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고 사라지는 것들
우리, 춤추러 가지 않을래? 이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가. 고백하건대, 지금 나에게 "당신을 가로막는 모든 제약이 사라진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춤을 추며 살아갈래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것이 귀가 터질 듯 울리는 테크노 음악이 가득 찬 클럽에서든, 사람들이 손안의 작은 화면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지하철에서든, 아무도 없는 바람 부는 들판에서든, 온몸의 뼈가 흔들리는 게 느껴질 때까지 춤을 출 것이다.
얼마 전 기고한 글에서 박시영 디자이너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기준이탈모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미적 취향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한 것은 ‘표정’이었다. 사람은 절대 얼굴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표정 안에는 그 사람의 역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담겨 있다고. 그 말은 내 안에 꽤 깊게 박혔고, 울티마 베스의 ⟪보이드⟫를 관람하고 온 날 밤 갑자기 내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만히 있는 얼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몸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불뚝 나온 배, 비뚤어진 골반, 말린 어깨처럼 가만히 두었을 때 가혹한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사실은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이라면. 몸이라는 게 다양한 형태를 가질 뿐, 고정된 형태를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어쩌면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 하나의 형태를 부여한다.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남을 속속들이 알고서 살아갔는가. 우리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불과하지 않는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조각들로 재조립된, ‘내 입맛의’ 그 사람 아니던가.
더 이상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스스로를 잘 모른다. 내가 왜 갑자기 어떤 냄새를 그리워하는지,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장면이 왜 불쑥 떠오르는지, 어떤 순간에는 왜 이유도 모른 채 울고 싶어지는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말끔하게 이름 붙여지지 않는 부분은 남는다. 어쩌면 그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보이드(void)일까. 텅 비어서인지,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이 들어차 있어서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공간. 그러니 애써 엮은 하나의 매끈한 이야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한 사람 안에서 떠오르고 사라지는 기억과 감정, 이미지와 충동의 파편들이 진실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보이드⟫는 구태여 그것들을 ‘아름다운 몸짓’으로 번역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춤’추려 하지 않는다. 여섯 명의 퍼포머는 각기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들은 퍼포머 각각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해 구축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들의 말과 몸짓만으로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낼 필요도 없다.
무대 위에서 만나는 것은 완결된 여섯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조각들이다. 어떤 기억, 어떤 감정, 어떤 장면. 그것들은 앞뒤가 꼭 맞는 서사가 되기도 전에 몸을 얻고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보이드⟫를 보는 일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것보다, 여섯 개의 머릿속을 잠시 들여다보는 일에 가까웠다. 그곳에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핀란드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기억이 있고, 기묘한 왈츠가 있고, 드럼을 치는 소녀가 있다.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처럼 느닷없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나는 그 조각들을 굳이 하나의 이야기로 맞춰 보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의 몸짓들
단번에 크리스마스라는 걸 알았다. 와, 크리스마스에도 몸짓이 있었구나. 마치 ‘몸으로 말해요’ 퀴즈라도 하듯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튕겨 올랐다.
어두운 무대 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다리에는 커다란 랜턴(lantern)이 매달려 있었다. 랜턴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빛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퍼포머들의 표정이 순간순간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사라졌다. 와인잔이라도 든 듯 동그랗게 말린 손끝과 서로 모였다 흩어지는 몸들. 그만큼의 그림자가 생겨나고, 그림자 속에서는 다시 여러 개의 형체가 뭉쳐졌다.
그리고 음악 대신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엄청난 웅성거림. 수많은 사람의 말, 말, 말. 서로 부딪히고 튕기며 증폭되는 목소리와 웃음소리. 설렘과 기대, 억지웃음과 진짜 웃음.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와 스트레스받은 파티 호스트와 아무 생각 없이 선물만 기다리는 아이들. 적막했던 무대는 단 하나의 조명과 몇 개의 몸짓만으로 순식간에 북적이고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한복판이 되었다.
핀란드를 그리워하는 할머니
공연을 함께 봤던 엄마와 입에 돌아가는 중, 엄마는 나에게 "그래서 그 대머리 무용수는 여자가 되고 싶었던 거야?"라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실제로 마주하면 나를 압도할 것 같은 체격의 무용수가 속이 훤히 비치는 맑은 파란색의 원피스를 입고 구사하는 느릿- 느릿- 한 우아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몸을 익숙한 성별의 언어로 규정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관객과의 대화를 듣고서야 나는 그가 상상치도 못했던 인물, '핀란드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역할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제야 무대 뒤에서 모락모락 새는 김에 휩싸인 타올 두른 여자들, 꿈과 미래가 있는 뉴욕을 떠나 다시 돌아오다니 어떻게 그렇게 바보같을 수 있냐며 그를 꾸짖던 여자, 그리고 기저귀를 찬 것 같은 복장으로 무언가를 향해 달려다가다, 결국엔 좌절하던 그의 몸짓이 떠올랐다.
인생은 메리 고 라운드
여섯 인물이 가진 각각의 이야기가 끝난 후, 퍼포머들은 한데 뒤섞여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인물들에게는 저마다 특유의 움직임이 있다. 어떤 이는 아이가 떼를 쓰듯 팔다리를 마구 흔들고, 어떤 이는 두 다리를 와이드 스쿼트를 하듯 양옆으로 벌린 채 좌우로 움직인다. 어떤 이는 힘차게 공중으로 몸을 날리고, 어떤 이는 ‘크럼프’라는 장르의 춤처럼 몸을 마구 내리찍는다. 또 어떤 이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땅에 있는 무언가를 만지는 것인지 줍는 것인지 모를 동작을 하고, 마지막 이는 형체 없는 힘에 조종당하듯 사지를 뒤튼다. 이러한 움직임은 공연 내내 반복적으로 수행되어, 퍼포머들이 옷을 자주 갈아입거나 상황이 갑작스레 바뀌어도 각 인물을 알아볼 수 있도록 기능한다.
동시에 인물들은 서로의 동작에 크게 영향을 받지도, 상대가 움직일 자리를 내어 주지도 않는다. 서로에게 달려들어 부딪힐지언정 곁을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토록 격렬하게 자기 자신이던 몸들이 서로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퍼포머들은 둘씩 등장해 처음에는 각자 고유의 동작을 보이지만, 이내 한 퍼포머의 몸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다른 이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퍼포머들은 서로의 동작을 빼앗아 제 것인 양 몸을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춤이 바뀐다. 쿵쿵거리는 드럼 비트에 맞춰 그들의 '발'은 서서히 같은 리듬을 연주한다. 동작이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의 발은 더 무겁고, 어떤 이의 발은 더 가볍다. 서서히, 한 짝의 발은 다른 짝의 발과 마주본다. 발에서 시작해 시선을 위로, 위로, 올린다면 그들이 실제로 마주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팔은 치켜올린 채로 눈을 가리고, 얼굴은 상대로부터 돌려 뒤를 보고 있다. 그 이상한 왈츠에서는 발만이, 오직 발만이 함께한다.
그 기묘한 합주를 보며, 올해 초 부산국제연극제에서 보았던 헝가리 공연단의 ⟪메리 고 라운드⟫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온통 헝가리어로 진행되어 자막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 극에는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며 춤추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돌림노래 같은 멜로디와 다리를 쭉쭉 뻗는 화려한 동작들, 여러 개의 발이 동시에 바닥과 마찰하며 만들어 내던 발소리. 그 장면에서만큼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이것이 ‘축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이드⟫의 끝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움직임은 증폭되고 또 증폭되었다. 각자의 몸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다른 몸으로 옮겨 붙고, 서로 뒤엉키고, 마침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이 되었다. 그러다 다시 흩어진다. 하나였던 몸은 다시 여섯이 되고, 각자는 다시 자기만의 몸으로 돌아간다.
마치 회전목마처럼, 인생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 아니던가.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사이를 돌고 도는 것. 그 무엇도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떠난 것들은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얼굴을 하고 다시 돌아온다. 그렇다면 어차피 돌아올 것들을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며 반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동안 잘 지냈는가, 인사하면서. 내 안의 보이드도, 네 안의 보이드도 그렇게 무언가로 채워졌다 다시 비워지고, 또 다른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니 '춤' 추려고 하지 말자. 아름다우려고 애쓰지 말자. 일단 털어보고, 움직여 보자. 춤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