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어떤 냄새를 맡으면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의 체취, 혹은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은 여행지의 공기 냄새가 그런 것들이다.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그러나 아주 짙은 농도의 감정을 느낄 때에는 언제나 냄새와 소리, 촉감 같은 감각들이 함께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신체에 가까워질수록 그 감각을 상징화하거나 언어화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꽁꽁 싸인 기억들은 아마도 나의 몸 한편에 깊숙이 자리한 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든, 가장 아끼는 보물이 되었든 말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채롭다. 카메라가 등장한 이후 기억은 종종 시각적인 이미지로 환원되곤 하지만, 기억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가 한순간에 받아들인 모든 시각, 후각, 촉각과 같은 감각들은 서로 뒤엉키고 뒤섞여 하나의 기이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기억을 구름에 빗대어 본다면, 마치 이 세상에 같은 모양의 구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1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양은 어딘가 달라져 있다. 기억 역시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형체가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잡힐 것 같으면서도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정확한 형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작은 자극 하나에도 금세 모습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자극을 받으면 순식간에 그 모습을 바꾸어버린다.
너무도 소중한 순간이라 그 기억을 붙들어 매고 싶어 셔터를 눌렀음에도,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과 카메라가 담아낸 순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훗날 사진을 통해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이미 어딘가로 증발해버린 나의 기억은 해상도가 낮은 사진 위에 다시 천착되고 만다. 사진은 그 순간의 모습을 남겨주지만,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각 전체를 붙잡아두지는 못한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시각이나 소리는 카메라나 녹음기를 통해 어느 정도 기록하고 재현할 수 있지만, 냄새나 촉감은 그 감각의 경험 자체를 온전히 기록하고 완벽하게 재현하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특히 내가 정말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체취가 그렇다. 어떠한 향수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사람만의 체취가 있다. 아무리 비슷한 냄새를 맡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냄새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린다. 그 체취는 어쩌면 나에게 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매개체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향수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향기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라면, 향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결코 모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냄새 또한 완벽하게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마치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것처럼 다가오는 소설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다.
18세기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향수』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라는 한 남자의 삶을 따라간다. 그르누이는 악취가 진동하는 파리의 생선 시장에서 태어나자마자 버려지지만 살아남아 고아원에서 성장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비범할 정도로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몸에서는 어떠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던 ‘자신의 냄새’를 갖지 못한 그는 타인과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르누이는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한 소녀의 냄새에 강하게 매혹된다. 그는 그 향기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소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냄새를 보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이후 유명한 향수 제조인 주세페 발디니(Giuseppe Baldini)의 밑에서 일하며 향수를 만드는 기술을 익힌다. 그르누이는 자신의 천재적인 후각과 향수 제조 능력을 통해 세상의 모든 냄새를 소유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향수는 단순한 기술이나 직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존재감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더 완벽한 향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르누이는 파리를 떠나 남부 프랑스의 그라스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로르 리쉬(Laure Richis)라는 소녀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자신이 찾던 가장 완벽한 향기를 발견한다. 로르의 아버지 앙투안 리쉬(Antoine Richis)는 딸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지만, 그르누이는 끝까지 그녀를 추적하여 결국 살해한다. 그리고 이전에 살해한 여러 소녀들의 향기를 추출하고 보존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완벽한 향수를 만들어낸다.
그르누이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 순간, 그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몸에 뿌린다. 그러자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그를 살인자가 아니라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고 숭배하며, 심지어 그를 신적인 존재처럼 여기게 된다. 그르누이는 마침내 자신이 원했던 것을 손에 넣는다. 향기를 통해 인간의 마음까지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르누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향기는 사람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그것은 결국 향기에 의해 만들어진 사랑이었다. 아무도 향수 뒤에 있는 그르누이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르누이가 평생 찾아 헤맨 것은 최고의 향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향기를 통해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얻고자 했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가장 완벽하게 얻어낸 순간, 그것이 오히려 가장 공허한 것임을 깨닫는다.
체취가 없는 그가 향기를 통해 타인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부정해온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향기가 없어도, 아무런 체취가 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해줄 누군가를 그는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결국 그르누이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가지고 파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에게 향수를 전부 붓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그 향기에 매혹되어 그를 사랑하고 욕망한 끝에 그를 죽이고 먹어버린다. 그르누이는 그렇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이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연구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씁쓸하게 다가왔던 결말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고 싶다.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의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는가. 사랑은 어쩌면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이며,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생의 끝에서 주어지는 마지막 상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연인 사이의 사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애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정말 결핍된 존재일까. 우리 안에는 어딘가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평생 그것을 메우기 위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일까.
그르누이에게 그 구멍은 ‘나의 존재를 누군가가 알아봐주었으면 한다’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더 자신에게 없는 향기를 만들어냈고, 그 향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향수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가리는 가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잘 꾸며진 가면 없이는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서로의 가면만을 사랑하고, 정작 그 가면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 채 껍데기만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닿아 있고 분명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얼굴이 천으로 가려져 있어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나에게는 서로에게 닿고자 하면서도 결코 완전히 닿을 수 없는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것은 평화와 같이 그저 아름답게 만들어진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가면을 벗은 타인의 모습을 완전히 알 수 없더라도, 가면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일까. 애초에 나의 본 모습이란 무엇일까.
너무 많은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한 곳으로 귀결된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타인을 사랑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삶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향수』를 읽을 때면 지금은 별이 된 Avicii의 Wake Me Up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오른다.
Life’s game made for everyone, and love is the prize.
어쩌면 우리가 평생 방황하며 찾아 헤매는 것은 거창한 답이 아니라, 결국 서로의 존재를 알아봐주고 사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자신만의 사랑을 찾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