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과 극장
어렸을 적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편을 보고 나서 괜히 부모님 방의 옷장을 뒤적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엄마가 대학생 시절부터 입던 갖가지 소재와 색깔의 코트, 스카프, 원피스, 재킷은 영화 속 옷장의 끝없는 모피코트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옷장 뒤편의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을 허락해 주었다. 오래된 옷들은 세탁이 되어도 특유의 향을 가진다. 시간이 가진 여러 가지 냄새 중 하나는 아마 그 향일 것이다. 오래된 것들의 향 속에 파묻힌 새로운 세계라니, 환상적이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동안 그 옷들 속에 코를 박고 옷장 안쪽의 벽을 짚어보곤 했다.
그 감각을 오래 잊고 있던 요즘, 뜻밖에도 근무 중에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광경을 마주했다.
나는 지금 모 극장의 공연 안내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지금껏 많은 공연을 보고, 또 다양한 극장을 가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안내원의 관점에서 마주하는 극장은 사뭇 낯설다.
“안내원은 극장에 관한 만큼은 자신의 손바닥을 알듯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라고 입사 1개월 차의 기강 잡힌 신입은 철저히 교육받는다. 화장실이 몇 층 어디에, 몇 개가 있는지, 건물 내 카페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는지, 객석에는 좌석이 얼마나 있고 어떻게 구역이 나뉘는지, 주차 정산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질문을 듣는 동시에 답이 튀어나올 수 있게끔 머릿속에서 극장을 그리고 또 그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극장이 하나의 거대한 큐앤에이 질문지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자주, 극장의 환상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극장이 모르는 세계에서 몰라서는 안 되는 세계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럼, 대체 사자와 마녀는 어떻게 만났다는 거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선 먼저 ‘통로’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다리, 문, 구멍, 거울, 우물, 계단 ··· 그래 뭐든.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가 되는 공간.
모 극장의 객석 2층 안내원은 통유리 창과 마주하고 있는 문 앞에서 관객을 맞이하게 된다. 하우스 오픈은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지만, 객석 2층은 좌석이 많이 없기도 하거니와 올라오는 데도 시간이 걸려 실제 첫 관객을 마주하기까지 몇 분가량의 시간이 있다. 낮 시간대의 공연에 출근하면, 이 몇 분 동안 아주 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입장 게이트 앞의 통유리창으로는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극장 안쪽에는 인공조명이 아직 대부분 비어 있는, 새빨간 색의 객석 의자 수백 개를 비춘다. 극장의 문은 대부분 이중으로 되어 있고, 바깥 문과 안쪽 문 사이의 공간을 ‘전실’이라 칭하는데, 이 전실만이 살짝 어둑하여 극장 바깥과 안쪽의 경계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 통로를 열어두고 극장의 세계에서 관객을 기다리며 내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시계를 든 토끼라든가, ⟪한여름 밤의 꿈⟫ 속 요정 퍽이 되었다고 상상해 본다. 물론 주인공을 무시한 채 자기 갈 길만 가거나, 그를 잘못된 길로 유혹하기도 하는 그들보다는 훨씬 친절해야겠지만.
공연 시작 1분 전, 아니 30초, 10초 전까지도 관객들은 통로를 드나든다. 그렇게 정시 입장이 끝나고 나서도 공연 시작 후 마지막 지연 입장이 끝나기 전까지는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그리고 나서도 휴대폰을 켠다든지, 자리를 옮긴다든지, 무언가를 먹는 관객들이 있는지 등 끊임없이 객석을 주시해야 하지만, 가끔은 눈이 미끄러지는 걸 허용해 극장을 살펴보곤 한다. 객석 2층 안내원의 자리에서는 무대가 거의 안 보이기 때문에(운이 좋아 와이어를 쓰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만큼은 실컷 볼 수 있다) 극장 천장에 매달린 수십 대의 조명기, 울퉁불퉁한 벽과 공간을 감싸는 여러 구조의 곡선을 바라본다.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아찔한 높이의 캣워크로 시선을 옮기면 음침하게 공연을 훔쳐보던 오페라의 유령의 흰 가면이 시야 한켠에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본 그때서야 “그래, 이곳이 극장이었지. 무엇이든 펼쳐질 수 있는 세계이자 지금껏 펼쳐진 수많은 이야기의 유령들이 영생을 누리는 세계.”라고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사자와 마녀를 찾아 옷장 안쪽의 벽을 더듬던 시절을 떠올렸다. 엄마의 옷들처럼, 어떤 것들은 오랜 시간 존재함으로써 얻게 되는 향이 있다. 시간이 향 속에 담겨 있다면, 그 시간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 어느 날에 나는 덴마크의 고뇌하는 왕자를 보았고, 어느 날엔 가장 깨끗한 마을 병목안의 괴짜 소녀를 보았다. 어느 날엔 눈 앞의 세계가 반쯤 밖에 보이지 않아 눈을 돌려 오페라의 유령과 여기에 드나 들었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다. 극장이라는 공간은 그런 것 같다. 실제로 이 극장에서 공연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느 극장에서는 살아 숨 쉬었던 이야기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시간 속에 함께 스미는 것이다. 나는 그 케케묵은 시간의 향에 이끌려 다시 한 번 극장에 코를 박고 반대편에서 새로운 바람을 기대한다.
내가 사랑하고 사랑할 극장들
이대로만 끝내기는 아쉬우니 극장 몇 군데를 소개해 보려 한다. 아래에는 내가 문턱을 닳고 닳도록 밟은 극장, 갈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나왔던 극장, 그리고 언젠가 가보고 싶은 극장이 짤막하게 적혀 있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내가 이 중 하나의 극장에서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1. ㅇㅇ 대학의 소극장
나는 약 3년간 ㅇㅇ대학의 극회에서 활동을 했다. 대학 극회 활동을 달리 말하면 학점을 대가로 뜨거운 청춘을 얻을 수 있는 활동이라 하겠다. 그래, 후회... 하지 않는다. 정말로. 얼마 전 극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와 극회의 메인 무대이자 유일한 무대였던 소극장을 떠올렸다. 요즘에는 극장의 조명들이 전부 LED로 바뀌는 추세라고, 아니 사실 한참 전부터 그랬다고 하더라. 좋게 말하면 레트로 한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그 노후화된 시설의 개선에 관심이 없어서, 우리의 소극장엔 영원히 퍼넬(Fresnel) 조명이 쓰였다.
내가 아는 퍼넬 조명과 LED 조명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바로 빛의 색깔이다. 요즘은 LED 조명도 퍼넬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을 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오래 켜두면 살짝 타들어가는 냄새까지 났던 극회 소극장의 구리구리한 노란빛은 아마 그 어떤 LED 조명으로도 재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 소극장의 모든 것이 너무 열악해서 그 모든 것이 더 나의 것 같았다.
좌석 구분도 없이 어떨 때는 10인용이, 어떨 때는 15인용이, 붙어 앉으면 앉는 대로 수용 가능 인원이 바뀌었던 객석 의자는 아무리 공연 시작 전마다 닦아도 항상 회색빛의 먼지가 묻어나왔다. 객석 뒤켠으로는 우리가 '조명 무덤'이라 하는 무더기가 있었는데, 망가지고 부러져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고철의 조명 기기들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정말 무슨 애도식이라도 해줘야 할 것처럼 처참히. 에어컨은 단 한 대뿐이었는데, 솔직히 말해 극장이 너무 좁아서 한 대로도 충분했지만, 현재 온도를 표시하는 파란 전자 불빛이 완전한 암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공연 주간이 되면 우리는 암막 커튼을 개조해서 만든 전용 복면을 에어컨에 씌워주곤 했다. 극장 바닥은 공연을 할 때마다 새로이 검게 칠했는데, 항상 무대 작업의 마지막 날이 바닥을 페인트칠하는 날이었다. 바닥칠을 마치고 소극장을 후련히 나설 때쯤 극회 사람들의 발바닥을 보면 반절 이상이 검은 페인트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극장과, 그 조그마한 극장을 비교할 때면 같은 '극장'이란 이름을 달고도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그 소극장이 간직한 시간은 나의 가장 뜨거웠고 서툴렀던 시절이므로, 그 극장은 나의 일부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곳은 나의 극장이다.
2. 신촌극장
이 극장은 파릇파릇한 스무 살, 친구가 극본을 쓰고 연출한 공연을 보러 가 오열을 하며 나왔던 곳이다. 신촌극장의 인스타그램 소개 글에는
"신촌극장(*2017년 6월 개관)은 물리적인 한계와 제약이 가득한, 아주 작은 옥탑 공간이다. 다만 장르 불문의 공연 예술이 함의하는 다채롭고 진취적인 자기표현의 장으로 기능하는 것을 목표하며, 매년 작가(창작자) 중심으로 꾸려진 라인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라고 쓰여 있는데, 실제 주거 형태 빌라의 옥탑에 위치하고 있다. 친구의 공연을 보러 처음 그 극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누군가의 자취방에 온 것 같다'라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극 역시 한 쌍의 연인이 동거하고 있는 작은 방을 주 무대로 진행되었다. 배우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만큼 내밀한 이야기는 인물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갔다. 실제로 인물들과 한방에 있는 듯한 느낌이 짙어 숨이 막혔다. 어쩌면 거리 조절의 실패로 그토록 울다 나왔는지도.
한참 후 신촌극장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신촌극장이 참 스스럼없이, 진득하게 관객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찾았던 공연은 [ 기가 막힌 산책 X 김헌기 ] 라는 극으로 그 좁디좁은 극장 안에 좁디좁은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더욱 좁디좁은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공연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이상한 복장의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며 나를 웃겨주어서 조금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리고 중간에 나눠준 따뜻한 꿀물이 참 맛있었다는 것. 기억나는 것은 이 두 가지 뿐이다.
원래 공연은 극장을 닮는다. 신촌극장의 공연들이 그 공간과 닮아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사는 빌라의 꼭대기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극장은 실제 삶과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들려주는 이야기로도 나와의 거리감을 좁히려 든다. 불쑥 개인적인 얘기를 해서 나의 마음 한편에 기어이 자리를 만들어내고, 내쫓아버릴 수 없게 기대온다. 나도 마음을 줘버릴 수밖에 없게.
3. 오페라 코믹
‘장 끌로드 아저씨’. 왠지 파리의 길거리에서 짝다리를 짚고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는 아마도 예술가일 것이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선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좋아할 것이고 술은 더 좋아할 것이다. 목정원 작가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이란 책에서 ‘장 끌로드 아저씨’라는 장의 제목을 보고 마음대로 떠올린 이미지다.
티켓은 6유로였고, 한쪽 귀퉁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시성 없음.” 우리말로는 ‘시야제한석’ 정도였을 것이 그토록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에 웃음이 났다. 되려 솔직함이 좋으면서도, 그렇다면 왜 파는가 싶기도 했던 그 좌석. 그 발코니석. 무대 바로 옆, 오케스트라 피트에 면한 층층의 방. 무대의 3분의 2가 가려져 체념과 상상을 북돋우던. (129)
이 장에는 목정원 작가가 ‘장 끌로드 아저씨’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파리의 오페라 코믹(Opéra-Comique) 극장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시성 없음.”이라고 구분됐다던 발코니석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얼마 전 내가 일하고 있는 모 극장을 찾은 한 관객이 인터미션 때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끝 쪽에 따로 있는 좌석 예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가 가리킨 좌석은 2층 객석 맨 오른쪽의 돌출된 박스석으로, 시야가 제한되어 정말 자리가 없지 않은 이상 판매하지 않는 좌석이었다. 겉으로 보면 좋은 자리 같지만, 막상 자리에 앉으면 무대가 거의 안 보인다고 답을 드리자 그는 그러냐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오페라 코믹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의 발코니석에서 바라본 극장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그곳의 안내원도 나를 말리려나. 하지만 반 이상이 가려진 무대에서 눈을 돌리면 그토록 오래된 빨간색의 극장은 어떤 풍경을 보여주고, 또 어떤 이야기의 환영을 보여줄지 알아내야겠다. 언젠간 꼭. 파리에서 “가시성 없음”이 적힌 공연 티켓을 받아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