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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가장 비참한 불행 속, 숨겨진 실존을 찾아서 [도서/문학]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에 대한 애도로서의 기록, 『소망 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

by 서연화 에디터
2026.07.22 14:51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심장이 뛰고, 숨을 쉬며,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인간인 한,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생존의 증거 너머에 실존,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타자와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자기(Self)를 형성해 나가는 존재로, 그에게 ’자기됨‘은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매 순간 성취되어야 할 실존적 과제이다. 그러나 이 관계 맺음 속에서 자기 자신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 곧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삶의 형태는 그가 말한 깊은 좌절, 나아가 권태와 우울의 상태에 해당한다.

 

페터 한트케는 이러한 삶의 비극적인 형태를 『소망 없는 불행』에서 그의 어머니의 일생을 통해 형상화한다. 그는 어머니가 시대적 억압과 일상의 무의미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잃어가며, 결국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자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마치 현재 느껴지는 감정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의 독특한 서술 방식 덕분에 독자는 어머니의 고통을 내면화하게 되고, 어머니의 삶이 신문 기사 한 줄의 비극 - “토요일 밤 A면의 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 - 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처절한 실존적 저항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소망 없는 불행』은 페터 한트케만의 어머니에 대한 애도이자,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인 어머니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서술 방식으로 풀어낸 어머니의 고통


 

페터 한트케는 대표작, 전위적인 희곡 『관객 모독』을 통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그 후에도 문학적으로 이어온 실험적인 시도를 인정받아 다수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2019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작가이다. 그는 희곡, 소설, 시 등 장르를 넘나들며 인간의 내면과 언어의 한계를 차분하고도 실험적인 문체로 탐구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기성 문학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재창조하고자 하는 그의 실험적인 스타일은 그의 자전적 소설, 『소망 없는 불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관객 모독』이나 『카스파』와 같은 작품에 비하면, 이 저서는 언뜻 보면 그만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서술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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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그가 “회상과 서술의 기계”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생의 완결된 어느 한 시기”로 회상하며, 그녀와 거리를 두고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연대기적 서술 방식으로 어머니의 삶을 재현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설을 집필하면서 그는 어머니와 객관적 거리감을 두는 데 실패하게 되고, 전통적 전기 서술 방식이 어머니의 삶의 복잡성과 언어로 형상화될 수 없는 트라우마적 본질을 담아내지 못함을 깨닫는다.

 

결국 한트케는 과거에 이미 극복되어 완결된 것처럼 사건을 객관화하는 체계적인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존재와 그녀가 겪은 고통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지금도 지속되는 사건으로 생생하게 현재화하는 주관적 서술 방식을 시도한다. 이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는 완결되거나 위안을 주는 결말로 마무리되지 않고, “이 모든 것은 나중에 보다 상세히 쓸 예정이다.”라는 말로 끝맺음으로써 ‘완결된 이야기’ 형식을 의도적으로 해체한다. 따라서 한트케는 전통적 서술 방식을 그 한계를 드러내고 부정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이상적 문학 형식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며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있다.

 

 

 

실존을 향한 저항으로서의 어머니의 삶


 

페터 한트케이자 서술자 ‘나’의 어머니는 1900년대 초반 당대 여성의 전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삶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차별 대우와 수치심의 강요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다, 결혼과 가정의 형성에 대한 의무, 그리고 과도한 가사로 보낸 무미건조한 중년기의 결혼생활을 거쳐 말년에는 질병과 자살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의 궤적이 재현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사회적인 관습과 규범에 순응해 오기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처절한 실존적 저항이 담겨 있다. 이러한 그녀의 저항은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철학과도 깊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키에르케고어에게 있어, 인간의 정신은 결코 화해될 수 없는 대립된 조건들을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종합’해 나가며, 이러한 정신이 행하는 종합의 운동이 ‘자기 자신’을 형성해 간다. 따라서, ‘자기(Self)’란 이미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종합의 과정에서 타자와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으며 매 순간 형성되어 나가는 확정되지 않은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나가느냐에 따라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 나갈 수도, 마음속 깊은 절망에 빠져 끝도 없는 불행을 경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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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본성이 재기발랄했고 성적도 우수했던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강한 욕망을 품었지만, 아버지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그러나 다른 소녀들과 달랐던 그녀는 가출을 감행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자 한다.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며,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해 나가는 존재이다. 그녀가 느낀 욕망은 정신이 발전하면서 자기 존재와 ‘자유의 가능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현해 보고자 한 의식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그녀의 가출은 사회적·육체적 조건으로서 여성이라는 ‘유한성이자 필연성’ 속에서도,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며 자신을 형성해 나가려는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성인이 된 그녀는 전후 상황 속에서 전쟁 중 독일 당원이었던 기혼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키가 작고 나이도 많았지만, 그녀는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와의 아이인 서술자를 낳기 직전, 아이에겐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의무감에 사랑하지도 않는 한 독일군 하사와 결혼했다. 전쟁 후 베를린에 정착한 그녀는 “무엇인가 거부한 것이 거부를 당하게 되고, 밀었던 것이 밀침을 당하게 되고, 욕했던 것으로부터 욕을 먹게 되는 그런 비참함”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욕망을 잃고, 사회적 관습에 따라 행동하며 점차 자신의 개성을 상실한다. 결혼생활 동안 그녀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일은 몇 차례의 낙태뿐이었다. 그녀는 ‘유한하고 필연적인’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 애썼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로운 삶, 되고 싶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일찌감치 잃고 깊은 공허와 절망에 빠진다. 그럼에도 유부남과의 관계나 낙태와 같은 행위는, 그녀가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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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스트리아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는 서술자와 함께 책을 읽으며 자의식을 얻게 되지만,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것을 도울 뿐 “결코 미래를 향한 꿈”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혐오하던 남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점차 관대해지지만, 그녀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간다. 그녀는 신체적 고통과 더불어 쓰라린 고독감과 공허, 삶에 대한 권태감으로 인한 지독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는 말을 남긴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결국 자살을 행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음에서 무수한 실패를 경험하며 결국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지독한 혐오감을 느낀다. 어느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좌절은 더욱 깊이 파고들어 그녀를 병들게 만들었다. 그 병은 의사도 정확히 그녀의 어디가 나쁜지 모르는, “참으로 산 일이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살 수도 없는”, 그러나 죽음의 고통만 계속되는 불행한 병,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결국 그녀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자기 자신이 현존하지 않는 가장 비참하고도 고통스러운 불행, 곧 ‘소망 없는 불행’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자신이 되어보고자 자살이라는 마지막 실존적 결단을 내린다. 더 이상 실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에서도 엿보지 못한 그녀는, ‘살아 있는’ 영혼이 이미 죽은 듯 부패해 가는 순간, 오직 죽음 속에서만 자기 존재의 마지막 실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녀는 절망의 고통 속에서 단순히 도피하려고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니라, 삶을 끝내는 순간조차 자기 존재를 선택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실존하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의 비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실존을 향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향하게 만들지만, 생을 그만두는 순간이 바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순간이다. 서술자가 “드디어 평화롭게 잠들게 되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어머니의 유서 속 문장이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어머니의 자살은 살아 있는 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었던 그녀가, 죽음 속에서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이 되려 한 절망의 극단적인 표현이자, 동시에 실존을 향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처절한 실존적 저항인 것이다.

 

 

 

‘자기됨’의 과정에서 받아들인 어머니의 존재


 

그녀의 삶은 단순히 ‘자살’이라는 개인적 비극으로만 귀결되지 않음을 키에르케고어의 철학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트케가 자신의 어머니의 일생을 기록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작품의 서두에서 신문 기사 한 줄로 요약된 어머니의 죽음보다, 자신이 그녀를 더 잘 알고 있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이는 단순한 사실의 복원이 아니라, 글쓰기 행위를 통해 어머니를 이해하고 열정적으로 변호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한트케는 어머니의 죽음이 흥미로운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비극이 아니며, 그 속에는 실존적 고통과 저항이 담겨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처럼 그가 어머니의 삶을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 것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게 된 자신을 이해하고, 그녀의 존재를 복원하려는 절실한 시도로 읽어낼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가 극단적인 언어 상실을 겪을 정도로 작가로서의 자아,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 모두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그는 언제나 말문이 막히거나 아무것도 써낼 수 없는 순간, 즉 창작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항상 글을 쓰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순한 창작 소재가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중하고도 중요한 존재였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는 종종 어머니의 꿈을 꾸며 그녀를 자신의 제2의 자아로 느꼈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어머니와 관련한 따듯한 기억들을 재발견하며, 그녀가 살아온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시도하게 된다. 따라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작가로서의 개성과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기 성찰을 통해 진정한 ‘자기됨’을 찾아가는 실존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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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개인적 정체성의 확립을 넘어, 문화적 기억의 차원에서 어머니의 삶을 기록하고자 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그녀를 최종적으로 비인간화시켰던 반면 모든 사람들을 홀가분하게 했다.” 즉, 그것은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식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음으로써 불편한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차였다. 그는 묘지를 떠나는 사람들과 달리 가만히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사람들뿐 아니라 그녀의 죽음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자연조차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모욕감과 분노 속에서 그는 어머니가 단순히 망각의 재로 남지 않도록, 글쓰기를 통해 그녀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삶에 대한 새로운 완결이나 구원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라우마를 치유와 극복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잊히지 않는 기억 속 트라우마 그 자체로 보존하여 고통이 계속 상기되도록 한다.

 

이처럼 어머니의 트라우마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의 내면에 완전히 보존되어, 현재까지도 그녀의 고통이 그의 마음속에서 지속되게 된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 위로받거나 고통에서 해소되는 상태가 되지 않고, 오히려 트라우마를 치료하거나 승화시키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로 나아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하기보다, 불완전하고 애매모호한 자기 자신을 인식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 속에 던져진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기억이 아닌, 언제나 내면 속에 함께 살아가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즉, 글쓰기를 통해 그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자신의 마음속 깊이 묻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망 없는 불행』은 페터 한트케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위해 치른 내면의 장례식이자, 어머니에게 바치는 그의 진심 어린 애도이다.

 

 

 

나가며


 

『소망 없는 불행』은 한트케가 어머니의 실존적 삶을 기록하며 자기 자신을 찾고,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애도하고자 한 책이다. 그는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글쓰기’를 통해, 어머니의 삶이 그저 ‘소망 없는 불행’에 내밀린 삶이 아니라, ‘소망 없는 불행’ 속에서도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 저항으로서의 삶이었음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지지 않길 바라며,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고 보존하고자 한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트케가 남긴 기록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삶을 마치 우리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인간에게 있어 실존이 죽음보다 더 두렵고 중요한 문제임을 일깨워 준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떳떳하게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면서 깊은 밤 그녀가 조용히,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을 따라 우리는 나 자신의 실존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과연 자신이 되기 위해 저항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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