 충분한 볼거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거운 현실을 견디게 하는 웃음
다만 응징만으로는 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 어렵다. 폭력과 피해가 반복되면 시청자는 쉽게 피로해진다. 그래서 이 장르에는 대개 코미디가 함께 들어간다. 조금 전까지 잔혹한 범죄를 다루던 인물들이 엉뚱한 변장을 하고, 작전을 수행하던 동료들이 사소한 문제로 티격태격한다. 나는 이 급격한 온도 변화가 종종 억지스럽다고 느끼지만, 바로 그 불균형이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드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웃음은 사건의 심각성을 완전히 지우지 않으면서 시청자가 감정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드라마는 현실의 범죄와 닮은 사건을 불러오지만, 끝까지 현실과 같은 무게로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주인공에게는 언제든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동료와 농담이 있고, 가장 어두운 사건 뒤에도 다음 회를 볼 수 있는 가벼움이 남는다. 시청자는 분노와 긴장, 통쾌함과 웃음을 한 작품 안에서 차례로 소비한다.
〈모범택시2〉가 전작보다 경쾌한 연출과 다양한 위장극, 인물들의 유사가족 관계를 강화한 것도 이 공식과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성착취, 노인 사기, 사이비 종교, 대리 수술 등 현실을 연상시키는 사건을 다루면서도 부캐와 팀플레이, 코미디를 적극적으로 결합했고, 최종회 전국 시청률 21.0%를 기록했다. 무거운 현실 문제와 가벼운 장르적 쾌감을 교차시키는 방식이 폭넓은 시청자를 끌어들인 셈이다.
어쩌면 이 드라마들은 문제를 깊이 이해하게 하기보다, 문제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쪽을 선택한다. 현실의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릴 수 있지만, 웃음과 액션을 섞으면 불편한 사건도 하나의 오락으로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 코미디는 이야기의 균열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시청자의 감정이 이탈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접착제다.
결말을 아는 것이 주는 안도감
추리극에서는 범인을 알게 되는 순간이 중요하지만, 사적 응징극에서는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그가 언제 벌을 받는지가 중요하다. 악인은 처음부터 악인처럼 등장하고, 주인공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사실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반전보다 예정된 결말이 핵심인 셈이다. 그렇다면 예측 가능성은 이 장르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매력일 수 있다.
현실에서는 선한 사람이 반드시 승리하지 않는다. 잘못한 사람이 사과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처음 기대했던 모습과는 다른 결론에 도착한다. 반면 드라마는 정해진 시간 안에 세계의 질서를 회복한다. 피해자는 위로받고, 악인은 자신의 잘못에 맞는 대가를 치르며, 주인공은 다시 평범한 얼굴로 돌아간다. 시청자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정의가 반드시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놀라운 결말뿐 아니라 믿을 수 있는 결말도 필요로 한다. 주인공이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다. 매회 다른 악인이 등장해도 이야기의 도덕적 질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시즌이 바뀌어도 같은 인물들이 돌아오고, 새로운 사건을 해결한 뒤 다시 다음 출동을 예고한다. 작품은 새로워지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이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일종의 신뢰가 된다.
통쾌함 이후에 남는 불편함
그럼에도 나는 이 장르를 마냥 통쾌하게 바라보기 어렵다. 드라마 속 악인은 대개 의심의 여지 없이 나쁘고, 주인공의 판단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의 잘못과 책임은 그렇게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참교육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폭력도 정의로운 사람이 사용하면 정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위험도 있다.
화면 속에서는 주인공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정확한 사람을 처벌한다. 현실의 사적 제재에는 그런 전지적 시점이 없다. 잘못된 소문이 사실처럼 퍼지기도 하고, 분노의 대상이 된 사람이 해명할 기회를 잃기도 한다. 한 사람이 정의라고 믿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이나 모욕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 ‘참교육’은 악인을 제압하는 시원한 장면이지만, 현실에서 같은 말은 누군가를 마음껏 공격해도 된다는 허가처럼 사용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드라마를 보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허구의 복수와 현실의 폭력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시청자가 단순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어떤 장면에서 가장 크게 웃고 박수를 보내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법이 실패한 뒤 폭력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즐긴다는 것은, 폭력을 좋아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제도적 해결을 더 이상 충분히 믿지 못한다는 신호일 수 있다. 통쾌함 아래에는 생각보다 깊은 체념이 놓여 있다.

나는 여전히 이 공식에 크게 끌리지 않는다. 예상 가능한 승리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인물에게 더 마음이 가고, 악인을 쓰러뜨리는 장면보다 한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오래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 장르의 인기를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장면에서 안도한다면, 그 안도에는 지금의 사회가 충족시키지 못한 어떤 감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의가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화면 속 주먹은 악인을 쓰러뜨리고 이야기를 끝내지만, 현실의 문제는 엔딩 자막 뒤에도 계속된다. 그래서 한 편의 통쾌한 드라마가 끝난 뒤 남는 질문은 주인공이 얼마나 강했는가가 아니다. 우리는 왜 정의를 상상할 때마다 제도보다 먼저, 누군가의 압도적인 힘을 떠올리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